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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상호의 시네마 크리티크] 샘 윌슨의 고백이 진솔한가? <캡틴 아메리카: 브레이브 뉴 월드>
[송상호의 시네마 크리티크] 샘 윌슨의 고백이 진솔한가? <캡틴 아메리카: 브레이브 뉴 월드>
  • 송상호(영화평론가)
  • 승인 2025.02.17 09: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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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캡틴 아메리카: 브레이브 뉴 월드' 스틸컷.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제공
영화 '캡틴 아메리카: 브레이브 뉴 월드' 스틸컷.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제공

<캡틴 아메리카: 브레이브 뉴 월드>는 어딘가 이상하다. 새로운 캡틴 아메리카 샘 윌슨(안소니 마키)을 영웅으로 그려내는 데 집중하는 게 아니라, 그저 근사하게 묘사하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는 이유에서다. ‘영웅은 멋져야 한다’는 공식은 이미 대중문화 속 콘텐츠 생산에 있어 철 지난 클리셰이자 생명력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하지만 본편이 샘 윌슨을 어떻게 그려내는지 들여다본다면 납득하기 어려운 순간들이 제법 많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이때 혹자는 내 의견에 곧바로 반박할 수 있겠다. “샘 윌슨은 지극히 평범한 군인 출신 용병이기 때문에, 그가 캡틴 아메리카의 자리를 이어받는 과정에서 마주하는 한계와 어려움들이 지난 드라마와 이번 영화에 잘 녹아 있다”고 말이다. 물론 나 역시 이 캐릭터가 ‘마블시네마틱유니버스(이하 MCU)’라는 세계관에 첫 등장한 2014년부터 10년 넘게 여러 편의 영화 그리고 드라마에서 쌓아온 궤적을 부인할 생각은 없다.

사실 여기서의 쟁점은 MCU가 캐릭터를 다룰 때 자가당착에 빠진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샘 윌슨이 스티브 로저스의 공식 후계자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지극히 당연한 전제 조건이 있다. 지금 내 눈앞의 샘 윌슨이 지금껏 함께해왔던 스티브 로저스와 같은 세계를 공유하며, 그들 또한 관객과 소통해 온 유일한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 문제는 이곳이 멀티버스라는 점이다. 관객과 호흡해 왔던 스티브도 이젠 한 명만 있을지 여러 명이 존재할지 확신할 수 없다. 마블 관련 콘텐츠를 다루는 유튜버들이 분석하듯 지구별 넘버링을 따지고, 발생한 사건과 배경 요소 간 연결고리와 접점, 각종 인과를 면밀히 비교해 본다면 물론 어떤 세계에서 어떤 존재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유추는 가능할 테지만, 지금의 쟁점은 그와는 조금 다르다. 질문으로 던져보겠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마음을 줄 수 있는가?

이런 맥락에서 보면 MCU는 스스로 갈 길을 잃어버린다. 그 이유는 MCU 콘텐츠들이 항상 현실과의 연동 지점을 탐색한다는 데 있다. 앞서 <팔콘과 윈터 솔져>(2021)를 통해서도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전시된 캡틴 아메리카 콘텐츠 중 일부는 실제 우리 현실 속 마블 코믹스 표지로 쓰였던 이미지다. 그러니까 작중 무수히 찾아낼 수 있는 이러한 이스터에그로 미뤄보자면 MCU는 현실과의 동기화, 즉 관객과 영화를 연결하는 작업에 굉장히 적극적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영화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존재로서의 샘 윌슨은 우리 관객의 현실과 같은 현실을 살아간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팔콘과 윈터 솔져>부터 이어져 온 그의 서사에는 동시대 지구촌의 주요 화두로 떠오른 인종차별, 난민, 미국중심주의에 대한 재고 등이 아주 적나라하고도 날카롭게 반영됐다고 볼 수 있겠다.

 

드라마 '팔콘과 윈터 솔져' 스틸컷.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제공
드라마 '팔콘과 윈터 솔져' 스틸컷.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제공

이런 측면에서 캡틴 아메리카의 네 번째 영화 <캡틴 아메리카: 브레이브 뉴 월드>는 MCU가 표류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연출에 있어 미학 요소를 심도 있게 고려했는지, 각본 상 전개가 납득이 갈 정도의 수준이 보장됐는지 따지려는 게 아니다. 이건 관객과의 소통 측면에서의 문제다. 샘 윌슨 역을 맡은 배우 안소니 마키 역시 배역을 향한 애정이 큰 사람이다 보니 샘 윌슨이 캡틴 아메리카로 거듭나는 여정은 단순히 영화가 생산되는 비즈니스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않나.

스티브 로저스가 방패를 내려놓은 이후 <팔콘과 윈터 솔져>를 비롯한 지난날의 궤적 속에서 샘 윌슨이 어떤 마음으로 이 길을 걸어왔나. 그는 흑인이 캡틴 아메리카를 맡게 됐을 때의 중압감이나 부정적인 시선들을 의식한다고 털어놓기도 했고, 혈청을 맞지 않은 범인(凡人)이기에 나와 가족조차도 건사하기 힘든데 어떻게 전 세계를 지키느냐며 좌절도 했을 테다.

