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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채희의 시네마 크리티크] 망각과 기억 사이에서 자유주의자의 선택, <미스틱 리버>
[김채희의 시네마 크리티크] 망각과 기억 사이에서 자유주의자의 선택, <미스틱 리버>
  • 김채희(영화평론가)
  • 승인 2025.02.24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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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감독 분류법

장르영화와 예술영화, 메이저 영화와 독립영화, 극영화와 실험영화 등 이분법적으로 영화와 감독을 구분하다보면 이보다 훨씬 다양하게, 끝없이 상반된 두 가지 축을 늘어놓을 수 있다. 나는 언젠가부터 이러한 이분법이 대부분의 영화(감독)에 잘 들어맞지 않을뿐더러, 대립된 개념으로 포섭할 수 없는 작품들이 그렇지 않은 것보다 훨씬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이와는 다른, 그렇다고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획기적인 방식도 아닌, '적당히' 주관적인 분류법을 생각하게 되었다.

우선 첫 번째로는 스티븐 스필버그, 마틴 스코세이지,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등 일명 무비 브랫(Movie Brat)이라 불리던 영화학교 출신 감독들이 바로 그들이다. 미국을 대표하는 이 거장들은 어릴 적부터 영화의 세례를 물씬 받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무명 시절이 길지도 않았고 초보 딱지를 떼기도 전에 영화계의 전폭적인 관심을 받았다. 평생 영화감독 이외의 삶을 살지 않았던 무비 브랫들은 무엇으로 영화를 만들었을까? 아마도 유년시절부터 봐왔던 수많은 영화들이 그들의 기억 속에 저장되어, 그것들이 필요할 때마다 적재적소에서 특정 주제나 장면으로 변주되어 관객에게 선보였을 것이다. 사실 학교에서 배운 것보다 스크린이 더 많은 것을 알려주었을 테니, 그들은 굳이 영화학교를 갈 필요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영화학교는 통과의례에 가까웠을 것이다. 물론 영화학교 출신이 아닌 무비 브랫들도 무수하다. 박찬욱, 봉준호(KAFA 출신이긴 하지만), 류승완이 그러하며, 쿠엔틴 타란티노 역시 학교 바깥의 무비 브랫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그들은 음식을 섭취하듯 영화를 봤고 이를 자양분 삼아 자신의 세계를 꽃피웠다.

