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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상호의 시네마 크리티크] 원본의 가치가 무용해진 시대, <익스펜더블>로 본 육체의 위기
[송상호의 시네마 크리티크] 원본의 가치가 무용해진 시대, <익스펜더블>로 본 육체의 위기
  • 송상호(영화평론가)
  • 승인 2024.02.19 09: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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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대 스크린에 더 이상 육체의 자리는 없나

영화 속 육체는 과거부터 현재까지 실시간으로 지속해서 현현하는 대상이며, 그 대상의 존재 여부 역시 의심되지 않는다. <헝거>(2008)에서 단식 투쟁을 벌이는 앙상한 몸의 바비 샌즈(마이클 패스벤더)와 <알리타: 배틀엔젤>(2019) 속 나노테크 바디를 두른 휴머노이드 알리타를 각각 떠올려 보자. 우리는 두 존재로부터 무엇을 느낄 수 있나. 실재와 가상을 가르는 논의에 함몰되는 대신, 육체가 주는 인상 자체에 단번에 사로잡히는 최면에 빠지지 않나. 과연 육체는 그만큼 매혹적이고 강렬한 매개체다. 이쯤에서 육체를 다루는 영화들이 직면한 현 상황에 주목해보는 게 어떨까. 우리는 영화는 육체를 어떻게 대하고 또 육체는 영화에서 어떻게 현현하는지 그 상호작용의 일부를 머금은 채 들여다봐야 한다.

 

액션 스타의 종말, 육체의 소멸?

1980~90년대 액션 스타들에 열광했던 매니아들의 판타지를 자극하고 니즈를 소소하게 채워낸 <익스펜더블> 시리즈는 10여년 간 네 편의 영화로 관객과 만나왔다. 실베스터 스탤론의 야심찬 프로젝트가 겨냥하는 건 명료하다. 왕년의 액션 스타들을 한데모아 그 시절 그 감성을 환기하는 팬서비스의 총집합 선물세트를 펼쳐내는 것. 제작 의도가 선명했기에, 오히려 영화의 목적 달성 여부를 판가름하는 건 쉽다. 문제는 <익스펜더블> 시리즈를 감싸고 맴도는 그림자에 있다. 이 그림자는 바로 현 시대에 이와 같은 형태의 영화가 더는 유효할 수 없다는 데에서 기인한다.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채 휘청거리는 영화의 자기파괴적 선언은 시리즈가 거듭될수록 더욱 선명하게 구체화된다. <익스펜더블>(2010)의 흥행에 힘입어 더 많은 배우들을 동원한 <익스펜더블 2>(2012)는 더 많은 쾌감과 흥미 요소로 가득 차 있었다. 이어지는 <익스펜더블 3>(2014)는 완급조절과 함께 ‘신구조화’와 ‘온고지신’에 주목하면서 시리즈의 지속성과 외연 확장을 염두에 두려고 했다. <익스펜더블 4>(2023)는 조금 달랐다. 4편은 옛것의 종말을 고하는 선언문 내지는 스러져가는 옛것을 이제 도저히 붙잡을 수 없노라 되뇌이는 고백록에 가깝다. 바니 로스(실베스터 스탤론)는 까맣게 타 버린 시체가 됐고, 그의 곁을 지켰던 리 크리스마스(제이슨 스타뎀)는 팀에서 쫓겨났으며, 그 어떤 전사도 없이 익스펜더블에 합류한 지나(메간 폭스)와 래쉬(레비 트란)는 원년 멤버들이 오랜 기간 동안 이어온 관례를 전혀 모른 채 단절을 겪고 유대감 형성에 얼마간 적응 기간을 거친다.

