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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미의 문화톡톡] 다시 만난 세계
[장윤미의 문화톡톡] 다시 만난 세계
  • 장윤미(문화평론가)
  • 승인 2025.04.14 14: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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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얼마나 동물적입니까

인간은 동물인가, 라는 질문에 ‘인간은 동물이 아니다’라고 대답한다면, 그건 아마도 인간의 특징에 방점을 두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를테면 인간은 동물과 달리 언어를 사용한다는 점, 윤리적인 판단을 할 수 있다는 점, 정치적인 존재라는 점 등등 말이다. 동시에 이런 이유는 인간은 동물보다 뛰어나다는 주장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단지 이러한 차이를 이유로 인간은 동물이 아니라고 말하는 건 곤란하다. 어떤 존재의 고유한 특징이 다른 존재보다 우월하다는 주장의 근거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인간은 다른 존재와 자신을 비교할 때 고유한 특징을 우월성의 근거로 삼아 타자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 익숙하다. 당신도 나도 예외는 아니다.

역사적으로 인간은 집단, 공동체, 나아가 국가를 꾸려나가는 데 필요한 것을 차지하는 행위를 선/쟁취라고 명명했고, 이를 방해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악/약탈로 규정하며 응징과 처벌을 정당화해왔다. 이때 쟁취와 약탈이냐, 우월과 열등을 규정하는 건 오로지 인간의 이해관계 아래서 판단되었고, 시공을 초월하며 이러한 과정의 반복은 인간이 다른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을 만드는 데 거대한 무의식으로 작동하였다. 그렇게 만들어진 세계를 우리는 인간세계, 또는 문명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여기, 인간중심적인 이해관계를 부정하고 다른 세계와의 동등한 조우를 위해 자신의 몸을 기꺼이 던진 사람이 있다.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세계라 불리는 자연, 그리고 그 세계에서 가장 힘이 세고 폭력적인 존재로부터 ‘공격’받은 사람,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난 것도 잊고 또다시 야만의 세계에 들어가서는 존재와 존재 사이에 놓인 경계를 허물고 그와 공명하기 위해 도모한, ‘조금’이라고 하기엔 ‘아주’ 특별한 사람이다.


동물과 동물이 만나다

야수를 믿다의 작가 나스타샤 마르탱은 프랑스 출신 인류학자로 시베리아에 거주하는 원주민 에벤인을 연구하던 중 캄차카 반도에서 곰의 습격을 받는다. 다리를 뜯기고 얼굴은 인공 턱을 삽입할 만큼 크게 다쳤지만, .나스타샤는 이 사건을 계기로 자연과 야생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얻게 된다.

치료를 위해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그녀가 줄곧 느낀 감정은 인간과 비인간 사이에서 발생하는 일방적인 폭력성에 따른 불쾌함이었다. 인간세계 입장에서 그녀와 곰과의 사투는 단지 문명과 야생의 경계를 넘다 겪은 비극적 사건에 불과했고, 이 결과로 얻은 상처투성이 신체는 ‘야생의 몸’에서 ‘문명의 몸’으로 회복될 때까지 구속받고 통제받아야 하는 치료의 대상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이다.

 

나스타샤 마르텡, 야수를 믿다, 비채, 2025.
『야수를 믿다』, 비채, 2025.

야생과 문명의 경계선에서 혼란스러워하는 나스타야 앞에서 에벤인 안드레아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그는 곰과의 사투는 경계과 경계의 만남이라고 정의하고, 곰이 그녀의 몸에 남긴 상처는 치료의 대상이 아니라 경계를 허무는 표식이라고 말한다. 그는 나스타샤를 가리키며 ‘미에드카’라고 불렀는데, 이 말은 에벤인 어로 야생의 동물(여기서는 곰)과 조우하고 살아남은 표식을 받은 사람을 지칭하는 단어로 이를테면 경계와 경계 사이에 존재하는 자, 혹은 경계를 무너뜨린 자라는 뜻을 담고 있다.

결국 나스타샤는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다시 야생의 세계로 진입해야 한다고 결심하고 기꺼이 사고 지점으로 돌아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물론 그녀를 보며 많은 사람은 이해할 수 없다며 말리기도 했고, 심지어 비웃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러한 시선에 별로 괘념치 않다. 그녀의 목적은 분명하고 또 확실하기 때문이었다. 바로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고, 그 세계와 공명하기.

인간은 타자에게 드러내는 자신의 폭력성을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데 익숙하다. 자연을 정복한 것을 두고 문명이라 말하고, 타자를 억압하는 것을 두고 법과 질서라 규정하며, 이를 방해하는 일체의 행위를 야만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이 야만에 가하는 폭력을 처벌 또는 응징이라고 천명한다.