반면에 학교가 필요했던 감독들도 있다. 처음에 그들의 관심은 영화가 아닌 다른 분야, 예를 들면, 인류학, 정치학, 철학, 사회학, 음악, 건축, 현대미술 등이었다. 다른 학문을 전공하던 이 들은 어느 날 문득 스크린을 통해 자신의 이데올로기나 가치관을 타인과 공유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학부 과정 도중 혹은 대학원에서 진로를 변경해, 재능을 만개했다. 테렌스 맬릭,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클로이 자오, 캘리 라이카트, 데이비드 린치, 짐 자무쉬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머릿속에서 맴돌던 이야기를 영화적(cinematic)으로 포장해줄 방법론이 필요했던 그들에게 영화 학교는 선배들의 미학을 학문적으로 분석하여 소개하는 가교 역할을 했을 것이다. 나는 오늘날 대다수 감독이 이 경우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세 번째 경우는 산업 바깥에서 영화의 근원적인 정체성을 고민하는 대부분의 비주얼 아티스트를 아우른다. 그들은 이야기보다는 영화가 품고 있는 조형적인 형상, 필름의 물성, 예술적인 구조에 관심을 더 기울인다. 어찌 보면 이 부류가 가장 영화적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영화를 뜻하는 거의 모든 용어(映畫, 電影, Film, Cinema, Kino, Movie 등등)에는 이야기라는 의미가 들어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 부류는 이야기 대신, 이미지의 운동을 통해 비가시적인 존재, 정신적인 상태, 환영, 여기서 더 나아가 공간과 시간을 포착하려 했으며 영화를 사유의 통로로 활용하고자 했다. 1920년대의 아방가르드, 그 이후에 발화된 레트리즘(lettrisme), 상황주의자(situationalist) 영화 그리고 뉴아메리칸 시네마라고 불리던, 1960년대 미국의 구조주의자들이 여기에 속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이 세 가지 경우에 해당되지 않는 감독도 존재한다. 어쩌다보니(?) 영화감독인 사람들. 아마도 영화감독이란 직업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속할 것이다. 그 중 영화사에 등재되지 못하고 사라진 이들의 행적을 복원하는 작업은 미시적 관점의 영화문화사 측면에서는 응당 필요한 일이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영화가 역사학 정도의 볼륨을 가지면 가능할 지도 모를 일이다. 19세기 후반의 신문물이었다가 곧장 가장 강력한 엔터테인먼트로 자리 잡은 영화는 여전히 자신의 편년체 영화사도 제대로 구축되지 못했다. 그러므로 소리 없이 명멸해간 감독들, 위에 기술한 세 가지 분류법에 들지 못한 수많은 범인(凡人)들의 흔적을 모조리 들춰내는 것은 아직은 요원한 일이다. 그러나 마지막 부류의 감독들 중에 오즈 야스지로, 구로사와 아키라, 샤트야지트 레이, 신상옥,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임권택, 존 포드, 하워드 혹스 등은 어쩌면 가장 신비로운 존재일 것이다. 그들은 학교를 다녀 영화 이론과 미학을 배운 적이 없으며, 유년시절부터 차곡차곡 쌓은 영화 아카이빙도 (거의) 부재하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영화감독이나 작품에 영향을 받지 않아 비교적 청정한 표본을 지니고 있다. 나는 이 신비롭고 위대한 부류에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돈 시겔의 어깨너머로 연출을 배웠다고는 하지만 전적으로 이스트우드는 홀로 선 존재다. 그는 폭력을 폭력으로 응징하려는 함무라비의 후예이며, 미국의 건국이념인 프론티어 쉽을 여전히 가슴에 새기고 산다. 세르지오 레오네의 페르소나나 ‘더티 해리’로 통칭되던 시절, 이스트우드는 총기 휴대를 옹호하며, 자신을 스스로 지키려는 모든 자경단(vigilante)의 정신적 지주였다.

  누구나 나이를 먹고 세상을 경험하게 되면, 자신만의 철학과 비전을 가지게 된다. 우리는 경이로운 예술 행위로 이를 승화시킨 인물들을 가리켜 거장(巨匠)이라고 칭한다. 21세기에 활동하는 미국 감독 중에 거장의 타이틀에 가장 어울리는 인물로 나는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제외한 채, 다른 어떤 사람도 떠올릴 수 없다. 왜냐하면 이스트우드의 영화는 그의 자유주의 사상과 완전히 합일되었기 때문이다. 어떤 소재를 다루던지 이스트우드는 이 경지에 올라섰다. 장-뤽 고다르가 영면한 지금, 이스트우드는 고다르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 세계를 사유하는 철학자가 되었다. 나는 <미스틱 리버>를 보고 나서 꽤 오랫동안 이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2. <미스틱 리버>의 세 친구의 망각과 기억

  <미스틱 리버>는 자신을 지키지 못해, 평생 어두운 심연 속에 갇힌 세 소년을 그린다. 지미, 션, 데이브는 보스턴, 이스트 버킹엄의 오래된 주택가에 산다. 친구 사이인 이들은 거리에서 야구를 하는 것으로 소일한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들은 가지고 놀던 공이 하수구에 빠져 무료해지자, 채 마르지 않은 시멘트 보도블록에 재미삼아 이름을 쓴다. 친구들이 서툴게 서명하고 난후, 데이브가 마지막으로 끼어드는 순간, 경찰 뱃지를 단 남자가 차에서 내려 아이들을 겁박한다. 그는 근처에 사는 지미와 션을 놔둔 채, 데이브를 집으로 데려다준다면서 차에 태운다. 모든 비극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사실 차에는 또 다른 남자도 타고 있었고 데이브는 그들의 아지트에 끌려가 나흘 동안 강간을 당한다. 가까스로 도망쳐 목숨은 구하지만 그는 평생 이 날의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성인이 된 후, 지미는 불량배, 션은 경찰 그리고 데이브는 블루 컬러 노동자로 살아간다. 이 세 사람의 생활 방식은 어쩌면 그날의 충격이 각자에게 다른 방식으로 영향을 끼쳐 분화된 것처럼 보인다. 악을 저주하면서도 악에 물든 지미, 악을 처단하기 위해 경찰이 된 션, 여전히 미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채 무기력한 데이브. 그는 가장 밑바닥 인생을 살아가는 중이다. 절친했던 11살 소년들 사이에 우정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은 아주 간혹 스치듯 지나가지만 그뿐이다. 아마도 그들이 우정을 더 깊게 나눌수록 과거의 트라우마가 지속적으로 덮칠 것이므로 세 사람은 자연스럽게 멀어져야 했을 것이다. 친구의 존재는 자신을 옭아맨 과거의 기억을 상기시키는 매개이므로 그들 사이의 소원함은 망각과 생존을 위한 본능의 발현인 셈이다.

