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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안의 인문학 서재] 『다시, 케인스』인가, 『굿바이, 케인스』인가 ?(Ⅱ)
[한성안의 인문학 서재] 『다시, 케인스』인가, 『굿바이, 케인스』인가 ?(Ⅱ)
  • 한성안 | 경제학자
  • 승인 2024.02.20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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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케인스에 반대한다!

*Ⅰ회에서 이어짐

 

『다시, 케인스』(존 메이너드 케인스, 조지프 스티글리츠 등 공저, 김성아 옮김, 2024, 포레스트 북스)
『다시, 케인스』(존 메이너드 케인스, 조지프 스티글리츠 등 공저, 김성아 옮김, 2024, 포레스트 북스)

두 번째 집단: 의심스러운 케인스의 윤리론, 그러나 바람직하지 않은 불평등

두 번째 집단은 케인스의 후예들이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로 분배와 불평등을 내세우지만, 그의 윤리론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윤리론만 아니면 첫 번째 집단과 같은 입장이다. 하지만, 이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으로 경제성장을 더 전면에 내세운다는 점에서 첫 번째 집단과 약간 다르다. 이는 경제문제, 곧 희소성의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케인스의 입장과도 다르다. 곧, 분배문제가 중요하긴 하지만 소득수준이 아직 거기에 충분히 미치지 못했다는 생각이다. 이럴 경우, 분배와 불평등문제는 그저 립서비스(!)로 남용될 소지가 크다. 로버트 솔로 노벨경제학상 수상자(4장)와 벤저민 프리드먼 하버드대 교수(8장)가 이 집단에 속한다.

가령, 솔로 교수는 4장 「케인스가 말한 손자 소녀는 누구인가?」에서 케인스의 좋은삶을 비꼬면서, 인간의 노동과 탐욕의 본성을 찬양한다. 나는 이처럼 케인스의 윤리론을 부정하는 이들을 케인지언 경제학자에 포함시키는 것이 좀 고민된다. 적어도 이 에세이의 핵심을 통해 밝혀지는 케인스의 미덕은 그의 윤리론이기 때문이다.

벤저민 프리드먼 하버드대 교수는 8장 「역사적 맥락으로 본 경제적 행복」에서 이전보다, 그리고 남보다 더 부유해지려고 하는 욕망은 인간에게 본질적이라고 본다. 곧, 인간에게 절대적 만족 수준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본성론에 따르면, 어느 시점에 이르면 인간은 물질에 대해 과유불급의 행복을 누린다는 케인스의 윤리론은 통하지 않게 된다. 이로써 경제문제도 영원히 해결되지 않는다. 무한한 욕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소득분배와 성장이 필요한데, 그중에서도 성장은 제일 중요하다. 왜냐하면 “경제성장을 추구하는 것은 정치, 사회적으로 중요하고 긍정적인 외부효과를 일으키는 원천”(p.248)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은 케인스의 ‘좋은 삶’보다 분배가 필요하고, 더욱이 특별히 성장이 시급하다고 본다.

 

세 번째 집단: 케인스는 허튼소리를 한다

세 번째 집단은 철저히 반케인스적이다. 에드먼드 펠프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5장), 리 오헤니언 UCLA 교수(6장), 리처드 프리먼 하버드대 교수(9장), 로버트 프랭크 코넬대 교수(10장), 장 폴 피투시 유럽대학연구소 교수(11장), 미켈레 볼드린 및 데이비드 레빈 워싱턴대 교수(12장), 게리 베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및 루이스 라요 시카고대 교수(13장) 등 무려 9명은 케인스의 본성론과 윤리론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며, 심지어 조롱한다. 동시에 케인스의 전망과 다른 현상들, 곧 ‘늘어난 노동시간’, ‘줄어든 여가’, 곧 ‘일중독사회’와 ‘소비지상주의적 행복’을 부각하면서 그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앞에서 본 것처럼, 첫 번째 집단도 케인스가 이런 현상들을 예상하지 못한 사실을 지적했다. 하지만 그들은 이것들을 비판적으로 조명하면서 이것들을 극복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이들에게 불평등과 광고의 융단폭격은 이 모든 ‘나쁜 삶’의 경제적, 문화적 근원이다. “미국 사회에서 점점 더 심화하는 불평등 또한 ‘소비주의’와 그에 상응하는 낮은 여가 수준의 원인이 될 수 있다. 낮은 생산성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소비를 덜 하는 사람들도 부유한 이웃과 자신의 소비 사이에 관찰되는 격차를 줄이려 고군분투하게 되기 때문이다.”(p.100)

