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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미의 문화톡톡] 순간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을 위한 위로
[장윤미의 문화톡톡] 순간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을 위한 위로
  • 장윤미(문화평론가)
  • 승인 2024.06.03 14: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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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간으로 돈을 버는 사람들

계약이란 뜻의 engagement의 줄임말인 긱(gig)에 착안하여 경제 용어로 자리 잡은 긱 경제 (Gig Economy) 시스템의 핵심은 단기 고용, 시간제 노동이다. 고용주와 노동자는 서로 원하는 시간, 원하는 노동 조건에 합의하고 계약서를 작성한다. 계약이 종료되면 두 사람의 관계도 자연스럽게 종료된다. 이보다 ‘쿨’할 수 없다.

긱 경제에서 시간은 계약의 시작과 끝이나 다름없다. 시간이 중요한 이유는 간단하다. 노동의 단위를 시간으로 정하고 그에 따라 임금을 책정하는 것이 고용주와 노동자 양쪽 모두 합리적인 방법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시간 단위로 노동을 측정하고 보상하는 시스템 아래서 고용주는 자신이 필요한 시간에 맞추어 노동자를 고용하여 임금의 부담을 줄이고, 노동자는 자신의 라이프 스타일에 맞추어 노동 시간을 ‘빌드업’한다. 특히 이 빌드업을 잘하는 사람을 우리는 능력자 또는 N잡러라고 부른다.

과거에 비교하면 일의 종류, 일자리 총개수가 늘어난 건 사실이다. 이는 노동 시장의 전체 파이가 커졌다는 뜻이고, 동시에 노동자의 선택권이 늘어났다는 점에서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늘어난 양만큼 노동의 질도 향상되었냐는 물음에는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수요와 공급 법칙이 균형을 이루며 노동시장이 문제없이 굴러간다면 무엇이 문제겠느냐만, 경제불황이 장기화되고, 일자리보다 노동자가 많은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노동자는 노동 시간을 원하는 대로 빌드업하는 것이 쉽지 않다. 차라리 최소한의 생계라도 유지하기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가능한) 되는 대로’ 일자리를 선택해야 한다는 말이 좀 더 맞는 말이다. 긱 경제의 핵심은 노동자의 자율성과 독립성이라지만⑴ 막막하기만 생계 앞에서 자율이니 독립이니 하는 말은 그저 다른 세상 이야기일 뿐이다.

고용주와 노동자의 관계는 수평적이야 하고 협력하는 관계라고 하지만 여전히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게 현실이다. 고용주가 결정권을 쥐고 있는 건 예나 지금이나 변치 않는 사실이고, 여기에 노동 시장의 유연성이란 말로 포장된 해고의 유연성은 노동자를 더욱 불안하게 만든다. 투잡으로도 부족해 쓰리잡을 넘어 N잡을 하는 사람들도 흔한 요즘이다. 한편으로는 대단해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저렇게까지 열심히 살아야 하나 싶은 생각도 든다, 용돈벌이로 하는 일이라면, 여유 있는 시간에 일하는 거라면, 자기 계발의 일환으로 하는 노동이라면 그야말로 이상적이겠지만 마냥 부럽거나 속 편하게만 보이지만은 않는다. 모르긴 몰라도 그렇게라도 해야 최소한의 ‘먹고사니즘’을 지켜낼 수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일 가능성이 그렇지 않을 가능성보다 크기 때문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먹고사는 문제를 사실적으로 그린 소설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월급사실주의’라는 기획 아래 제작된 소설집 귀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에 수록된 김의경의 「순간접착제」는 고용과 해고가 수시로 이루어지는 노동 시장에서 조건에 따라 일자리를 옮겨 다니는 노동자, 그리고 자기 자리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시간제 노동자를 그린 사실주의 소설이다.

주인공 나와 예은, 그리고 이들의 눈으로 관찰되는 소순 할머니에게는 공통점이 있는데 바로 언제든지 교체 가능한 임시, 시간제, 노동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소설이 진행되면서 이 둘 사이에서 미묘한 차이를 발견할 수 있는데 바로 자신의 일을 대하는 노동자의 태도다. 노동은 돈과 바꿀 수 있는 교환 수단인 동시에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수단이다. 임금은 노동의 양으로 결정된다면, 자신의 존재는 노동(자)의 질로 결정된다. 그리고 이 질이 예은과 나, 그리고 소순할머니를 가르는 ‘한끗’이 되는데 이는 소설에서 ‘책임’으로 표현된다고 할 수 있다.