 

케이티와 지미
케이티와 지미

위태롭게 유지되던 그들의 관계에 균열을 일으킨 사건이 발생한다. 지미의 19살 난 딸, 케이티가 시체로 발견된다. 비행 청소년 시절 얻은 딸이지만, 지미는 케이티로 인해 갱생한다. 어둠의 세계에서 손을 씻고 식료품점을 운영하는 그는 책임감 강한 아버지이자 남편이 되었다. 지미는 자신이 범죄를 저지르고 교도소에 복역할 때 첫 번째 아내가 죽고 딸이 부모가 없는 상태에서 홀로 지내야 했던 시절을 떠올리면 케이티에게 한 없이 미안해진다. 어쩌면 아나베스와 재혼한 것도 딸을 제대로 양육하고 싶은 욕심이 앞섰기 때문이다. 지미에게 케이티는 지켜야 할 대상이자, 삶의 희망이다. 그래서 이 불량기 가득한 아빠는 딸이 늦게 귀가할 때면 베란다에서 하염없이 기다린다. 딸은 그의 마음을 알기 때문에 언제나 자정 무렵에는 귀가한다. 이번에도 그럴 줄 알았다. 차가운 딸의 시체를 보기 전까지는…….

 

데이브
데이브

데이브는 항상 침울해 보인다. 사려 깊은 아내를 만나, 아들까지 뒀지만 그는 지옥 같은 시간을 단지 견뎌내고 있을 뿐이다. 그는 왜 자신이 그런 고난을 겪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데이브는 혼이 빠져나간 채 껍데기만 남은, 살아 있지만 산송장(living dead)이다. 그는 뱀파이어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소아 성애자들에게 끌려가 영혼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은 그는 25년이 지난 지금까지 어둠 속을 헤매고 있다. 주말을 맞아 동네 바에서 술을 마신 데이브는 늦은 밤에 귀갓길에 오른다. 그런데 그 순간, 차 안에서 소년을 유인해 변태적인 성행위를 하는 남자와 마주친다. 이를 목격하는 순간 그는 정신줄을 놓아버린다. 데이브는 자신을 약취한 과거의 범죄자들을 응징하듯 변태 성욕자를 죽도록 두들겨 팬다. 그리고 아내에겐 차마 과거를 털어놓을 수 없어서 강도를 만나 싸우다가 상처를 입었다고 둘러댄다. 지갑을 강탈하려던 강도가 어쩌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은 아내, 셀레스트는 그날 밤 이후 매일 같이 신문을 뒤적거리면서 남편이 벌인 사건의 경과를 알아내려 한다. 하지만 동네를 뒤덮은 것은 강도 사건이 아니라 사촌 형부이자 남편 친구인 지미의 딸이 살해되었다는 뉴스다.

 

션

션은 겉으로 보기엔 가장 멀쩡하게 자란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그는 그날의 악몽이 동기가 되어 경찰이 되었을 것이다. 션은 매일 강력 범죄 현장을 맞닥뜨리면서도 세상과 유리된 채 자기 안에 매몰된다. 임신한 아내는 과거의 강을 완전히 건너지 못한 남편과 소통이 되지 않는다고 여겨 그의 곁을 떠난다. 그녀는 가금씩 션에게 전화를 걸지만 수화기를 든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션의 상사 화이티는 집을 나간 아내는 잊고 새롭게 인생을 시작하라며 동료 여경과 인연을 맺어주려 하지만 그는 거절한다. 그러던 중 션은 또 다른 살인 사건을 마주하게 되고 피해자가 지미의 딸인 것을 알고 놀란다. 그는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옛 친구들과 조우하게 되면서 점차 잊고 싶었던 과거의 미궁 속으로 빠져든다.

