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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적 외피 그러나 여전한 장르적 쾌감
보수적 외피 그러나 여전한 장르적 쾌감
  • 윤필립 | 영화평론가
  • 승인 2025.02.28 10: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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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스턴스> (2024)

1. <서브스턴스>의 ‘여성괴물’

프랑스 영화 감독 코랄리 파르쟈는 매 작품마다 소품과 공간, 그리고 근접 촬영 기법을 활용해 캐릭터의 내밀한 심리와 인물 간의 갈등을 절묘하게 시각화하고, 이를 통해 서스펜스와 스릴러라는 장르적 요소를 성공적으로 구축해 왔다. 그러한 작품에는 늘 여성 캐릭터가 주역으로 등장하는데, 캐릭터들 모두 극의 흐름에 따라 괴물로 변모해 간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일례로, 2020년 한국에서 개봉한 <리벤지>에는 자신을 성적 도구로만 이용하고 절벽에서 떨어뜨려 살해하려던 남성들을 끝까지 쫓아가 처단하고 마는 젠(마틸다 안나 잉그리드 루츠)이 등장한다. 그리고 최근작 <서브스턴스>(2024)에는 젊음과 아름다움을 강요당함에도 스스로 그것을 온몸으로 수용하며 막장까지 밀어붙이는 엘리자베스 스파클(데미 무어)과 수(마가렛 퀄리)가 등장한다.

영화학 교수이자 작가 바바라 크리드는 이러한 영화 속의 여성 캐릭터들이 가녀린 육체의 소유자에서 두려운 파괴력을 지닌 괴물스러운 존재로 변모한다는 점에서 이들을 ‘여성괴물(monstrous-feminine)’이라 지칭하였다. 그에 따르면, 영화 속 여성괴물은 도덕성이 결여된 원초적 모성, 뱀파이어, 마녀, 괴물스러운 자궁, 피를 쏟는 상처, 악령에 사로잡힌 육체, 거세하는 모성, 아름답고도 치명적인 살인마, 사이코패스 노인, 괴물 같은 어린이, 맹수, 요괴, 거세하는 여성 등으로 범주화할 수 있다. 여기서 이들을 여자 괴물(female monster)이 아니라 여성괴물로 개념화한 것은, 그러한 캐릭터들이 탄생한 배경에는 단순히 생식기로 구별되는 생물학적 성별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으로 교묘히 강요되는 성역할 즉, 젠더성이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코랄리 파르쟈의 <리벤지> 속 젠이라는 캐릭터는 ‘거세하는 여성’임에 명백하다. 그렇게 변모한 젠을 통해 <리벤지>를 보는 관객들은 언제 처단당할지 모른다는 피해자로서의 두려움과 여성을 육체로만 취급하는 불의한 남성성을 통쾌하게 쓸어 버리는 처단자로서의 쾌감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반면, <서브스턴스>에 등장하는 여성괴물은 어느 하나의 범주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여러 괴물성이 하나의 육체 위에 조립된 혐오스러운 괴물 그 자체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탄생한 여성괴물에게는 <리벤지>의 젠처럼 처단해야 할 복수의 대상이 특정되지 않는다. 오히려 스스로가 흉측한 괴물로서 처단의 대상이 될 뿐이라는 점에서 <서브스턴스>는 다소 보수적이다. 

일반적으로 폭력이 난무하는 영화는 현실의 전복과 강요되는 정상성의 파괴라는 진보성으로 장르적 쾌감을 선사하고자 한다. 그럼에도 <서브스턴스>의 여성괴물이 이렇게 보수적인 틀 속에 갇혀 있다면, 과연 그 장르적 에너지와 그것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추진력은 어떻게 생성되는 것일까? 

 

2. 촬영과 편집으로 강화한 폭력성

영화 <서브스턴스>에서 엘리자베스 스파클은 배우로서 이름처럼 반짝이던 젊은 날을 뒤로하고 현재는 늙어 퇴물 취급받는 여성이다. 이렇게 엘리자베스가 더 이상 젊지도, 그래서 아름답지도 않다는 이유로 제작사의 수장 하비(데니스 퀘이드)는 엘리자베스를 TV 운동 프로그램에서 하차시킨다. 이 일련의 사건을 촬영하는 과정에서 코랄리 파르쟈는 엘리자베스의 몸 그리고 하비의 표정과 행동을 매우 정교한 클로즈업 쇼트로 담는다. 일반적으로, 영화에서 클로즈업 쇼트는 인물의 감정을 강조하고 긴장과 집중을 유발하며 특정 피사체에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는 동시에 영화 속 분위기나 감정적 톤을 끌어낸다.

