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과거의 영광에 취하지 말라고들 한다. 여기, 찬란했던 흔적을 잊지 못해 향수에 젖은 도시가 있다. 인생에 롤러코스터와 같은 리듬이 있다면 이 도시의 삶에도 고저가 있다.
“결국에 우리의 도시는 본성상 멜랑콜리하다.” - 나탈리아 긴츠부르크(Natalia Ginzburg), 「한 친구의 초상」 中 (장문석, 토리노 멜랑콜리, 2023)
이탈리아 북서부 피에몬테 지역에 위치한 도시 토리노는 본질적으로 멜랑콜리하다. 잿빛 안개, 그리고 기차역 특유의 매캐한 냄새를 연상해보면 토리노를 지배하고 있는 음울함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1)
토리노는 대비되는 개념들이 한데 모여 있는 곳이다. 다시 말해, 양극의 것들이 공존하는 곳이다. 피아트(Fiat Fabbrica Italiana Automobili Torino)라는 거대 자동차 기업이 탄생한 곳이자 전후 이탈리아의 격렬했던 계급투쟁의 근원이 되는 ‘붉은 2년’이 발생한 곳이기도 하다. 전례 없는 대규모 기업과 20세기 노동운동의 발원지로서 토리노는 ‘혁명이 있는 디트로이트이자 산업이 있는 페트로그라드’였다.(2)
기업의 성장을 견인하는 요소는 다양하다. 이를테면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는 경영가의 혜안이 있다. 우후죽순 설립된 토리노의 자동차 회사들은 20세기 초에 발발한 금융위기로 하나둘 자취를 감추었다. 소수의 회사들만이 살아남았고, 그중 피아트의 창시자 아녤리(Giovanni Agnelli)는 밀라노 상업은행의 도움으로 금융위기를 손쉽게 극복했다. 금융위기는 과연 모두에게 ‘위기’인가? 적어도 당시의 아녤리에게 이는 역설적이게도 위기가 아닌 기회였다. 금융위기를 거치며 아녤리는 지방의 개인 자본가들의 입김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뿐만인가? 그 존재가 누구든 외부의 개입 자체를 극도로 싫어하는 아녤리는 은행의 개입 또한 필사적으로 막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이러한 재정 독립성·자율성은 피아트의 뿌리 깊은 정체성이자 역사로 자리매김하게 된다.(3) 아녤리의 피아트는 1936년에 출시한 토폴리노를 시작으로 변곡점을 맞이한다. 밀라노의 알파로메오가 레이싱카 생산에 주력했다면 토리노의 피아트는 ‘이미 검증된’ 포드의 선례를 따랐다. ‘생쥐’를 의미하는 토폴리노는 그 이름대로 초소형 경차이자 대중을 겨냥한 작품이었다. 아녤리는 자동차의 대중화를 선두에서 이끈 헨리 포드를 답습했고 그렇게 피아트 제국은 파시즘의 몰락과 패전으로 폐허가 된 조국의 경제를 일으켰다.(4)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이다’라는 말이 있다. 지독한 현실주의자 아녤리가 모방보다 독창성을 강조했던 엔지니어 파촐리를 해고하자 피아트의 순이익은 증가했다. 모방자도 혁신자가 될 수 있음이 증명된 순간이다.
1958년부터 1963년까지 이탈리아는 그야말로 전 분야 생산·소비가 급증하는 경제 기적을 일궈냈다. 유럽 최대 가전제품 생산국이 되었고 피아트의 생산량은 15배 증가했다. 1971년 토리노 전체 노동자의 절반은 피아트의 노동자였다.(5) 그렇다면 피아트의 쳇바퀴는 언제부터 그 활발했던 움직임을 멈추게 되었는가? 파시즘과 경제위기라는 어려운 순간에서도 돌파구를 찾았던 피아트는 각축을 벌이는 자동차 시장의 레이스에서 점점 뒤쳐지기 시작했다. 그룹 본연의 사업과 무관한 유통, 건축, 정보통신, 언론 산업에까지 무리하게 손을 뻗쳤기 때문이다. 그렇게 어느새 피아트는 창업자 아녤리가 한때 토리노의 제일 가는 기업가 자리를 두고 경쟁을 벌였던 괄리노와 폰티가 실패한 경로를 밟고 있었다.