  세 친구는 어떤 의미에서는 모두 피해자다. 사건의 직접적인 피해자는 데이브이지만 지미와 션 역시 과거의 상처에서 헤어나기 위해 고군분투하면서 살아왔다. 데이브와 달리 두 사람은 과거를 제대로 직시하지 못한 채 지냈다. 그들이 가장 상처받은 친구와의 대면을 꺼려하는 이유는 자신들이 행한 세상에 대한 투쟁이 회피였다는 사실을 그가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사람은 저 불길하며 불가해한(mystic) 강에 친구를 수장시키면서 과거를 철저히 망각하기로 결정한다. 데이브는 뱀파이어 영화를 보면서 “저들은 산송장이지만 아름다워. 인간의 장점을 잊고 살아가잖아”라고 중얼거린다. 그는 소아 성애자들에게 물린 상처가 영원히 봉합되지 않은 채 이렇게 평생을 근근히 버텨왔다. 그 역시 뱀파이어들처럼 누군가에게 물린 사실 자체를 망각하며 살고자 한다. 그러나 데이브는 뱀파이어를 동경하면서도 결코 뱀파이어가 될 수 없고 과거를 망각하면서 살아갈 수도 없다.

 

지미와 션
지미와 션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션은 지미가 데이브를 수장시킨 사실을 눈 감으면서 과거에서 탈출하려한다. 또한 지미는 아내가 가족을 들먹이면서 데이브의 살해를 정당화하자, 그 역시 망각의 대열에 합류한다. 이 둘의 공모로 인해 강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데이브를 삼켜버린다. 가족의 안녕과 마음의 평화를 위해 과거와 결별한 두 사람은 이제 진정한 뱀파이어가 된다. 그러므로 데이브의 자조 어린 독백인 “저들은 산송장이지만 아름다워. 인간의 장점을 잊고 살잖아”라는 대사는 윤리적으로 정당하지 못한 채 자의식마저 사라진 두 친구를 향한 냉소라고 할 수 있다.

 

 

3. 이스트우드는 어떻게 변했는가?

‘미스틱 리버’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강들과는 다르다. 우리가 아는 강들은 어디선가 발원하여 결국은 바다로 흘러간다. 그런데 이 불가해(不可解)의 강은 호수처럼 흐르지 않고 모든 것을 삼키면서 가둬놓는다. 여기서 강은 물리적적인 장소일 뿐만 아니라 기억의 저장소이기도 하다. 인류가 지금껏 자행했던 모든 범죄 행위와 그 결과가 우글거리는 곳, 이곳에서 인류는 끊임없이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냈고 이를 거둬들였다. 또한 이 강에서 인류는 서로에게 영향을 주면서 유구한 삶을 이어왔다. 그러므로 미스틱 리버는 세계에 대한 강력한 은유다. 한편, 미스틱 리버는 망각을 상징하기도 한다. 신이 인간에게 준 최고의 재능은 망각이다. 이 능력이 없었다면 아마 모든 사람은 우울증에 걸렸거나 오늘과 내일 대신 과거에만 얽매인 채 살았을 것이다. 대다수 인간은 이 세계에서 생존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망각을 실천하지만, 그럴 수 없는 인간이 있다. 데이브가 바로 그러한 존재다. 그런 부류의 인간이 존재하기 때문에 인류는 죄의식과 트라우마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가 없다. 하지만 동물이 아닌 인간으로 바로 설 수 있도록 우리를 각성시키는 데이브를 친구들은 망각의 강에 밀어 넣는다. 그렇다면 이들은 언제까지 데이브를 잊고 살 수 있을까? 두 공모자는 자신의 생존에 위협이 되는 과거의 고통과 완벽히 절연할 수 있을까?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서는 순간, 우리는 망각의 정당함에 대해 숙고할 수밖에 없다. 나는 <미스틱 리버> 본 이후 다른 영화들에서 보았던 망각에 관한 상반된 두 가지 태도를 떠올렸다.

