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옛적 우리의 호모사피엔스가 등장하던 70만 년 전 이런 세상이 존재했었다. 어부는 고기를 잡고, 농부는 곡식을 수확하고, 대장장이는 괭이를 제작했다. 또, 목동은 소를 길렀다. 서로 분업하는 게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분업은 생산성을 높였다. 어부는 자기가 소비할 수 있는 것 이상의 고기를 잡을 수 있었다. 이른바 ‘잉여생산물’이 산출된 것인데, 이는 농부, 대장장이, 목동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자연은 모두에게 똑같은 은혜를 내렸기 때문에 각자는 잉여생산물 규모의 차이로 인해 불평등을 경험할 필요가 없었다.
이 잉여생산물을 어떻게 처리할까? 모두가 골똘히 생각했다. 찬란한 이성의 합리적 사유 능력에 힘입어 모두는 각자의 잉여생산물을 가지고 한 장소에 모였다. 거기서 각자의 잉여생산물을 서로 바꾸면 문제가 해결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른바 ‘시장’이 형성된 것이다. 어부는 남아도는 생선을 농부에게 준다. 그러면 농부 역시 남아도는 곡식을 어부에게 준다. 이렇게 맞바꾸면 과부족의 문제가 해결될 것 같았다. 드디어 ‘물물교환’이 시작된 것이다. 교환! 이것은 합리적으로 사유할 줄 아는 인간의 본성이자 능력이다. 시장 역시 이런 본성에 부합된다. 시장은 교환을 통해 호모사피엔스들을 경제적으로 잘 엮어 주었는데, 시장의 교환은 이들의 평등한 관계를 해치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농부는 자신의 곡식으로 뭐든지 사고 싶었다. 어부의 생선이든, 대장장이의 괭이든, 목동의 소든 아무 것이든 상관없었다. 그런데 이들 중 아무도 농부의 곡식을 원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들 모두에게 곡식은 충분히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물물교환을 하다보니 서로가 욕망하는 ‘사용가치’가 일치하지 않은 일이 발생한 것이다. 농부는 어쩔 수 없이 그 무거운 곡식을 짊어지고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헛수고만 하고 말았다. 농부만 그런 게 아니다. 모두가 허탕치고 말았으니 사회전체적으로 손실이 크다. 이런 ‘사용가치의 불일치’는 물물교환을 방해하였다. 호모사피엔스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또 한번 각자의 합리성에 의존해야 했다. 휴대하기가 쉬우면서도 시장에 공급된 모든 물건과 교환될 수 있는 보편적인 재화가 없을까?
이번에는 목동의 사정을 들어보자. 목동의 쌀독이 바닥났다. 농부의 쌀과 교환하기 위해,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은 소 한 마리뿐이다. 쌀 한 되가 필요한데, 그렇다고 그 한 되를 사기 위해 소 한 마리를 통째로 주는 건 아무리 봐도 합리적이지 않다. 이번에는 목동과 농부 사이에 ‘교환가치’가 서로 맞지 않는다. 소를 도축해 그 살점의 일부를 떼내어 준다면, 곧 소를 ‘분할’하기만하면, 이 ‘교환가치의 불일치’는 해결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할이 이루어지는 순간 소의 사용가치는 현저히 떨어짐으로써 목동은 커다란 경제적 손실을 입게 된다. 목동은 물물교환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물물교환에서 발생하는 교환가치의 불일치 문제와 사용가치의 분할불가능성 문제를 해결하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경제적 손실을 줄이기 위해 우리의 호모에코노미쿠스는 한번 더 합리성을발휘해야 했다. 사용가치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분할이 가능한 재화는 없을까?
물물교환은 이처럼 사용가치의 불일치, 휴대 불가능성, 교환가치의 불일치, 분할 불가능성으로 인해 자유로운 교환을 제약한다. 이러한 제약을 극복하기 위해 70만 년 전 원시인들은 각자의 이성과 경제적 계산능력을 일제히 발휘해 전광석화처럼 새로운 대안을 고안해 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돈, 그러니까 ‘화폐’인 것이다. 화폐는 교환을 목적으로 창조되었다. 여기서 화폐의 본질적 목적과 기능은 ‘교환’이다!