토리노는 이탈리아의 서사가 응축된 곳이다. 조상이 남긴 유산은 이탈리아인들에게 서양 문명을 대표한다는 자부심을 안겨주었다. 그 찬란했던 문화와 역사를 뒤로 한 채, 과거 유럽의 병자에서 가까스로 회복한 이탈리아의 경제전망은 여전히 어둡다. 유럽 대륙 내에서의 존재감은 희미해졌고 G7의 자리를 타국에게 내줄 위기에 처해있다. 토리노, 그리고 토리노를 이끈 기업 피아트의 화려했던 과거는 이들에게 그저 그리운 추억이 되었다, 마치 이들의 고국처럼.
피아트의 몰락이 경쟁이 심화된 자동차 산업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릇된 선택을 한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면 이탈리아 경제의 몰락은 1990년대를 기점으로 시작되었다. 미래 먹거리를 위한 재투자를 소홀히 해 경제 기반을 다지는 데 실패한 채 세계 금융 위기를 맞닥뜨린 이탈리아는 여느 나라와 마찬가지로 양적 완화를 통해 유동성을 늘렸다. 그러나 이는 재정 적자의 심화와 국가채무의 급증을 불러왔다. 2010년부터는 ‘이탈리아 경제위기설’이 고개를 들었고, 국채 금리가 뛰기 시작했다. 2011년 11월, 이탈리아 10년 만기 국채 금리는 7.21%를 기록해 이자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이냐치오 비스코 이탈리아 전 중앙은행 총재는 한 연구보고서에서 그동안 이탈리아 혁신을 저지한 원인이 인적 자본을 육성하는 교육에 투자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강조하며 “약 30년 동안 이탈리아의 경제성장을 억제한 원인 중 하나를 꼽으라면 저조한 연구개발(R&D) 투자입니다. 투자가 저조해 연구개발을 담당할 인력들을 육성하지 못했습니다.”고 밝힌 바 있다.(6) 이탈리아는 경제위기로 인한 장기 침체로 ‘잃어버린 10년’을 겪었지만 여전히 경제 회생을 위한 투자를 게을리하고 있다.

1960년대 후반 미라피오리 공장의 노동자들은 밖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아니면 해가 쨍하거나 언제나 똑같은 불빛 아래에서 일했다. 그 공정 속도는 실로 갓 용광로에서 나온 뜨거운 차체들이 운반되어 왔을 정도로 빨랐다. 이에 도장 노동자들은 늘 손에 화상을 입은 채로 일했으며 일이 끝난 후에는 손가락이 벌겋게 부어오르기 일쑤였다. 열악한 환경에서 고단한 노동을 반복하면서도 이들은 피아트의 새로운 공장에서 일하며 자동차라는 신문물을 생산한다는 자부심을 느꼈다.(7)

그리고 현재의 미라피오리 공장은 침묵을 지키고 있다. 60년 전 모습과는 달리 공장 부지 절반이 방치되며 출입문 대부분이 굳게 닫혀 있다. 전기차 피아트 500과 두 종류의 마세라티 정도만 생산하지만 그마저도 생산량은 최저치를 기록 중이다. 이는 이탈리아 정부의 산업 정책 실패에서 비롯되었다. 일자리 손실을 막기 위해 국내 생산을 장려하고자 스텔란티스 그룹(*오늘날 피아트는 피아트 크라이슬러와 프랑스의 푸조 시트로엥의 PSA 그룹이 합병하여 탄생한 스텔란티스(Stellantis)의 일부이다.)(8)에 투입한 1억 유로의 정부 지원금은 해외투자에 사용되었다. 그리고 지난 10월, 멜로니 정부는 전임 정부가 조성한 전기차 지원금 대부분을 삭감했다. 기업과 정부 간 엇박자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탈리아 노동자들은 정부의 무대책에 한숨을 쉬고 있다. 이탈리아 자동차 산업에 새로운 정책 패러다임이 절실한 상황에서 조르자 멜로니 총리의 행보를 보면 의문이 든다. 스텔란티스 등의 해외 아웃소싱을 비난하며 자국 기업들과 대립각을 세워온 그녀는 일론 머스크의 스페이스X에게는 유난히 우호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최근 이탈리아 정부가 자국의 전화 및 인터넷 인프라에 스페이스X의 암호화 서비스를 적용하는 2조원대 거래 계약을 앞두고 있다고 전해진다.(9) 멜로니 총리의 비일관성은 자국 노동자들을 애타게 만들 뿐이다.