 

'극장전'의 동수
'극장전'의 동수

홍상수의 <극장전>에서 동수(김상경)는 감독(홍상수)의 분신이자, 미장아빔 속 상원(이기우)의 의붓아버지, 삼촌 등으로 다중 분화된 인물인 이형수(김명수) 감독을 병문안 간다. 그런데 이형수는 동수의 면전에 대고 "죽기 싫다"라는 말만 반복한다. 그가 애처롭게 보였던지 동수는 “형은 죽지 않을 거야”라며 눈물을 쏟는다. 병원에서 나온 동수는 생각을 하면 담배도 끊을 수 있다면서 “생각만이 나를 살릴 수 있어. 죽지 않게 오래 살 수 있도록”이라는 대사를 읊조린다. 사실 우리는 동수가 하려는 생각이 무엇인지 알 길은 없지만 그가 살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독려한다는 사실은 짐작할 수 있다. <극장전>에서 들려오는 ‘생각한다.’라는 말은 무엇인가를 골똘히 떠올리면서 잊지 않기 위해 애쓴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자면 생각은 망각의 정반대 방향으로 운동한다. 동수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망각 대신 생각을 택한 것이다.

 

'열혈남아' 포스터
'열혈남아' 포스터

왕가위의 데뷔작 <열혈남아>에서 아화(유덕화)는 극중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지만 인지 능력을 상실한다. 애인 아오(장만옥)가 면회를 와서 침을 질질 흘리는 그의 입에 귤을 까 넣어준다. 이윽고 지난날을 회상하듯 두 사람이 나누던 사랑의 추억이 플래시백으로 몽타주 되고 그 위로 왕걸(王傑)의 ‘당신을 잊고 나를 잊고(忘了你 忘了我)’가 흐른다. 이 노래의 가상적 화자는 아화이며 청자는 아오일 것이다. 그래서 <열혈남아>의 주제가는 ‘나를 사랑했던 당신의 기억과 나란 존재를 잊어야만 살 수 있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이미 아화는 머리를 다쳐 애인의 존재를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니 아오 역시 아화의 존재를 망각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누군가는 살기 위해 망각하고 누군가는 그 반대로 망각의 강을 부정한다. 우리는 국가적 재난이나 숭고한 개인적 희생 앞에서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곤 한다. 망각하지 않고 기억한다는 것은 “세월이 약”이라는 금언을 거부하려는 결연한 의지의 표명이다. 이 의지는 윤리적 태도와 결부되어 있다. 지미는 데이브를 딸의 살인자로 오해해 그를 수장시킨 직후, 션에게서 진범이 잡혔다는 말을 듣자 커다란 혼란이 빠진다. 어찌할 바를 모르던 그에게, 아내는 “가족을 위해 한 어떤 일이라도 비난받아선 안 된다고 말했더니 아이들이 편히 잠들었어요.”라고 사갈처럼 귀에다 속삭인다.

 

아나베스와 지미

레이디 맥베스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맥베스』에서 주인공인 맥베스를 추동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그녀는 남편을 꼬드겨 맥베스가 던컨 왕을 죽이게 만들고 그가 왕이 되자 자신은 왕비에 오르지만 죄책감에 몽유병을 앓는다. 맥베스 부인은 타인에 대한 동정심과 자비를 억누르고 자신의 안위와 권력 의지를 드러내지만 끝내 양심의 가책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한다. 고전은 이렇듯 언제나 시적 정의(Poetic Justice)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맥베스 부인과 비견할 수 있는 아나베스는 어떠한가? 그녀는 살아남은 자들의 안위(安慰)를 위해 동업자와 제부까지 살해한 남편을 감싸면서 위로한다. 하지만 아나베스는 몽유병을 앓지 않고 죄책감에 사로잡히지도 않는다. 아나베스 역시 지미와 션 그리고 지미의 하수인으로 등장하는 새비지 형제처럼 생각 대신 망각을 선택한다. 이 선택의 대가는 결코 시적 정의와 무관한 것처럼 보인다.