<서브스턴스>에서는 극 중 하비가 엘리자베스에게 폭언을 일삼는 순간마다 나타나는 클로즈업 쇼트를 예로 들 수 있겠다. 이때 감독은 큰 화면 안에 두 사람의 얼굴을 교차함으로써 하비와 엘리자베스 사이에 암묵적으로 형성된 ‘말하는 이의 역할’과 ‘듣는 이의 역할’을 대비시킨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상대적 강자의 폭력성과 상대적 약자의 무력감을 시각화하는 효과를 거둔다.

또한, 엘리자베스가 라운지바를 찾는 신에서 감독은 엘리자베스의 늘어진 피부와 주름진 얼굴에 주목한다. 그것은 엘리자베스의 화려한 치장과 대비됨으로써 중년 여배우가 현실에서 느낄 미적 한계를 가감 없이 드러낸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엘리자베스의 적나라한 육체를 바라보는 관객들은 그를 연민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아름다움을 폄훼하는 데 동참하게 된다. 

이는 감독이 클로즈업 쇼트로 관객들의 관심을 늙은 육체에 집중시킴으로써 순간적으로 그들의 도덕성을 마비시키는 효과를 낳고, 이를 통해 젊음과 아름다움을 강요하는 폭력성이 얼마나 일상적으로 자행되는지를 관객들 스스로 깨닫게 한다.

한편, <서브스턴스>에서 클로즈업 쇼트만큼 눈에 띄는 것이 느린 화면 즉, 슬로우 모션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슬로우 모션으로는 극 중 엘리자베스와 하비의 식사 장면을 꼽을 수 있겠다. 여기서 감독은 하비가 새우 요리를 우악스럽게 소스에 찍는 순간이나 그것을 게걸스럽게 먹어 대는 순간 등을 느린 화면으로 편집한다. 이는 하비가 엘리자베스 앞에서 젊음과 아름다움에 대해 떠들어대는 상황과 대비되면서 한 사회에서 당연한 듯 강요하는 미적 기준이 사실은 얼마나 추하고 터무니없는 것인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이와 같은 클로즈업과 슬로우 모션은 지극히 기초적인 촬영 방식이자 편집 기법이지만 영화 <서브스턴스>에서는 그 효과가 가시적으로 드러난다. 즉, 극 중에서 엘리자베스의 시선으로 포착되는 폭력의 교묘함을 효과적으로 시각화하고, 그것이 한 사람에게 끼치는 사태적 심각성을 효율적으로 표면화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코랄리 파르쟈는 <서브스턴스>에서 우리의 일상 가운데 교묘히 드러나는 폭력의 순간을 빈번한 클로즈업과 느린 화면으로 담아내 그 추악함을 포착하는 동시에 폭력성이라는 장르적 에너지를 구축해 나간다.

 

3. ‘올리’에서 탈출한 경이로운 연기

이렇게 겉으로는 보수적 젠더성이라는 틀 안에 갇혀 있는 듯했던 <서브스턴스>는 클로즈업과 슬로우 모션 기법으로 장면마다 상황적 역설을 만들어 내고, 그것은 한 여성이 괴물로 변모하며 현실의 한계를 향해 진격하는 에너지로 발산된다. 이 과정에서 엘리자베스로 분한 데미 무어의 연기는 그야말로 경이롭다. 

지금까지 데미 무어는 상업영화계의 스타 시스템에서 탄생한 개성파 연기자(personality actor) 정도로만 여겨져 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도 그럴 것이, 대부분의 영화 속 캐릭터가 <사랑과 영혼>(1990)의 올리에서 크게 벗어난 적이 없었고, 그 때문에 올리는 데미 무어의 스타 페르소나로 인식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그랬던 데미 무어가 <서브스턴스>에서는 기존에 자신에게 강제됐던 연기자로서의 정체성과 개성을 완벽히 깨부수고 엘리자베스 스파클 그 자체가 된다. 

특히, 이 영화에서는 엘리자베스가 ‘물질’로 인해 강제로 급격히 노쇠하게 되므로, 데미 무어는 배우로서 폭이 넓은 연령대를 연기하고, 무자비한 폭력성까지 갖추어야 했기에 데미 무어로서는 큰 도전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럼에도 데미 무어는 <서브스턴스> 안에서 평소 자신이 지니고 있던 육체적, 정신적 특성을 제거하고 오롯이 작중 인물인 엘리자베스가 되어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충격적인 연기를 선보인다. 

이러한 데미 무어의 연기 덕분에 <서브스턴스>는 그 영화적 장르성 또한 정밀하게 구축될 수 있었고, 그 결과 영화사상 전무후무한 여성괴물 캐릭터가 설득력을 얻을 수 있었다. 

 

 

글·윤필립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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