이 지점에서 명확히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게 있다. 4편이 단순히 액션 스타의 종말 내지는 육체의 소멸을 고하는 영화였다면, 이 글이 작성될 이유는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중요한가. 바로 <익스펜더블 4>에 내재한 속성을 머금는 일보다도, 4편이 개봉한 현 시대의 흐름과 관객석 바깥의 현실에 깃든 정신을 가늠해보는 작업이 필요하다. 우리는 영화만이 아닌, 그 안팎을 둘러싼 상황을 함께 살펴야 한다. 현 시대는 육체를 오롯이 담아낼 수 있는 환경이 아니며, 영화 역시 이 시대에 맞게 육체를 담아내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왼쪽부터) '익스펜더블'에 출연한 실베스터 스탤론, 이연걸, 랜디 커투어, 테리 크루즈, 제이슨 스타뎀의 모습. 싸이더스 제공
(왼쪽부터) '익스펜더블'에 출연한 실베스터 스탤론, 이연걸, 랜디 커투어, 테리 크루즈, 제이슨 스타뎀의 모습. 싸이더스 제공

 

사라져가는 ‘원본’의 가치

그렇다면 이어 던져볼 수 있는 질문. 육체가 어떻게 스크린에 담겨야 할까? 이 고민의 실마리를 풀려면 우리는 ‘원본의 가치’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의 육체를 둘러싼 미디어 환경은 어떠한가. 이 시대는 <익스펜더블>의 오마주나 패러디 같은 전략들을 무효화하고 있다. 다시 말해 급변하는 매체의 홍수 속 육체가 육체 그자체로서 온전히 존립할 수 있는지 따져보는 작업이 중요해졌다. 그런 점에서 GPT나 DALL-E를 비롯한 생성형 AI의 등장은 스크린 속 육체의 시대에 다소 이른 종말을 고하는 신호탄이다. 딥페이크가 난무하고 시각 정보를 임의로 조작해 수용자를 마음대로 유린하는 게 너무나도 손쉬워진 세상에서, 그 육체의 파괴력이 발휘되는 순간들은 어쩔 수 없이 사라져 간다.

간단한 사례만 봐도 그렇다. 터미네이터로 분했던 아놀드 슈왈제너거의 강인한 육체는 더 이상 붙잡을 수 없는 과거의 유산이 됐지만, 그 육체는 얼마든지 재생성·재소환되며 쇼츠와 릴스를 떠도는 망령이 된다. 명령어 입력 몇 번만 거치면 원본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한 자태를 뽐내며 우리 앞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진위 여부를 판가름내는 일이 이 시대에 매우 힘들어졌기에, 원본이 주는 감흥을 수용하는 법이나 받아들였을 때의 효과 자체를 논하는 게 무의미해졌다는 데 있다.

그렇지만 <익스펜더블> 시리즈는 쉴 틈 없이 출연진 각자가 주목받았던 영화 속 특정 대사나 액션 등뿐 아니라 신과 시퀀스를 오마주하고 패러디하는 데 심혈을 기울인다. 2편에서 아놀드 슈왈제너거는 그의 대표 출연작 <터미네이터>로 대변되는 명대사 “금방 올게(I’ll be back)”를 셀프 오마주한다. 이어 브루스 윌리스는 “그 멘트 지겹거든? 금방 올게(I’ll be back)”라며 응수하고, 슈왈제너거가 이를 다시 받아쳐 “빌어먹을(Yippee-ki-yay)”이라고 말한다. 마지막 슈왈제너거의 대사는 윌리스의 대표작 <다이 하드>(1988) 속 존 맥클레인의 전매특허다. 결국 원본에 기대 레퍼런스를 계속해서 재구성하고 재생산하는 모습만 반복된다.