지금까지 간단하게 서술된 이야기는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내용일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사람이든 진보적인 사람이든 대다수 독자들이 별다른 의심 없이 믿고 있는 내용이다. 진보적인 독자들은 놀라겠지만, 이는 주류경제학인 신고전학파 경제학의 ‘화폐금융론’을 떠받치고 있는 ‘설화’이다. 그런데 <전설 따라 삼천리>의 설화와 달리 이 설화는 매우 ‘근대적’이다! 왜 그런가?
이 설화의 주인공들은 매우 합리적이다. 그리고 경제적 사고에 충실하다. 경제학적으로 표현하면 ‘완전한 합리성’의 소유자인 동시에 호모에코노미쿠스, 곧 ‘경제적 존재’인 것이다. 더욱이 평등하다. 곧, 이들 사이에는 계급이 존재하지 않는다. <전설 따라 삼천리>의 주인공들은 기껏해야 6백 년 전 조선시대 사람들이지만, 신고전학파 경제학의 호모사피엔스들은 최소 70만 년을 거슬러 올라가니, 그때부터 인간의 인지능력은 최고로 합리적이었으며, 인간은 본질적으로 경제주의자였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태곳적 경제주의자들이 시장을 열었고, 원활한 교환을 도모하기 위해 화폐를 발명한 것이다. 인간에게 시장은 자연스런 공간이며, 교환은 인간의 본성에 부합한다. 이 교환을 매개하는 화폐 역시 인간의 삶에 본질적인 요소를 이룬다. 여기서 자유방임주의적 주류경제학의 경제정책이 도출된다는 사실도 추가하자. 이러한 신고전학파 경제학의 화폐론을 우리는 ‘경제주의적, 합리주의적, 비계급적, 교환주의적 화폐론’으로 지칭할 수 있다.
게를로프의 사회적 화폐론
20세기 중반(1952) 독일 경제학자 빌헬름 게를로프가 저술한 『사회, 계급, 화폐: 계급화폐의 발생과 발전, 화폐권력에 관한 사회학적 탐구』(빌헬름 게를로프 저, 현동균 번역, 역주, 해제, 2024, 진인진)는 이러한 주류경제학의 경제주의적, 합리주의적, 비계급적, 교환주의적 화폐론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책이다. 책 제목만 봐도 그의 화폐론이 앞에서 전개된 주류경제학의 화폐론과 얼마나 대립하는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사회’, ‘계급’, ‘권력’ 그리고 ‘사회학’ 등 번역자 현동균이 선택한 키워드는 이 책의 핵심내용과 연구방법론을 잘 드러내 준다.

화폐는 본질적으로 경제학의 연구분야에 속한다. 따라서 대다수 독자는 화폐가 경제학적 시각에서 접근되리라 기대할 것이다. 하지만 게를로프의 화폐론은 우리 머리에 가장 강력하게 각인되어 있는 경제주의적 접근방법에 반기를 든다. 화폐를 ‘사회학적 관점’으로부터 조명하는 것이 이 책의 첫 번째 특징이다. 화폐는 경제학적 주제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경제학적 방법론이 아니라 사회학적 방법론으로 접근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러한 접근방법에 따라 그는 화폐의 발생기원과 진화과정에서 차지하는 ‘사회적 요인’에 주목한다. 사회란 그저 사람이 모여 산다고 해서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모여 있는 사람들이 서로 구체적인 관계를 맺을 때 비로소 사회가 확립되는데,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사람들은 끊임없이 ‘교류’한다. 구체적인 교류 없이 사회는 형성될 수 없다. 이런 ‘사회교류적’(sozial) 행동과정에서 모두가 ‘자연스럽게 수용하는 관행’이 형성되는데, 재화에 있어서도 이런 과정은 똑같이 적용된다. 곧, 사회교류적 과정에서 특정재화가 관습적으로 활용되는 것이다. 게를로프는 이를 ‘관용’(Gebrauch; usage)이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관용되는 재화는 사회적 관계, 그리고 사회교류적 행태에 따라 변한다. 예컨대, 원시사회에서 관용되는 재화와 중세와 현대사회에서 관용되는 재화는 서로 다를 것이다. 곧, 사회교류적 과정에서 관용되는 재화는 시대가 변화함에 따라 함께 ‘진화’한다.