세 번째 집단처럼 두 번째 집단도 케인스의 윤리론과 본성론 자체를 부정하지만 적어도 불평등을 옹호하진 않았다. 로버트 솔로는 불평등을 해소할 방안으로 자본 소유의 민주화를 제안하기까지 한다. “우리의 손자 손녀, 혹은 그들의 손자 손녀들이 진정으로 생존가능한 세상에서 살려면 자본의 소유가 민주화되어야 한다. 만약 자본이 주된 수입의 유일한 원천이 된다면 중요한 이들 모두가, 즉 모두가 자본 소득에 대한 적절한 청구권을 가져야 한다.”(p.172)

그러나 세 번째 집단에겐 두 번째 집단의 ‘소박한’ 진보성마저 조롱의 대상이 된다. 이들의 경제학적 관점을 정치적으로 해석하면 보수를 넘어 실로 극우적이다. 이른바 신자유주의의 전사들인 셈이다. 이 집단의 첫 번째 주자인 에드먼드 펠프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5장)는 「협동조합주의와 케인스: 그의 성장철학」에서 케인스의 협동조합주의, 연대주의, 반물질주의를 집중적으로 비난한다. 그의 윤리론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협동조합주의 문화의 하나인 연대주의는 그런 개인의 발전 과정을 저해한다. 반물질주의가 부의 가치를 평가 절하하고 소유한 재산을 증대하려는 개인의 가시적 노력에 눈살을 찌푸린다면, 연대주의는 공동체를 벗어나려는 개인의 시도를 용납하지 않는다. 연대주의 사회에서 눈에 띄려 하거나 공동체를 벗어나려고 애쓰는 사람은 미움을 받는다. 안타깝게도 케인스는 직업 경력에서 개인의 열정과 발전을 북돋는 혁신의 역할에 대해서는 전혀 일깨워주지 못했다.”(p.188)

그러면서 펠프스는 노동주의, 곧 일중독과 혁신주의를 찬양한다. 하지만 그는 무익할 뿐 아니라 해롭기조차한 ‘불쉿노동’,곧 가짜노동(!)의 현실을 외면한다.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그의 저서 『불쉿잡』(2022, 민음사)에서 이런 가짜노동이 무려 40%에 이른다고 추산한다. 더욱이 금융과 부동산업종에서 ‘돈 놓고 돈 먹는’ 투기에만 전념하는 비도덕적 직종의 일중독 전문가(!)를 혁신주의와 실용주의에 기대어 찬양한다. 하지만 그가 인용한 존 듀이의 프래그머티즘 철학(실용주의)은 그러한 낭비와 부도덕을 찬양한 적이 없다.

리 오헤니언 UCLA 교수(6장)도 「케인스와 함께 백 투 더 퓨처」에서 미국사회의 일중독을 옹호한다. 케인스는 “미래에는 부유함이 비생산적인 여가생활과 불행을 낳을 수 있다는 두려움 속에 경제학자의 권위를 빌려 청교도적 미래상을 제시한다. 오늘날 우리는 그의 전망처럼 경제적 부유함 속에 살고 있지만, 미국 같은 선진국 국민은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오래 일한다. 게다가 유럽 사람들의 노동시간이 지난 40년에 걸쳐 짧아진 이유는 부의 증대 때문이 아니라 세금 인상과 노동시간에 대한 다양한 제약 및 급여 프로그램 때문이다. .... 나도 우리 사회가 충분히 부유해져서 개인이 원하면 여가를 더 쓸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원한다. 하지만 여가의 선택이 노동과 저축의 유인을 억누르는 정부 정책에 의해 결정되지는 않았으면 한다.”(p.209)

이와 함께 그는 케인지언 복지정책에 맹공을 퍼붓는다. “선진국들이 궁극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추진되었던 최악의 정부 정책들이 개정되거나 폐지되었기 때문이다. .... 만약 이런 정책들이 계속됐다면 오늘날 영국과 미국은 케인스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가난했을 것이다.”(p.293) 하지만 펠프스는 단순한 노동 대신 기술혁신이 성장을 촉진하였으며, 케인지언 국가개입정책과 서구 사회의 복지국가가 자본주의 경제를 침체에서 구했다는 사실에 애써 침묵하고 있다.