원본에 깃든 힘이 희미해진 탓에 오마주와 패러디를 가르던 기준과 그 경계마저도 모호해지는 상황에서 <익스펜더블>은 설 자리를 잃는다. 육체는 언젠가 소멸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까지나 열혈 경찰 존 맥클레인을 마주할 수 없고, 그저 필름에 박제된 윌리스의 육체가 지닌 환영만 이따금씩 꺼내볼 수밖에 없는 셈이다. <익스펜더블> 시리즈의 전략이 더는 성립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오마주·재현·패러디 등의 전략은 원본의 가치가 빛나는 시대일 때 그 존재감을 대중에게 각인시킬 수 있지만, 이젠 그럴 수 없다. 21세기 이후의 대중들은 쏟아지는 정보를 무분별하게 수용한다. 그렇기에 <인스펜더블> 시리즈의 제작 의도 자체가 시대와 조응할 수 없다는 한계가 수면 위로 떠오른다.

 

'익스펜더블 2'에 트렌치 역으로 출연한 아놀드 슈왈제너거의 모습. 롯데컬처웍스(주)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익스펜더블 2'에 트렌치 역으로 출연한 아놀드 슈왈제너거의 모습. 롯데컬처웍스(주)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늙은 몸뚱이의 비애

이 시리즈는 스러져가는 액션스타들을 한데 불러모아 노년의 육체에 대한 헌사를 바치고, 그들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데에도 한계를 드러낸다. 정녕 그랬을 거였다면 스탤론이나 이연걸이 자신의 출연작 속 시그니처 액션을 재현하거나, 브루스 윌리스와 슈왈제너거가 서로의 히트작 대사를 바꿔 대화하는 등 오마주나 패러디에만 그쳐서는 안 됐다. 결국 <익스펜더블>은 그 무엇도 건지지 못한 영화가 되는 셈이다.

그래서 택했어야 하는 노선은 하나였다.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육체의 고단함을 노출시켰어야 했다. 이쯤에서 네 편의 <존 윅>이 노쇠한 키아누 리브스의 몸을 있는 그대로 수용했던 걸 기억하면 좋다. 존 윅의 액션이 매력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나. 많은 평자들이 현실감 넘치는 액션 스타일 고증을 꼽지만, 그보다는 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처절한 존 윅의 액션이 바로 해당 역을 맡은 키아누 리브스의 노쇠한 몸상태와 연동됐기 때문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매트릭스>, <콘스탄틴> 등에서 길쭉하면서도 중량감 있는 특유의 아우라를 선보이며 액션을 소화했던 리브스가 <존 윅>에서 그 찬란했던 젊은 시절을 재현하는 모습을 볼 수 없다. 애초에 영화엔 그러려는 의지도 배어 있지 않다. 이게 바로 <익스펜더블>이 품었어야 하는 마음이다. 바로 ‘현재를 받아들이는 것’.

당연한 말이지만, 3편 속 닥터 데스(웨슬리 스나입스)의 액션은 무색무취로 인식됐을 확률이 높다. 이제 장도를 휘두르며 각잡힌 무술을 선보이던 근육질의 블레이드는 없고, 과거의 잔상에만 사로잡혀 온전히 1인분을 해내지 못하는 늙은 몸뚱이만 남았다. 하지만 <익스펜더블 3>는 더는 소환할 수 없는 과거에만 머무르는 실수를 저지른다. 3편에서 스나입스가 자주 내뱉던 대사가 (칼로 적의 목을 가져오는 데 익숙하다는 걸 암시하는) “대롱 대롱”이라는 사실을 기억해보면, (닥터 데스가 아닌) 스나입스에게 깃든 과거가 그를 잠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또 스나입스가 파쿠르, 맨몸 액션에 이어 검술 액션을 선보일 때 뱉는 “감히 칼로 날 공격해”라는 대사 역시 <블레이드>의 잔상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모르겠다는 회한의 고백처럼 들린다.

여전히 핵심은 이 ‘늙은 몸뚱이’에 있다. 세월의 흐름을 증명하는 게 이 육체이지 않은가. 그러니까 문제는 이 육체를 다루는 방식이다. 스나입스는 예전처럼 칼을 휘두르거나 리드미컬하면서도 절도 있는 몸놀림으로 상대를 유린할 수 없기에, 그가 현재로서 할 수 있는 것들에만 집중하는 게 좋다. 세월을 정통으로 맞았지만, 노련미는 살아 있을 테니 관록을 무시할 수 없다는 점을 이용하면 되지 않나.

