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협상 과정에서 주도권을 쥔 채, ‘시간 끌기 전략’을 통해 군사·외교 양면에서 자신의 구상을 관철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프랑스 <르몽드>는 최근 “모스크바는 전장에서 공세를 지속하면서도 외교 협상에서는 겉으로만 양보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며 실질적으로는 주도권을 강화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가짜 양보’와 ‘시간 끌기’ 전술
푸틴은 지난 3월 말, 우크라이나를 유엔 산하 ‘과도 행정’ 아래 두고 선거를 치른 뒤 평화 협상에 나서자는 구상을 내놓았지만, 이는 실질적인 양보라기보다는 협상 지연을 위한 정치적 수사에 가깝다는 평가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러시아가 일부러 질질 끌고 있다”고 인정했지만, 여전히 협상 주도권을 쥐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다.
협상 과정에서 미국과 러시아는 여러 차례 별도의 보도자료를 내며 진전을 알렸지만, 실상은 내용이 크게 달랐다. 예컨대 에너지 기반시설에 대한 정전 발표나 흑해 휴전과 같은 내용은 미국 측은 성과로 강조했지만, 러시아는 제한 조건과 시한을 붙이며 의미를 축소했다.
비대칭적인 협상 구도
<르몽드>는 “두 협상 당사자는 본질적으로 비대칭적인 위치에 있다”고 분석한다. 전쟁 당사국이 아닌 미국은 우크라이나를 대변하는 듯 행동하지만, 실상은 자국 이익과 대통령 개인의 정치적 성과에 더 큰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푸틴은 20년 넘게 외교·정보전 분야를 이끌어온 노련한 측근들을 전면에 내세우며, 국제 협상 경험이 부족한 트럼프 대표단을 압도하고 있다.
유럽 고위 외교관의 말을 인용해 <르몽드>는 “트럼프는 평화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방해가 되지 않기를 원할 뿐”이라며 냉소적인 시각을 전했다.
협상의 본질은 유럽 배제와 경제적 목적
<르몽드>는 푸틴이 협상을 통해 유럽을 새로운 ‘희생양’으로 만들고 있다고 지적한다. 과거 미국의 ‘꼭두각시’로 조롱했던 유럽연합은 이제는 러시아 측 언론과 정치권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의 주된 배후세력’으로 지목되고 있다.
미국과의 협상에서 철저히 배제된 유럽은, 푸틴의 전략 속에서 책임 전가의 대상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러시아는 농산물·비료 수출에 대한 제재 해제를 요구하며, 자국 농업은행인 로셀호즈방크(Rosselkhozbank)의 국제 결제망 SWIFT 복귀를 주장하고 있다. <르몽드>는 이러한 요구가 실상 존재하지 않는 제재를 빌미로 한 정치적 압박이라고 설명했다.
푸틴의 최우선 목표는 ‘승리 이미지’ 확보
푸틴은 오는 5월 9일 열리는 제2차 세계대전 승전 기념 퍼레이드에서 ‘우크라이나에서의 첫 승리’를 내세우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르몽드>는 “푸틴은 2036년까지 장기 집권이 가능한 만큼 서두를 이유가 없으며, 전략적 주도권을 유지한 채 전선과 협상장을 동시에 활용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결국 이번 협상에서 푸틴은 트럼프를 자신의 외교 전략에 동원된 하나의 도구로 활용하며, 유럽을 희생시키는 방식으로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키고 있다는 것이 <르몽드>의 결론이다. 평화를 위한 실질 협상보다는 정치적 명분과 전술이 앞서는 냉혹한 현실이 드러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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