그렇다면 샘 윌슨이 4편에서 스스로의 한계를 고백하는 장면을 잘 되짚어 보자. 그는 그저 인간일 뿐이다. 피부가 찢어진 자리에 피가 차오르고, 겉으로는 멀쩡한 척 하지만 속으로는 쉴 새 없이 부담감에 짓눌리는 ‘보통 사람’ 말이다. 문제는 영화 속에서 이 같은 한계를 인지하는 방식이 그의 ‘액션’이 아닌 그의 ‘대사’를 통해서만 성립된다는 점이다. 영화를 자세히 보면, 캡틴은 오히려 보통 사람을 압도하는 격투 실력과 신체 능력을 보여준다. 헐크와의 대결에서 얻은 부상은 부러진 팔뿐이다. 여기서 오해하면 안 되는 지점이라면 단순히 개연성을 따지자는 게 아니라, 동시대 관객을 향한 샘 윌슨의 고백이 ‘기만’이라는 점을 짚어야 한다는 것. 즉 그가 말로 내뱉은 사항들이 실제로 그의 육체를 통해서는 제대로 성사되지 않았다는 걸 기억하자. 그렇다면 영웅으로서 책임감, 캡틴 아메리카로서의 사명감을 두고 조사실에서 버키와 나눈 대화, 병실에서 호아킨과 나눈 진지한 대화 신은 모두 따지고 보면 관객을 완벽하게 기만하는 구간인 셈이다.

 

드라마 '팔콘과 윈터 솔져' 스틸컷.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제공
드라마 '팔콘과 윈터 솔져' 스틸컷.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제공

멀티버스 개념이 도입되지 않았을 때를 떠올려 보자.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와 아이언맨은 어느샌가 동일시됐고, 현실의 관객들 역시 그의 서사에 배우 본인의 인생 경로를 겹치기도 하고, 관객 스스로의 경험을 덧대고 투과하면서 끈끈한 유대 관계를 구축해 나갔다. 샘 윌슨은 어떠한가. 극중 자신이 속한 세계 속 사람들에게 진정한 캡틴의 후계자라고 칭송을 받고 있으나, 현실 속 우리들이 그를 인정하고 있는가? 지금 이 시점 우리네 현실 속 대중의 반응은 제각각이다. 엔드게임 이후 <팔콘과 윈터 솔져>에서 ‘샘 윌슨 캡틴 만들기 프로젝트’를 통해 개인 서사 구축에 심혈을 기울이면서 관객들 각자와 그의 존재를 연결하려고 했지만 그 작업이 과연 유효했느냐는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멀티버스는 좋은 핑곗거리이자 피난처가 된다. 바람직한 캐릭터 조형에 실패한 데 따르는 부작용을 최소화하고 더 나아가 근사하게 왜곡해 낼 수 있다는 점에서다. 대표 예시 역시 어렵지 않게 최근의 사례에서 찾을 수 있다. 멀티버스 사가에서 메인 빌런 역 ‘캉’을 맡았던 조너선 메이저스가 2023년 12월 연인 폭행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고 MCU를 비롯한 영화계에서 퇴출당하자, 이후 마블 측에서는 그 빈자리에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를 ‘닥터 둠’이라는 다른 배역으로 캐스팅해 복귀시키는 결단을 내렸다. 물론 최근 들어 메이저스가 돌아올 수 있다는 루머들이 흘러나오고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이번 논란으로 분명해진 점이 하나 있다. 어차피 멀티버스니까 이 배우를 다른 배우로 대체하고, 또 이 캐릭터도 다른 배우가 연기해버리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뻔뻔한 대응이 가능하다는 것.

2020년대의 관객과 콘텐츠 소비층의 주요 특성 중 하나는 바로 내가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한 만큼의 퀄리티를 보장받길 원한다는 점이다. 정보 과잉의 시대 속에서 대다수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소비 방식은 무엇인가? 효율성을 극대화하면서도 쾌감을 쉽게 얻어야 하며, 그에 따른 피로감은 적어야 하는 구조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이런 가운데 MCU는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진 지 오래다. ‘멀티버스(다중우주) 사가’, ‘인커전(서로 다른 두 세계의 충돌)’, ‘변종(다른 세계를 살아가는 같은 존재들의 통칭)’과 같은 키워드들이 대중의 진입장벽을 높여버렸기 때문이다. 2010년대를 주름잡았던 대중문화의 지배자 MCU 코드는 이제 그 생명력을 거의 잃어가고 있다. 이 상황에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를 닥터 둠으로 재소환한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지 않나.

MCU가 주요 거점이자 무대, 서사의 구심점으로 삼고 있는 이 멀티버스는 그래서 그 자체로 역설이고 모순이다. ‘이 세계’에서 ‘이 사람’은 온전히 존재할 수 없다. 샘 윌슨이 발딛고 선 세계는 그가 존재할 이유가 있어야만 가치가 있겠지만, 그럴 수 없다. 윌슨 역시 그가 정당성과 정체성을 획득할 수 있으려면, 견뎌내는 현실이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무대여야만 하지 않나. 이건 수많은 다른 작품들 속에서 묘사되는 멀티버스 소비 방식에도 적용 가능하다. 그렇기에 이들이 저마다 속한 세계 간의 충돌을 막기 위해 한데 모여야(어셈블)한다는 설정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왜냐하면 이들이 무엇을 위해 모이는지 명분이 없고, 모여서 구하는 세계가 누구를 위해 존재해야만 하는지조차도 근거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영화 '캡틴 아메리카: 브레이브 뉴 월드' 스틸컷.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제공
영화 '캡틴 아메리카: 브레이브 뉴 월드' 스틸컷.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제공

 

글‧송상호
영화평론가, 경기일보 기자로 활동하며 글을 쓰고 있다. 2021년 박인환상 영화평론 부문 수상. 2023년 영평상 신인평론상 우수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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