인정추구적 인간과 화폐
게를로프는 이러한 사회학적 관점과 진화론적 관점을 적용해 화폐의 기원과 그 기능의 변화과정을 연구한다. 이 접근방법론을 정확히 이해하면, 거의 4백 쪽에 달하는 그의 화폐론은 의외로 쉽게 이해된다. 그가 정립한 화폐론은 이제 다음과 같이 요약되기로 기대된다. 첫째, 그의 화폐론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철학적 존재론과 본성론에 주목해야 한다. 대다수 비주류경제학자처럼 게를로프는 인간을 ‘사회적 존재’로 보고 있다. 그가 인용한 독일 법학자 기에르케의 명제만큼 사회적 존재에 대한 그의 입장을 잘 대변해 주는 말은 없을 것이다. 한 사람으로만 존재하는 인간은 “절대로 인간이 아니다.”(p.6)
게를로프는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이 욕망하는 것을 하나로 특정하는데, 그것은 바로 ‘인정’에 대한 욕구다. 인간은 사회 속에서 타인의 평판에 신경을 쓰며, 인정을 갈구하고 있다. 사회교류적 행위의 목적은 타인으로부터 인정받는 것이다! 호모사피엔스는 “인정추구적 인간”(p.42)이자 “평판집착적 인간”(p.27)이다. 본성론에 관한 한, 게를로프는 헤겔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듯하다.
둘째, 이런 존재양식과 본성에 따라 우리의 호모사피엔스는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특정재화를 축장한 후, 그것을 과시하거나 분배하며, 그것을 넘어 낭비까지 한다. 이 과정에서 관용되는 재화는 모든 사람에게 욕망의 대상으로 된다. 이제 그것은 귀중한 재화, 곧 ‘재보(財寶)’로 인정받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반드시 실용적 가치와 경제적 가치를 가질 필요는 없다.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인정만 받으면 되는데, 대다수 인류학적 연구는 경제적 가치가 없는 재화가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아 재보로 둔갑한 사례들을 보고한다. 이러한 사회적 재보가 점차 화폐의 자리를 얻게 되었다.
이처럼 화폐는 주류경제학이 주장하듯이 호모사피엔스들의 경제적 이해관계로부터 발생하지 않았다. 그것은 ‘경제적’ 호모사피엔스가 물물교환을 합리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심사숙고함으로써 창조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 호모사피엔스가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 이를 위해 과시하고 분배하며, 우애를 다지기 위해 선물을 주고받거나, 상대방에게 용서를 빌고, 제례식에서 제물을 바치는 과정, 곧 지극히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과정에서 발생하였다. 이 과정에서 특정 재화가 관용되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점차 화폐로 정착된 것이다. 이 과정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경제적 계산’과 ‘합리적 사고’가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이렇게 보면, 신고전학파 경제학이 주장하듯이 교화은 화폐의 본질적 서비스가 아니었다. 화폐의 본질적 서비스는 베블런이 유한계급의 소비를 보고 일갈한 과시와 낭비였다! 신고전학파 경제학이 주목하지 못하는 측면이다.
계급적 속성을 지닌 화폐
셋째, 화폐는 불평등을 기반으로 등장했다. 그것은 과시지향적 인간이 그 불평등한 상태, 곧 타인과의 차이를 드러내기 위해 사용된다. 지배적 위치에 선 개인은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재보를 다량 보유함으로써 차이, 곧 계급적 관계를 만방에 과시할 수 있다. 따라서 화폐는 본질적으로 ‘계급화폐’이다. “화폐는 평등한 인간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불평등한 인간들 사이에서 발생하며, .... 개인들 간에 보이는 차이를 강화하고 그 같은 차별성을 외부적으로 표현하는 수단이다. 이 같은 위의 주장은.... 모든 화폐가 계급화폐의 형태로서 기원한다는 사실과 모순되지 않는다.”(p.22) 여기서 화폐가 갖는 “구매권력”(Kaufmacht, purchasing power)은 계급관계를 공고하게 만든다(p.290). 이 주장은 앞선 신고전학파 경제학의 설화에서 등장한 비계급적 화폐와 대립된다. 게를로프에 의하면 신고전학파 경제학의 화폐론은 계급적 성격을 은폐한다.
