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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안의 인문학 서재] 『다시, 케인스』인가, 『굿바이, 케인스』인가 ?(Ⅲ)
[한성안의 인문학 서재] 『다시, 케인스』인가, 『굿바이, 케인스』인가 ?(Ⅲ)
  • 한성안 | 경제학자
  • 승인 2024.02.28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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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케인스』를 진정한 의미의 『다시, 케인스』로 읽기

* 회에서 이어짐

 

경계해야 할 경제학의 제국주의

미켈레 볼드린 및 데이비드 레빈 워싱턴대 교수(12장)는 그들의 에세이 「흥미로운 질문들과 잘못된 이유들」에서 여러 가지 쟁점을 다루고 있다. 이 속에서 그들은 노동시간 단축을 통해 여가를 즐기는 유럽식 경제체제를 ‘유럽경화증’으로 힐난한다. “현대의 도덕적 가치로 보면 케인스의 발언은 분명히 아주 계급주의적이고, 성차별적이며, 유럽 중심의 주장으로 보인다.” 그러면서 그들은 케인스가 “영국 상류층에 대한 편견들만 가지고 형편없이 선별해 만든 생각에 기초하여” “인류의 약 7분의 6에 해당하는” “천재적 재능이 없는 대중 사람들의 경제 상태”를 무시했으며, 이런 편견에 기초하여 “인간의 장기적인 발전 이론을 확립하려 했다”(p.329~330)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미국식 일중독과 소비주의적 행복을 또 찬양한다.

하지만 비록 케인스가 편견에 치우쳐 있더라도 세계의 7분의 6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삶을 옹호하고 두둔하는 편견은 실로 또 다른 해로운 편견(!)이다. 전문(?)직업인의 일중독, 가짜노동에 대한 열정, 대다수 노동자의 희망 없는 고역, 멈추지 못하는 낭비적 소비, 영원히 청산될 수 없는 가계부채, 파괴되는 환경이 왜 옹호되어야 할 삶인가? 내가 보기에 지금은 오히려 케인스의 편견이 필요한 때이며, 그 고결한(!) 편견 없이는 인류세를 넘어 지속가능한 발전을 이루어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

 

​『다시, 케인스』(존 메이너드 케인스, 조지프 스티글리츠 등 공저, 김성아 옮김, 2024, 포레스트 북스)​
​『다시, 케인스』(존 메이너드 케인스, 조지프 스티글리츠 등 공저, 김성아 옮김, 2024, 포레스트 북스)​

게리 베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및 루이스 라요 시카고대 교수(13장)의 에세이 「케인스가 장기적으로 소비는 과소평가하고 여가는 과대평가한 이유」 역시 끝없는 소비와 지칠 줄 모르는 노동을 찬양하며, 물질적 쾌락에 대한 탐닉을 옹호하는 세 번째 집단의 논지를 벗어나지 않는다. 이들 역시 케인스의 본성론과 윤리론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지만 앞 논자들의 주장을 체계적으로 옹호하며, 케인스의 윤리론을 부정하기 위해 이들은 주류경제학의 연구방법론, 그중에서 ‘일원론적 인과율’을 도입한다. 곧, 경제학은 경제적 요인에만 집중하는 ‘경제주의적 접근방법’으로 연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경제주의적 환원론은 경제학에서 ‘비경제적이며 비물질적인’ 요인을 배제하기 위해 적합하다. “케인스는 ‘경제적’ 문제가 결국에는 대부분 사라질 테고 남자든 여자든 먹고살기 위해 일할 필요가 거의 없을 것이기 때문에 경제학자들의 중요성도 크게 낮아질 것이라는 결론을 도출했다. 당연히 현실은 정반대였다. 일례로 요즘 거물 정치인 중 경제 자문단을 두지 않은 사람은 없고, 뉴스 매체들도 경제학자들의 의견을 끊임없이 요청한다. 케인스가 이를 오판했던 이유 중 하나는 경제학자들의 분석 영역이 단지 삶의 물질적 측면뿐 아니라 행복, 이타주의, 사회적 상호작용, 결혼과 이혼 같은 삶의 비물질적 측면과 관련된 다양한 영역으로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발전 양상은 케인스가 ‘경제학’을 너무 좁게 규정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p.347) 주류경제학의 윤리론을 정착시키기 위해 ‘경제학의 제국주의화’를 도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케인스는 바로 이런 경제학의 제국주의화를 경계했다. 특히 주류경제학의 배금주의, 물질주의, 노동주의, 소비주의, 공리주의로 채워진 경제주의적 세계관이 우리 삶을 공격할 때 ‘좋은삶’은 멀어져만 갈 것이라고 본 것이다. 케인스가 볼 때, 비경제적이고 비물질적인 삶에 대한 침략을 적극 감행하는 이들은 삶의 파괴자들이다. 이들이 노벨상을 받는 사회는 정상적이지 않다.