2. 생계와 용돈벌이, 그 사이

‘스윗마카롱’에서 시간제 알바로 일했던 예은과 나는 코로나 사태가 장기화되자 운영이 힘들다는 이유로 노동 시간을 줄이려는 사장의 속내를 알아차리고 그만둔다. 대신 더 오래 일하고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삼각김밥 공장 일을 선택한다. 그런데 삼각김밥 공장에서는 ‘스윗마카롱’과 달리 일이 많다는 이유로 초과근무를 요구한다. 예은과 나는 또 한 번 원치 않는 노동 시간을 거절하는데 ‘야근하지 않을 거면 그만두라’는 책임자의 경고에 어쩔 수 없이 야근한다.

 

김의경 외, [귀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문학동네, 2023.
김의경 외, [귀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문학동네, 2023.

스윗마카롱에서든 김밥 공장에서든 예은과 나는 자발적 시간제 노동자이긴 하지만, 원하는 노동 시간을 선택할 수는 없다는 점에서 비자발적 시간제 노동자이기도 하다. 스윗마카롱에서는 원하는 시간보다 적은 시간을, 삼각김밥 공장에서는 원하는 시간보다 더 오랫동안 노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공장 책임자가 제시한 조건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스윗마카롱을 박차고 나온 것처럼 그만두는 게 마땅하지만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예은과 나는 어쩔 수 없이 야근을 선택한 것이다.

한편 같은 공장에서 일하는 소순 할머니는 젊은 예은과 ‘나’를 경쟁자로 인식한다.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지 않고, 강도 높은 노동이 필요한 공장에서 ‘늙음’과 ‘쇠약’은 나이 든 노동자를 교체하기 위한 명분으로 이용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젊은 사람이 공장에 들어오는 걸 탐탁지 않아 하는 동시에 젊은 사람들도 하지 못하는 힘든 작업을 거뜬히 해내는 등, 자신이 쓸모 있는 노동자임을 증명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예은과 나에게 삼각김밥 공장은 돈을 더 많이 벌기 위한 선택이지만 소순할머니에게는 최후 생계수단이다. 그런 소순할머니에게 예은이나 ‘나’가 곱게 보일 리 없다. 돈이 필요해서 들어왔지만 조금이라도 일이 힘들면 버티지 못하고 나갈 것이 뻔하니 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렇기 때문에 빨리 나가길 바란다. 젊고 건강한 예은과 ‘나’가 오래 버티기라도 하면, 당장 일자리를 빼앗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순할머니가 단지 불안 때문에 열심히 일하는 것은 아니다.

예은은 돈을 아끼기 위해 밑창이 떨어진 신발에 순간접착제를 바르며 새 신발을 사는 걸 미룬다. 그러면서 이 순간접착제라도 있으니 다행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노동을 ‘순간접착제’처럼 취급하려는 스윗마카롱 사장에 분노한다. 순간접착제 취급받는 것이 싫어 제 발로 ‘스윗마카롱’을 나와 더 나은 일자리를 구한 예은과 그와 반대로 순간접착제를 자처하며 일자리를 잃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는 소순 할머니를 보며 ‘나’는 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모습을 오버랩한다. 그러면서 예은에게는 환멸을, 소순할머니에게는 작은 죄책감을 느끼는데 이 감정은 책임감 여부로 갈라진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경제불황이 계속될 때, 일자리가 줄어들 때, 그로 인해 경쟁자가 늘어날 때 노동자는 불안하다. 특히나 경쟁력이 없는 노동자일수록 그 불안감은 커지게 마련이다. 불안감을 없애기 위해서 어떤 사람은 능력을 키우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자기 눈높이보다 낮은 노동 시장을 기웃거리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더 나은 일자리를 찾아 나서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무작정 버티는 것을 선택하기도 한다. 확실한 것은 없고 더 나은 것이 무엇인지 알 수도 없다. 다만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걸 선택할 뿐이다.