화폐는 양날의 칼이다
넷째, 신고전학파 경제학의 화폐론에 따르면, 화폐의 본질적 서비스는 상품의 교환이다. 곧, 물물교환 과정의 각종 불일치를 제거하고, 그것이 야기하는 ‘거래비용’을 절감시키기 위해 창조되었다. 그 본질은 태곳적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게를로프는 다수의 인류학적 실증자료를 활용해 그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화폐의 본질적 서비스는 사회교류적 행동양식과 경제구조가 변함에 따라 바뀐다. 곧, 사회적 기능을 하던 과시화폐는 점차 지불화폐와 교환화폐의 기능을 수행하다, 자본주의사회로 접어들자 드디어 화폐가 화폐를 낳는 ‘자본화폐’로 바뀌었다. 물론 이 모든 기능들이 순차적으로 소멸되면서 서로를 대체하기보다, 기존의 기능에 새로운 기능이 ‘추가’되는 방식으로 진화하는 것이다.
그의 사회학적 화폐론에서 게를로프가 조명한 화폐의 모습은 대체로 어둡다. 이는 갈등을 부각하는 책무를 진 비주류경제학자에겐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는 화폐의 부정적 측면만큼은 아니지만 그것의 긍정적 측면을 놓치지 않았다. 실로 “화폐는 경제생활을 지배할 뿐만이 아니다. 그것은 정치생활과 문화생활에까지도 (.....) 깊숙하게 침투하고 종교생활도 이에는 예외가 될 수 없는 ‘악마적 권력’이 된다”(p.290). 성서가 일갈한 바와 같이 “돈은 일만 악의 뿌리”인 것이다.
동시에 “화폐는 경제라는 신체를 관통하며 경제에 생명을 불어넣으면서 순환하는 혈류와도 같은 것이다. (.....) 그것은 모든 발달된 사회적 경제에 있어서 필수적 요소이자 구성 인자이다. 사회적 경제의 형성과 지속적 발전은 언제나 화폐경제의 형성과 지속적 발전이기도 하다. 따라서 화폐는 타락을 의미하는 현상이 아니다. (.....) 화폐의 오용 가능성으로 인한 폐해에 비하여 화폐의 관용이 가져오는 유익한 결과는 훨씬 더 높이 평가되어야만 한다.”(p.396~397) 화폐는 양날의 칼이라는 말이다.
게를로프의 화폐정책
이런 칼의 결과는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의지와 철학에 달려 있다. “화폐 그 자체는 나쁜 것도 좋은 것도 아니며, 단지 모든 것은 사용하는 사람에게 달려 있다. 즉, 화폐를 올바르게 사용할 줄 아는 사람에게 화폐는 유순한 종복이 되지만, 화폐에 예종하는 자에게 화폐는 이제 사악한 주인이 된다.”(p.291) 화폐에 대한 이런 시각은 세계를 일면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다양한 측면에서 바라보며, 모든 결과를 ‘인간의 정치적 실천’, 그리고 그 방향을 지시하는 ‘문화적 가치’에 따라 결정된다는 제도경제학과 케인지언 경제학의 방법론과 일치한다.
게를로프는 악마적 오용을 억제하고, 사회적 경제의 형성과 지속적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정부가 화폐영역에 개입하기를 주장한다. “올바른 화폐의 문제는 화폐정책의 문제”(p.341)이다. 그의 화폐정책은 주류경제학의 양적 정책과 달리 질적 정책을 지향하는데, 수량이나 이자율의 조정보다 ‘구매권력’의 통제와 ‘교육’의 확대를 제안한다.
게를로프가 염두에 두는 “교육의 과제는 삶을 살만한 가치로 만드는 것이 화폐가치를 초월하는 사물의 본질적 가치이며, 삶의 진정한 가치는 화폐로는 절대로 측정되거나 표현될 수 없는 화폐가치를 초월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인식시키는 것이다.”(p.369). 이처럼 그의 화폐정책에서는 ‘윤리적 가치’가 중요하다. 곧, 가치중립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이로써 그는 진화론자들이 자칫 빠질 수 있는 도덕적 상대주의의 함정에서 벗어나려 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가 성공을 거둘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왜 그럴까?
베블런의 다중본능론으로 보강되어야 할 게를로프의 화폐정책
여기서 케인지언 경제학과 제도경제학이 갈린다. 케인지언처럼 제도경제학자들도 진화생물학을 그 자연과학적 기반으로 삼고 있지만, 결코 도덕적 상대주의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제도경제학은 미국의 경제학자 소스타인 베블런에서 시작된다. 진화생물학을 선호하는 경제학파답게 베블런 제도경제학은 인간의 본성론을 면밀히 다진다. 그의 본성론은 우리에게 익숙한 ‘단일본성론’과 거리가 멀다.