작년 9월, 스텔란티스 그룹은 미라피오리 공장의 3천명의 임직원에게 다음과 같은 이메일을 발송해 논란이 되었다.
"임직원 여러분, 9월부터 여러분과 가족, 친구들을 위해 마세라티 신차를 특별 할인된 조건으로 구입할 기회를 드립니다."(10)
미라피오리 공장 노동자들의 평균 연령은 56세로, 스텔란티스는 앞으로 신규 채용 없이 7~8년만 버티면 손쉽게 미라피오리 공장을 폐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갈 곳 없는 이곳의 노동자들은 ‘쓸모 없는 사람’이라 자책하며 불안과 비관의 고리를 끊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발생한 이메일 사건은 그동안 직원들을 배려하지 못한 스텔란티스 경영진의 무관심과 무책임이 불러온 결과인 듯하다.
유럽 내 독일 다음으로 제조업 강국으로 평가받는 이탈리아는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제조업 비중이 크고, 산업 경쟁력도 높다. 이들의 주력 산업은 금속·기계·식품·패션·화학 등이며 제조업의 GDP 비중은 25%다.(11) 이탈리아는 눈과 입을 즐겁게 만들어주는 문화와 미식의 나라일 뿐 아니라 제조업에 두각을 보이는 나라이다. 앞으로 그 잠재력을 바탕으로 “관광으로 먹고 사는 나라”라는 오명에서 벗어나 비상하길 바란다. 과거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가 발현했듯, 오늘날 제조업 르네상스를 일으킬 핵심 국가가 될 수 있길 기대해본다.
(1) 장문석, 『토리노 멜랑콜리』, 문학과지성사, 2023
(2) 장문석, “[Human in Biz] 伊피아트에 뿌리내린 포드주의”, <매일경제>, 2015.10.23., https://www.mk.co.kr/news/business/7020896
(3) 박희석, “‘나랏빚’에 허덕이던 나라들의 오늘과 우리의 내일 ② 이탈리아 포퓰리즘이 뿌린 ‘재앙’에서 탈출하지 못해”, <월간조선>, https://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I&nNewsNumb=202211100043
(4) 문상덕, “머스크 ‘우파 연대’ 성과?…이탈리아, 스타링크 계약 초읽기”, <포춘코리아>, 2025.01.07., https://www.fortune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46699
(5) 신창용, “해고하더니 마세라티 사라고?…스텔란티스 '임직원 판촉' 논란”, <연합뉴스>, 2024.09.12., https://www.yna.co.kr/view/AKR20240912184900109?input=1195m
(6) 신창용, “伊, 전기차 지원금 7조 삭감…"돈되는 방산에 투자"”, <연합뉴스>, 2024.10.29., https://www.yna.co.kr/view/AKR20241029172100109
(7) 전성훈, “잃어버린 20년 우려하는 이탈리아…"이번에 경제 구조개혁해야"(종합)”, 2020.06.14., https://www.yna.co.kr/view/AKR20200614001600109
(8) “한때 영국보다 잘 살던 이탈리아, 왜 장기침체에 빠졌나”, <주식회사 프리즘투자자문>, 2022.12.31.,https://www.frism.io/handdae-yeonggugboda-jal-saldeon-italria-wae-janggicimcee-bbajyeossna/
글·권지영
인문학의 힘을 믿는 애서가(bouquineur). 한때 불어에 애증을 느꼈지만 불문학을 매개로, 그리고 불어로 작성된 글에서 나오는 깊은 울림에 감동해 슬럼프를 극복했다. 글쓰기를 좋아하고, 글쓰기를 잘하고 싶어 매일 노력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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