인간이 만들어낸 문명은 자연보다 훨씬 나중에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다른 동물보다 우월하다는 이유로 자연의 질서과 규칙을 미개와 야만이란 이름으로 그야말로 ‘쑤셔’ 넣는다. 통제할 수 없는 자연, 정복할 수 없는 자연은 야만의 세계로 규정하고, 야만의 세계에 사는 동물은 야수라 부르며 인간의 세계를 넘어오지 못하도록 막고, 넘을 경우 침입으로 간주하며 박멸하는 것에 모든 에너지를 쏟는다. 인간이 통제하지 못하는 세계란 없는 세계이거나 존재해서는 안 되는 세계다.

그 결과 인간의 세계는 확장되었고, 차지하는 공간은 넓어졌다. 통제 가능한 자연은 언제든지 사용 가능한 무한자원이 되어 착취되었고, 힘이 약한 국가는 개발이란 명분으로 식민지화되었다. 그러면서 합리화한다. 자연은 우리에게 아낌없이 모든 것을 주는 존재라고, 자원 개발은 문명의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세계와 세계가 만난다는 건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는 행위가 아니라 상대의 세계를 상대 위치에서 이해하고 수용하는 행위라고들 침이 마르게 외치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점점 늘어간다고 하지만, 이상하게도 자연만큼은 늘 예외로 두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아마도 그 배경에는 자연/야만/비인간 세계는 열등하다는 인간의 무의식이 가로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인간은 변화와 적응에 빠르지만, 자연은 느리다. 천천히 적응하고 천천히 변한다. 결국, 서로 다른 속도는 인간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착취하고, 자연은 끊임없이 착취당하도록 만든다.

자연 아래 모든 변화에는 순서가 있고, 순서에 따라 인과 관계가 결정되게 마련이다. 그리고 이 과정이 오랜 시간을 거쳐 축적되다 보면 고유한 특성이 되고 존재 방식이 된다. 그러나 인간은 이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인정하지 않는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때까지 요구하고 재촉하고, 안되면 파괴한다. 공명할 수 있는 틈조차도 인간의 폭력으로 아무렇지 않게 무시당했다.

경계는 금기의 선이 아니라 다른 존재가 있음을 선언하는 선인이자, 존중받아야 하는 선이다. 경계를 넘고 싶다면, 무엇보다 우선시 되어야 하는 건 경계 넘어 존재하는 일체의 것을 그 자체로 인정하고 존중하며 소통하려고 애쓰고자 하는 마음과 태도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인간에게 그런 여유란 없거나 있다고 해도 알량하다고 말할 수준에 불과하다.

나스타샤가 강조하고 또 강조하는 건 세 가지다. 바로 균형, 화합, 그리고 공명이다. 그녀는 곰이 자신의 신체에 남긴 상처를 통해 이 진리를 깨닫는다. 그녀는 자신이 겪은 사건을 두고 “캄차카 반도의 산 어딘가에서 곰 한 마리가 프랑스 인류학자를 공격한 것이 아니다. 사건은 곰 한 마리와 한 여자가 만나고 세계의 경계가 파열한 것이다.”라고 표현한다.

이러한 표현을 두고 두 존재 간의 경계가 무너져 생긴 결과가 어떨지 충분히 예상 가능하다고 확신한다면, 그건 어디까지나 인간 중심의 편협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가능성이 크다. 이를테면 야만적인 곰이 그녀를 공격‘했다고 말하거나, ‘야수의 폭력에 희생당했다’고 말하며 야생의 세계를 비난하는 것과 같다.

나스타샤는 이 말을 적극적으로 부정한다. 그녀에게 세계와 세계가 만난다는 건, 한 세계가 다른 세계를 만나, 하나의 세계가 다른 세계를 정복하여 유일하고 강력한 세계를 만드는 뻔한 행위가 아니라, 나와 상대가 어떤 결정을 하고 어떤 행위를 하며 어떤 위치와 지위에 있을지 전혀 예상할 수 없어 ‘불확실성’이 연속되어 복잡하지만 그럼에도 그 자체로 가치 있고 의미가 있어 유쾌한 경험이기 때문이다.

다른 세계를 만나기 위한 ‘애티튜드’

누구도 믿을 수 없고 동맹과 적 수시로 바뀌는 세상에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본주의가 탄생한 이후로 인간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최대 이익을 최고의 선이라 믿고, 국가들은 정치적, 경제적 갈등을 해소한다는 명분으로 전쟁을 합리화 한다. 그 사이 지구는 병들었고, 자연은 극단적으로 오염되었다. 이웃 간의 경계, 민족 간의 경계, 국가 간의 경계는 금기의 영역이 아니면 침범의 영역이 되어 폭력과 착취를 정당화는 모습은 지금도 지구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럴수록 우리게 필요한 건 나와 다른 존재를 향한 믿음과 신뢰, 이해와 표용이다.

오로지 하나의 세계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극단적인 요즘 그 어떤 것보다 또 다른 세계가 필요하다. 그 세계를 만나 공명하고 싶다는 너른 마음이야 말할 것도 없다.

 

 

글·장윤미
소설가 겸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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