 

'익스펜더블 3'에 닥터 데스 역으로 출연한 웨슬리 스나입스의 모습. 롯데컬처웍스(주)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익스펜더블 3'에 닥터 데스 역으로 출연한 웨슬리 스나입스의 모습. 롯데컬처웍스(주)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그런 점에서 <노바디>(2021)도 <익스펜더블>이 추구했어야 할 노선의 참고본으로 생각해볼 만한 영화다. 물론 <노바디>의 밥 오덴커크는 왕년의 액션 스타로 볼 수 없지만, 영화가 ‘올드맨’을 어떻게 다루는지 살펴보기 위해 그를 끌고 왔다는 걸 미리 언급해두겠다. <노바디>에서 허치 맨셀(밥 오덴커크)은 전직 FBI 감찰관으로, 은퇴 이후 그의 삶은 평온한 일상조차 사치일 정도로 따분하고 비루하다. 한때 악명을 떨쳤지만 지금은 불필요한 싸움을 지양하는 데 익숙해졌다.

이때 <노바디>는 과거 향수 따위에 연연하지 않는 뚝심을 보여준다. 우리는 잘 나가던 시절의 맨셀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시시각각으로 현현하는 육체를 선보이는 그를 실시간으로 감각하게 된다. 노쇠화에 따른 신체 가동의 한계라든가 근력 약화 탓에 싸움을 어렵게 풀어가는 모습 등이 여과 없이 관객들에게 노출된다. 얻어터지거나 찔리고 넘어지고 크게 다친다. 당연하다. 나이에 걸맞게 성치 않은 몸을 이끌고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익스펜더블>은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겠다는 생각만 가득하지, 실시간의 육체를 스크린에 제대로 아로새기려는 의지는 보여주지 않는다. 아니 관심이 없다고 표현하는 쪽이 더 타당하겠다.

물론 <익스펜더블 4> 속 거너(돌프 룬드그렌)가 맨셀과 접속될 수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사실은 4편의 존재 의의를 살려주는 몇 안 되는 위안거리다. 시리즈 내내 알코올 중독자로 살아온 저격수 거너는 술을 6개월간 끊었다. 문제는 술을 끊으니 본업인 저격을 못한다는 것. 이제 그는 고정된 타겟조차도 빗맞히면서 눈을 어디다 두고 다니냐는 동료의 비아냥에 반박조차 못하고 있다.

룬드그렌은 <록키 4>의 이반 드라고 역으로 주목받은 이래로 메이저 주연급은 아니더라도, 그만의 강직한 실루엣과 터프한 액션으로 확실한 정체성을 구축했던 액션 스타였다. 사이보그처럼 강인한 육체를 스크린에 내걸었던 그가 이제는 노안이 와 제대로 저격을 할 수 없는 상태의 초라한 저격수가 됐다니 얼마나 아련한가. 영화 역시 이 같은 그의 한계를 교묘하게 가리거나 숨기지 않은 채 노출했다. 이로 인해 <익스펜더블 4>에서 관객은 뒤안길로 밀려가는 한 배우의 육체에 새겨진 시간의 흔적을, 그로부터 배어나는 비애를 곱씹는다. 그가 노익장을 과시하는 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그간의 세월을 제대로 수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각하는 게 훨씬 가치 있다. 특히 네 편의 영화에서 이런 복잡한 감흥을 느낄 수 있는 기회는 룬드그렌의 사례를 제외하면 거의 찾아보기 힘들기에, 그가 처한 상황이 더욱 야속하게 느껴진다.