끝없는 소비, 무의미한 노동, 쌓여가는 가계빚, 훌륭한 비물질적 가치에 대한 혐오, 돈의 노예로 전락한 인간, 더욱이 심각하게 파괴되는 환경을 목도할 때, 인간의 삶이 어떠해야 좋은삶이 될 것인지에 대한 그의 생각은 충분히 되새겨 보아야 할 내용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윤리론을 조롱하면서 낭비와 일중독을 찬양하는 세 번째 집단의 주장은 분별력을 잃었을 뿐 아니라 무모하며 무책임하기까지 하다.

몇몇 논자들이 지적한 것처럼 케인스가 불평등과 분배의 문제를 소홀히 다룬 부분은 진보적 관점에서 볼 때 그의 한계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시 낭비적 소비와 휴식 없는 일중독, 그리하여 ‘경제성장’에 기대는 두 번째 집단 역시 문제가 있기는 마찬가지다.

 

오용되고 있는 장인정신과 실용주의

두 번째와 세 번째 집단의 경제학자 중 다수가 소스타인 베블런의 제도경제학과 윌리엄 제임스와 존 듀이의 프래그머티즘 철학(실용주의)을 이용해 자신들의 주장을 옹호한다. 가령 베블런이 주목한 인간의 ‘장인정신’(제작본능)과 프래그머티즘 철학을 근거로 삼아 일중독을 옹호하거나 ‘과시적 소비’를 거론하면서 소비지상주의를 옹호하는 식이다. 하지만 제도경제학과 프래그머티즘에서 장인정신과 실용주의는 ‘공동체의 공동선’에 이바지하기 위해 활용되어야 하고, 베블런 경제학에서 과시적 소비는 장려될 행동이 아니라 비판받아 제거되어야 행동이다. 아전인수격 해석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케인스는 충분한 물적토대가 마련될 경우, 그가 바라는 좋은삶에 이를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고, 어찌 보면 현재의 세계 경제 규모는 케인스가 예측한 경제규모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조지프 스티글리츠교수가 추산한 것처럼 “48조 달러가 넘는 글로벌 GDP(2006년)를 전 세계 약 65억 명의 인구에게 균등하게 나눠준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각 개인에게 약 7,000달러씩 할당할 수 있어 지구촌 주민 모두가 가난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이는 미국의 4인 가족 기준 빈곤선보다 더 높은 기준이다).”(p.88)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의 말대로 지금은 실로 ‘풍요의 시대’다! 따라서 케인스가 예측한 바대로 현재 ‘경제문제’는 해결되었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 우리에게는 성장이 아니라 분배가 더 시급한 과제다. 그 때문에 더 많은 노동보다 더 많은 여가가 여러모로 바람직하다. 더욱이 우리는 인류세라는 새로운 위기에 봉착해 있다. 이런 국면에서 더 많은 소비가 과연 정의로운지 재고해 봐야 한다. 이 모든 것은 우리에게 도덕적 판단을 요구하며, 경제학자들이 윤리적으로 경제를 바라볼 것을 촉구한다. 경제학자들, 특히 진보를 지향하는 비주류경제학자들이 케인스의 이 작은 에세이를 읽어야 하는 이유다.