예은은 고용주라면 자신이 고용하는 노동자의 노동 시간과 임금을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음에도 자신의 형편이 좋지 못하다는 이유로 책임을 회피하려는 사장을 비난하고, 그런 예은을 보며 동질감을 느낀다. 하지만 반대로 소순할머니가 평생을 돌봐왔던 딸이 소생 불가능한 상태라는 소식에 이제 책임질 사람이 없어지면 이런 (힘든) 일은 안 해도 되는 거 아니냐고 말하는 예은을 보며 ‘나’는 이질감을 느낀다. 예은에게 이 일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의 하나였을지 몰라도 소순할머니에게 이 노동은 용돈벌이 그 이상의 의미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소순할머니의 그런 마음은 한때 ‘나’가 ‘스위마카롱’ 사장에게 품었던 진심 어린 마음이기도 하기에 ‘나’는 소순할머니를 이해하는 동시에 예은에게는 환멸을 느낀다.

노동은 그 가치나 의미의 여부에 상관없이 인간의 존재 이유를 증명하는 행위다. 소순할머니에게 노동은 자신이 여전히 노동자로서 가치 있음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행위인 동시에 책임을 다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행위다. 딸이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서도 하던 일을 마저 마무리하겠다는 그의 행동은 자식보다 일이 더 중요해서도,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한 것도 아닌 그저 자신의 노동에 책임을 지겠다는 고집의 극단적인 표현이기도 하다.

노동 시장에서 책임은 단지 고용주에게만 있지 않다. 일해야 하는 노동자에게도 책임은 엄연히 존재한다. 주어진 일을 완수하는 것, 이것은 약속한 노동 시간만큼이나 지켜야 하는 의무다. 노동 감수성이라곤 없는 악덕 고용주가 일삼는 갑질을 보고 있으면 일할 맛이 뚝 떨어지는 건 맞지만 그것과 별개로 노동자에게 주어진 의무는 지켜야 하는 것이 옳다.

예은은 자신이 원하는 조건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예고 없이 스윗마카롱을 그만두었다. 그러면서도 피해를 주지 않았을까 마음에도 없는 걱정 한다. 반대로 소순할머니는 딸이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도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끝까지 마무리한다. 물론 그 행동이 어리석은 것이라고 비난받을 수는 있지만 자신이 선택한 행동이라는 점에서, 이후에 벌어진 일까지도 소순할머니는 기꺼이 책임졌으리라 믿는다.

 

3. 노동(자)의 가치

정해진 공간, 정해진 시간에 일하는 전통적 노동구조에서 플랫폼을 중심으로 수시로 이동이 가능한 노동 구조로 시장이 변화하면서 달라진 점을 꼽으라면 고용주나 노동자 모두 고용과 노동에 대한 무게감이 가벼워졌다는 점이다. 서로가 필요한 시간에 노동자를 고용하고, 필요한 시간을 선택해서 일할 수 있다는 건 분명 엄청난 장점이다. 한쪽은 비용을 절감할 수 있고, 한쪽은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 비교해 물리적, 심리적 부담이 줄어든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노동의 가치까지 줄어들었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인간에게 노동은 많은 가치를 부여한다. 일차적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수단이 동시에 나아가 나라는 사람이 쓸모 있음을 증명해주는 목적이다. 노동의 가치는 그 위치의 특수성 때문에 고용자의 처우에 따라 결정되는 것을 피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노동자 스스로 노동이 부여하는 가치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나의 노동이 순간접착제의 기능만을 하는 것 정도에 만족하고 머무를 것인지 아니면 나의 노동이 의미 있는 결과물이 될 것인지는 오로지 나에게 달린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자의 한 사람인 ‘귀하’의 노고는 타인에게 감사의 대상임을 기억한다면 그 어떤 노동자도 쉽게 자신의 가치를 깎아내리지는 못할 것이다.

 

⑴정혁, 「시간과 돈 사이에서 신음하는 긱 노동자의 생존법」, 『르몽드디플로마티크』, 2018년 2월호.

 

 

글∙장윤미
소설가 겸 문화평론가. 저서로 독서 에세이 『우세한 책들』, 장편소설 『또다른 세계로 가는; 플랫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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