 

소비지상주의와 일중독사회는 소망스럽다

리처드 프리먼 하버드대 교수(9장)의 에세이 「우리는 왜 케인스가 예견한 것보다 더 많이 일할까?」는 진보경제학자인 내게 무척 유감스런 글이다. 그는 내가 집필한 『진보집권경제학』(2020, 생각의 길)에서 즐겨 인용한 노동경제학자다. 하지만 그는 미국식 경제체제, 불평등, 세계화, 기술발전이 야기한 과잉노동을 지적하면서도, 그것들을 본성론으로 정당화하며 오히려 찬양하고 있다.

 

9장 「우리는 왜 케인스가 예견한 것보다 더 많이 일할까?」, 리처드 프리먼 하버드대 교수
9장 「우리는 왜 케인스가 예견한 것보다 더 많이 일할까?」, 리처드 프리먼 하버드대 교수

“어쩌면 우리는 케인스가 바랐던 것처럼 탐욕과 경제적 실익, 무의미한 경쟁을 거부하고 더 여유로운 세상을 위해 정진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런 규범경제학의 관점은 그것이 케인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과 비슷한 이유로 오늘날 여러 사회학자와 분석가의 관심을 받고 있다. 흥을 깰 수도 있겠지만, 나는 노동과 여가에 대한 규범적 시각에 반대한다. 목적 지향적 행동을 탄식하기보다는 오늘날의 소비와 행복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우리를 앞으로 더 정진할 수 있도록 해 주는 내적 조장 메커니즘을 칭송하는 편이다. .... 짐작하건데, 진화는 에덴동산의 존속이 아닌 인간의 생존을 위해 우리에게 직업윤리를 주입했을 것이다. 나는 이런 점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다.”(p.264~265). 그의 노동주의와 쾌락주의적 윤리관에는 ‘좋은삶’에 대한 성찰이 전혀 없고, 이런 논의를 조롱할 뿐이다.

하지만 ‘호모 라보란스’라는 그의 일방적 본성론은 석기시대에 관한 인류학적 실증연구결과와 어긋난다. 마셜 살린스의 『석기시대 경제학』(2023, 한울)에 따르면, 우리 종 진화사의 90%를 차지하는 석기시대의 인간은 호모 라보리안스의 삶을 살지 않았다. 오히려 네덜란드 문화인류학자가 호명한 호모 루덴스, 곧 놀이하는 존재에 더 가까웠다. 가령, 호주 안헴랜드 원시부족을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원주민들은 열심히 일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식량의 획득과 준비를 위해 사용하는 1인당 1일 평균 노동시간이 4~5시간에 지나지 않았으며, 게다가 매일 지속적으로 그렇게 일하지도 않았다. 남는 시간은 대부분 수다를 떨거나 먹고 자며, 이웃을 방문하는 데 소비하고 있었다. 보츠와나지역의 부시맨도 이런 호모 루덴스의 생활태도를 취했다. 이들의 1일 평균 노동시간은 2시간 9분이었다. 인간은 노동에만 최적화된 채로 진화하지 않았다!

로버트 프랭크 코넬대 교수(10장) 역시 리처드 프리먼 교수의 견해를 어느 정도 공유하고 있다. 다만 프리먼이 ‘노동하는 존재’로부터 노동과 소비를 옹호하는 것과 달리 프랭크는 그의 에세이 「케인스의 생각보다 상황이 더 중요한 이유」에서 ‘상황’과 ‘새로움에 대한 무한한 욕망’을 근거로 이것들을 옹호한다. “품질에 대한 요구는 보편적이며 사그라들지 않는다. 따라서 언젠가는 주당 2시간만 일해도 사람들 대부분이 원하는 모든 것을 살 수 있게 된다는 케인스 같은 사람들의 상상에는 심각한 오류가 있다.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p.275) 프랭크에 의하면 새로운 품질 자체에 대한 선호는 끝이 없을 것이며, 이런 소비에 대응하기 위해 끝없이 일할 것이다!