베블런 제도경제학자에게 인간의 본성은 ‘다중적’이다. 곧, 이기적 본성은 물론 이타적 본성도 진화과정에서 함께 선택되었으며, 후자의 역사가 훨씬 더 장구하다. 베블런은 이를 “어버이 성향”(parental bent)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도덕적 본능은 다수의 신경생물학자, 신경과학자, 진화심리학자의 과학적 연구와 실험에 따라 속속 확인되고 있다. 원시사회에 대한 인류학적 조사결과도 이를 강력히 보강해 주고 있다.
그러나 게를로프의 본성론은 “야심적 인간”(p.27)이나 ‘인정추구적 인간’으로 단일화되어 있다. 게를로프의 사회적 존재는 경쟁과 욕망에 눈이 멀어 있을 뿐, 협력과 연대, 그리고 우애에는 도통 관심이 없다. ‘좋음’에 관한 한 싹수가 노란 것이다. 아무런 본성적 토대가 없는 존재에게 교육을 시켜본들 그 효과를 기대하기가 쉽지 않으리라.
과학으로 부정되는 단일본성론으로 인해 게를로프의 화폐론은 ‘좋은 사회’와 ‘좋은 삶’을 지향하는 진보주의자에게 절망적인 것처럼 보인다. 이는 케인지언 경제학에 깔려 있는 전반적인 분위기이다. 정처 없이 떠도는 도덕적 상대주의와 절망적인 허무주의에서 벗어나려면 베블런의 ‘다중본능론’으로 보강되지 않으면 안 된다. 본성론에 관한 모든 진보경제학의 일대 개혁이 필요하다. 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도덕적 상대주의와 허무주의에 빠져 갈 길을 잃어버린 21세기 진보경제학이 풀어야 할 숙제이기도 하다.
게를로프의 화폐론은 사회학적 방법론을 도입함으로써 주류경제학의 경제주의적, 합리주의적, 비계급주의적, 교환주의적 화폐론을 반박한다. 이러한 연구방향은 화폐의 비합리적인(?) 속성, 곧 과시적이고 계급적인 속성을 부각시켜 준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그러나 그의 화폐론은 야심적 존재나 인정추구적 존재와 같은 단일본성론에서 출발한 결과, 그가 제시한 ‘올바른 화폐정책’이 성공할 가능성은 크게 줄어들게 되었다. 이 책에서 그는 『유한계급론』에서 제시된 베블런의 관점을 여러 차례 도입하고 있는데, 따지고 보면 게를로프의 책에 흐르는 그의 사회학적 시각은 모두 베블런의 것이다.
하나만 인용해 보자. “베블런에 의하면, (유한계급은) 자신들이 속한 카스트의 단순한 보전”을 위해 소유물을 자발적으로 낭비하는데, 이는 사실 자신들의 재력과 지위를 “과시”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소유탕진’은 유한계급에 속한 구성원들이 자신들의 ‘부’를 전시하는 상호경쟁”을 통해 한층 고조된다.(p.183) 게를로프의 화폐론을 ‘진보적 관점’에서 완성해 보고 싶은 독자들은 내친김에 베블런의 본성론(『경제학자 베블런, 미소와 냉소 사이』, 켄 맥코믹 저, 한성안 편역, 2020, 청람)을 더 공부해 볼 것을 권유한다.

주류경제학과 마르크스경제학의 경제주의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게를로프의 사회학적 관점은 불편하거나 낯설 수 있다. 편역자 현동균의 친절하고 상세한 역주는 이런 문제를 해소하는 데 큰 도움을 줄 것이다. 특히 책 말미에 수록된 「역자해제」는 이 책의 길잡이 역할을 한다. 매우 도움이 되는 내용이다. 독자들은 이 부분을 먼저 읽은 후 본문에 들어가는 전략을 선택할 수도 있겠다. 나는 본서에 들어가기 전과 후 두 번에 걸쳐 이 내용을 검토했다. 좋은 책은 여러 번 읽어야 한다.

글·한성안
문화평론가. 경제학자. 영산대학교수 역임. 중앙대 대학원 객원교수. 현재 '좋은경제연구소장'으로 활동하면서 집필, 기고, 강연 중이다. 페이스북과 블로그를 통해 진보적 경제학을 주제로 시민들과 활발히 소통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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