특히 『일반이론』에만 주목함으로써 윤리적 판단을 망각해 왔던 케인지언, 특히 포스트케인지언 경제학자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글이다. 유효수요관리, 최저임금인상, 복지정책은 케인스의 윤리론의 지도에 따라 실행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일반이론』(1936)은 「우리 손자 손녀들이 누릴 경제적 가능성」(1930)이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활용할 수단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첫 번째 집단에 속하는 피브리지오 질리보티(2장), 조지프 스티글리츠(3장), 악셀 레이욘후부드(7장), 레오나르고 베체티(14장), 윌리엄 보몰(15장)은 이 여정에 서 있는 학자들로서, 이들은 내게 진정한 케인스의 제자들로 생각된다.

 

굿바이, 케인스를 진정한 다시, 케인스

마지막으로 이 책에 대한 몇 가지 평가도 조심스럽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아마도 우리가 손자 손녀 세대에게 물려줄 21세기는 지구촌 전체가 즐거운 노동, 끝없는 혁신, 자유로운 기업가들로 채워질 것이다. 이는 케인스가 1930년에 꿈꿨던 최선의 미래는 아니지만, 대사상가로서 그는 우리 의견에 동조할 것이다.”(p.41) 15편의 에세이를 검토한 후 이 책의 「서문」을 작성한 Unicredit Group의 로렌조 페티와 로마 토르 베르가타 대학교 구스타보 피가 교수가 내린 결론이다. 하지만 이는 케인스의 생각을 왜곡한 주장이며, 인류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은 제안이다. 지금 상황에서 노동, 혁신, 시장의 자유가 통제되지 않으면 과시와 과로, 지배와 모욕, 불평등의 고통, 생태계의 파괴가 가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몇 가지 새로운 측면들을 예측하지 못했고, 불평등에 주목하지 못했지만, 자유주의와 자본주의가 낳을 이런 폐해를 염려했던 케인스의 관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자살률 OECD 1위, 최장시간노동, 산재사망률 1위, 3분의1을 훨씬 넘는 비정규직, 살인적 입시경쟁, 최저 합계출생률, 황금만능주의, 각자도생의 한국사회에서 케인스의 이 작은 에세이 「우리 손자 손녀들이 누릴 경제적 가능성」이 갖는 의미는 더욱 크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 중 대다수를 이루는 로버트 솔로(4장), 에드먼드 펠프스(5장), 리 헤오니언(6장), 벤저먼 프리드먼(8장), 리처드 프리먼(9장), 로버트 프랭크(10장), 장 폴 피투시(11장), 미켈레 볼드린과 데이비드 레빈(12장), 게리 베커와 루이스 라요(13장)가 케인스의 이 관점을 비판하며, 심지어 조롱한다. 심지어 「서문」을 집필한 두 경제학자 로렌조 페티와 구스타보 피가를 추가하면 그 수는 13명으로 늘어난다.

 

​『다시, 케인스』의 서평​
​『다시, 케인스』의 서평​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케인스의 통찰을 돌아보며 모두가 함께 번영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한 것인가라는 커다란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이강국 리쓰메이칸대학교 교수의 추천사는 좀 의아하다. 제대로 검토한 후 쓴 추천사인지 궁금하다. 오히려 “이 책을 통해 케인스의 이른 사망이 현대 사회의 비극임을 또 한 번 확인할 수 있다”는 홍진채 라쿤자산운용 대표이사의 추천사가 이 책의 ‘비판적’ 독서를 위한 가이드라인으로 적절할 것 같다. 어찌 보면 『다시, 케인스』보다 『굿바이, 케인스』가 적절한 제목일 것 같다. 석학들의 얘기라고 다 맞는 건 아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들의 말도 마찬가지다. 시민들이 깨어있어야 할 이유다. 깨어있는 시민만이 『굿바이, 케인스』를 진정한 의미의 『다시, 케인스』로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글 · 한성안

문화평론가. 경제학자. 영산대학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좋은경제연구소장'으로 활동하면서 집필, 기고, 강연 중이다. 페이스북과 블로그를 통해 진보적 경제학을 주제로 시민들과 활발히 소통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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