우리의 선호가 상황에 좌우되며, 새로운 품질에 대한 욕망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품질에 대한 욕망 역시 불평등, 광고, 과시와 모욕이라는 ‘또 다른 상황’의 산물일 뿐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외면한다. 새로운 품질에 대한 욕구가 불변의 본질이라고 단정할 순 없다. 새로운 품질에 대한 욕망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채 1세기도 안 된다. 더욱이 끝없이 등장하는 새로움이 끝없는 고역과 가계부채를 강화하고, 더욱이 우리의 생존기반인 생태계를 파괴하는 현실을 직시할 때, 그런 욕망이 얼마나 바람직할지는 의문이다. 케인스는 강조했던 “겸손”(p.60)의 미덕은 바로 이런 경제학자들을 향하고 있다.

장 폴 피투시 유럽대학 연구소 교수(11장)는 자칭 진보주의자다. 「(경제적) 역사의 종말」에는 리처드 프리먼 교수처럼 민중주의자(!)로서 소위 ‘브라만좌파’와 ‘강남좌파’ 등 엘리트 진보주의를 혐오하는 모습이 눈에 띈다. 그러다 보니 진보경제학자로서 그는 리처드 프리먼만큼 케인스의 본성론과 윤리론에 적대적이다. “.... 세상에는 많은 도덕원칙이 있고, 케인스가 선호하는 것으로 보이는 원칙들이 실제로 그렇게 우월하지 않다. 케인스가 에세이에서 목적의식이 강한 사람들, 유대인, 부자 계층의 아내를 포함해 너무나 많은 유형의 사람들을 경멸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이런 식의 오만함은 거의 동정심에 가깝다.”(p.299) 더욱이 “자본주의가 가진 도덕적 힘은 세대 사이에 이타주의를 이끄는 결과주의에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에드먼드 펠프스가 노벨상 강연에서 역설했듯이 기업가적 자본주의를 통해 좋은 경제가 좋은 삶을 가져올 수도 있을 것이다.”(p.298)

리처드 프리먼과 장 폴 피투시 두 진보경제학자의 ‘노동자주의’와 ‘민중주의적 진보론’이 최종적으로 자본주의적 윤리와 그 체제를 옹호하는 것은 매우 아이러니하다. 더욱이 그가 극찬한 자본주의의 “세대 사이의 이타주의”가 낳은 결과가 다음 세대의 삶을 파괴하는 기후위기라는 사실을 알긴 할까? 또, 확대되는 불평등, 뻔뻔함을 더해가는 불공정과 가늘어지고 있는 연대감 앞에서 자칭 진보경제학자가 어떻게 이따위 ‘자본주의 사모가’를 부를 수 있을까? 진실로 극과 극은 통하는 듯하다.

노동주의, 곧 일중독에 관해 한 가지만 언급하고 넘어가자. 폴 라파르그는 『게으를 권리』( 2009, 필맥)에서 노동에 대한 신화를 다음과 같이 폭로한다. “자본주의 문명이 지배하고 있는 국가의 노동자들은 기묘한 환각에 사로잡혀 있다. 그것은 여러 세기에 걸쳐 불쌍한 인류를 괴롭혀온 개인적, 사회적 재앙을 줄줄이 몰고 다니는 환각이다. 그것은 일에 대한 애착 또는 노동에 대한 처절한 열정인데 각 개인과 그 후손의 생명력을 고갈시킬 정도에 이르렀다. 그러나 성직자와 경제학자와 도덕가들은 이러한 정신적 이상상태에 반대하기는커녕 노동에 거룩한 후광을 씌웠다.”(p.9)

놀기만 하면 좋은삶에 이를 수 있을진 나도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일중독에 빠져, 여가 없이 사는 삶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은 진실이다. 일에 대한 몰두로 번민을 잠재울 수 있을지 몰라도, 그 속에서 우리의 복된 삶도 잊힌다. 일에 치여 정신 없이 그저 바쁘기만한 삶이 과연 좋은 삶일까? 3명의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를 포함해 두 번째와 세 번째 집단에 속한 11명의 저명한 경제학자들을 제외한 어떤 누구도 이 ‘정신 나간’ 상태를 칭찬하지 않을 것이다.

 

* 회로 이어짐

 

 


글 · 한성안

문화평론가. 경제학자. 영산대학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좋은경제연구소장'으로 활동하면서 집필, 기고, 강연 중이다. 페이스북과 블로그를 통해 진보적 경제학을 주제로 시민들과 활발히 소통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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