 

'익스펜더블 4'에 거너 역으로 출연한 돌프 룬드그렌의 모습. ㈜올스타엔터테인먼트 제공
'익스펜더블 4'에 거너 역으로 출연한 돌프 룬드그렌의 모습. ㈜올스타엔터테인먼트 제공

 

육체의 현현보다는, 육체를 둘러싼 비화

이젠 육체가 모습을 드러내는 현상 자체보다도, 육체가 스크린에 들어차기까지의 과정 내지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더 각광받는 시대가 됐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대표 예시는 바로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를 온몸으로 지탱해온 톰 크루즈의 사례에서 찾을 수 있다. 4편 이후 7편에 이르기까지 톰 크루즈가 어떻게 시그니처 액션을 무사히 소화하고 촬영할 수 있었는지 궁금해하는 반응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는 점을 상기해보자. 톰 크루즈는 두바이 부르즈칼리파를 등반하는 고층 빌딩 스턴트를 선보였고, 물속에서 인간의 한계를 넘는 시간 동안 숨을 오래도록 참고, 위험천만한 고공 비행을 선보이는 헬기에 매달리기도 했다.

이때 중요한 건, 액션 자체보다도 그게 성립된 배경이다. 이 역시 시대의 주요 화두가 변화하는 현상과 연결지어 생각해볼 만하다. 앞서 말했듯 현현하는 육체의 진위 여부를 따지는 게 무용해졌기에, 눈앞에 펼쳐진 육체가 어떻게 이곳에 도달할 수 있었는지 확인해보는 게 육체 자체를 들여다보는 일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 느낄 수밖에 없지 않나. 어떤 임의의 육체가 특징을 지닌 육체로서 재배치, 재정의되는 과정이 오히려 동시대에 들어온 이후로 원활하게 이뤄지는 셈이다.

다시 말해 스크린에 육체가 배치되는 경로를 따라가는 일은 여전히 유효할 수 있지만, 스크린에 육체를 가득 채우는 일은 생명력을 다했다. ‘액션 스타의 귀환’이라는 명제는 이제 소멸 단계에 진입했다. 환갑이 넘은 장 클로드 반담이 ‘굳이’ 온전치 못한 신체를 이끌고 속도감이 많이 떨어진 돌려차기를 선보일 필요가 전혀 없다. 어차피 퍼포먼스가 시원치 않다면, 그의 움직임은 그래픽 처리와 노화 보정 기술을 통해 과거의 그것처럼 그럴 듯한 속임수로 둔갑할 테고, 그마저도 안 된다면 그의 신체 전부가 조작된 픽셀들로만 채워질 게 뻔하다. 그만큼 인공지능의 발달이 원본을 위협하고 있다.

룬드그렌은 지난달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5편이 제작 단계에 돌입했으며 시리즈가 이어질 수 있다는 암시를 던졌다. 하지만 <익스펜더블 5>는 나올 수 없다. 아니 나와서는 안 된다. 소위 레트로를 들먹이며 과거의 잔향을 현재로 끌고와 확산하려는 시도는 일회성 이벤트에 그칠 뿐, 지속력을 상실했다. 결국 우리는 악착같이 네 편의 팬서비스를 이어 온 <익스펜더블> 시리즈를 통해, 더는 동시대 스크린에 육체의 자리가 없다는 사실만을 선명하게 감각하는 게 아닐지.

 

'익스펜더블 4'에서 거너(왼쪽 첫 번째)를 비롯한 팀원들이 작전 회의를 하고 있는 모습. ㈜올스타엔터테인먼트 제공
'익스펜더블 4'에서 거너(왼쪽 첫 번째)를 비롯한 팀원들이 작전 회의를 하고 있는 모습. ㈜올스타엔터테인먼트 제공

 

 

글‧송상호
영화평론가, 경기일보 기자로 활동하며 글을 쓰고 있다. 2021년 박인환상 영화평론 부문 수상. 2023년 영평상 신인평론상 우수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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