<미스틱 리버>의 엔딩 시퀀스는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동네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비극적 사건이 언제 일어났냐는 듯, 시끌벅적한 축제가 열린다. 사람들은 모두 거리로 쏟아져 나와 퍼레이드를 즐긴다. 기억(생각) 대신 망각을 선택한 자들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가득하다. 오직 남편을 믿지 못해 지미에게 데이브가 범인일 것 같다고 말했던 셀레스트만이 불행하다. 그녀는 남편의 행방을 찾아 거리를 두리번거린다. 아들은 퍼레이드에 동참 중이지만 아빠의 모습이 안보이자 의기소침해 있다. <미스틱 리버>에서는 과거를 기억하고 생각하는 자만 비참해진다. 카메라는 축제가 끝나고 난 뒤 보도블록 위에 새겨진 ‘JIMMY, SEAN, DA’에 잠시 멈췄다가 미스틱 리버를 횡단하면서 검푸른 물결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데이브 이름이 다 쓰이지 않은 이 장면이 암시한대로 처음부터 그는 망각될 운명이었다. 지금까지는 데이브 자신만이 그날을 기억하고 있었다면, 그가 사라진 지금은 내일로 흐르지 않는 강, 미스틱 리버만이 데이브와 그의 과거를 기억할 것이다.

 

데이브와 셀리스트
데이브와 셀레스트

이스트우드의 카메라는 첫 장면에서 마치 강에서 빠져나오는 것처럼 보이며, 마지막 장면에서는 강으로 회귀하는 것처럼 보인다. 범법자를 징벌하는 총을 들었던 과거와 결별한 그는 인간사의 모든 것을 기록하고 저장하는 카메라로 망각의 반대편에 선다. 부적절한 이야기 분배와 그로 인한 서사의 불균형, 제대로 설명되지 못한 션의 현재, 딸과 브랜던이 지미를 피해 라스베가스로 가려는 이유 등이 삭제된 점 등 <미스틱 리버>는 작은 구멍들도 소소하게 존재하는 작품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스트우드가 카메라를 든 이유에 설득당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1950년대부터 70년대 초반까지 공화당원이었지만 그 이후로는 자유당(Libertarian Party)을 암묵적으로 지지하다가 최근에는 당원 명부에 자신의 이름을 공식적으로 등재했다.

‘자유당’이라고 번역되지만 실제로 ‘자유주의자들의 당’인 ‘Libertarian Party’는 개인의 자유와 더불어 타인의 사생활에 철저하게 불간섭주의를 견지한다. 낙태할 자유, 총기를 소지할 자유, 동성애를 즐길 자유, 마리화나를 즐길 자유 등 거의 모든 방면에서 자유 그 자체를 최우선 덕목으로 두는 이 당에서 이스트우드는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다. 그는 공화당 당원이던 시절에는 악을 징벌하기 위해 카메라 앞에 나섰다. 카메라 뒤에 서기 시작한 이후로 그는 침묵하고 망각하는 자들을 고발하거나 시적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영화를 만들지 않았다. 이스트우드는 사람들이 망각할 자유를 가졌듯이 누군가는 기억할 자유를 지닌다고 믿는다. 이스트우드는 자신의 자유 의지를 영화 속에 실천해, 모든 망각된 자들의 외침이 우글거리는 미스틱 리버 속으로 들어간다. 망각하는 자들은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것이며, 기억하는 자 역시 각자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영화 속에서는 두 명의 친구 그리고 그들과 공모했던 어떤 사람도 처벌받지 않는다. 오히려 유일하게 고통 받는 이는 망각에 저항하는 자인, 남편을 믿지 못한 셀레스트 뿐이다. 어느 누구의 편도 섣불리 들지 않으려는 불간섭적 태도, 그렇지만 사건의 전모를 기록하려는 아키비스트적 면모가 자유주의로 돌아선 이후 그에게 발생한 변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망각과 기억(생각) 사이에서 언제나 진동할 수 밖에 없는 관객들은 <미스틱 리버>에서 이스트우드가 보여준 자연주의적 무관심성(無關心性)을 통해 상반된 두 가지 삶의 태도에 관해 진지하게 사유하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는 극장 문을 나서면서부터 다시 시작된다.

 

 

글·김채희
영화평론가, 부산대 영화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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