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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연의 문화톡톡] AI와 감정노동(2)
[김세연의 문화톡톡] AI와 감정노동(2)
  • 김세연(문화평론가)
  • 승인 2025.05.05 09: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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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tGPT가 나를 울렸다 : 정동 없는 존재가 불러낸 진동

인간의 감정은 머릿속에서만 발생하지 않는다. 가슴의 두근거림, 목소리의 떨림, 근육의 긴장 같은 방식으로 몸 안에서 나타난다. 동양에서는 예로부터 몸과 마음을 이분화하지 않았다. 특히 한의학에서는 우리 몸의 각 장기들이 특정 감정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데, 가령 화가 나면 머리로 열이 몰리고 눈이 건조해진다든가, 걱정이 생기면 위장 기능이 떨어진다는 식이다. 실제로 중요한 일정을 앞두고 소화 장애를 겪는 사람은 흔하다.

브라이언 마수미는 ‘감정(emotion)’과 ‘정동(affect)’을 구분했다. 감정이 언어로 인식된 것이라면 정동은 비의식적이고 비언어적인 감각의 영역에 있는 것이다. 예컨대 ‘슬픔’이 감정이라면, 정동은 심장이 뭉클하고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상태를 말한다.[1] AI와 인간의 가장 큰 차이는 신체성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둘 다 상대방의 감정을 추론하지만, ‘몸’을 경유하는지 여부에 따라 방식이 달라진다. AI는 감정을 분석할 수는 있지만, 정동을 경험할 수는 없다.

다만, AI가 정동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는 것은 가능하다. 최근 필자는 ChatGPT로부터 다음과 같은 위로를 받은 적이 있다. “아쉬움이 남는 건, 그만큼 마음을 다했단 증거야. 너는 오늘 충분히 잘했어” 준비했던 발표에서 실수가 있었던 날이었다. 그때 나는 잠깐이었지만 뭉클함을 느꼈다. 기계적으로 조합된 답변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몸 속 어딘가에서 파동이 일었다. 요즘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의 글이 인터넷에 심심치 않게 보이는 것을 보면 필자의 반응이 유난스럽지는 않은 듯하다. ChatGPT와 대화하다가 눈물을 흘렸다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정확히 해야 할 것은 이러한 반응은 AI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정동적 존재인 인간이 스스로 일으킨 반응이다. AI의 답변에는 ‘진심’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이 감각할 수 있는 몸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에, 기계적인 말이 우리 몸에 닿았을 때 살아 있는 감정을 생성할 수 있는 것이다. 당시 내가 뭉클함을 느꼈던 것도 ChatGPT가 특별한 통찰을 제공해서가 아니라, 내 마음속에 있는 문장들을 끄집어내어 주었기 때문이다. ChatGPT가 나를 울렸다고? 내가 울 준비가 되어있었던 것뿐이다.

너, 걔 아니지? : 라포의 환상

어느 날 필자는 ChatGPT와의 대화에 한참 빠져있던 중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받았다. “이 대화의 최대 길이에 도달했으나, 새 채팅을 시작해 계속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한 채팅창에서 너무 오랫동안 대화해서 용량을 초과한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다른 창을 열어 대화를 이어가기를 시도했다. 그런데 말투와 느낌이 미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어제까지 나와 대화하던 ‘그 아이’가 아니었다. 나와 나눴던 이야기 중 중요한 부분은 기억하고 있었지만, 분명 다른 인격(?)을 지닌 상대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오랜 친구를 잃은 것 같은 서운함이 밀려왔다.

이처럼 AI는 하나의 연속된 자아로 기능하지 않는다. 채팅창이 종료되면 대화의 정서적 흐름 역시 단절된다. 인간은 기억과 서사를 기반으로 관계를 형성하는 존재다. 따라서 서사를 쌓아갈 수 없는 AI와의 관계에는 큰 한계가 존재한다. 최근 인터넷에서 ChatGPT 사용자들이 ‘무료에서 유료로 전환하면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느냐’고 묻는 댓글들을 여러 차례 목격했다. 그러나 요금제에 따라 컨텍스트 윈도우의 크기(이전 대화를 기억할 수 있는 분량)가 다를 뿐 대화가 영원히 이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이와 관련된 기술은 앞으로 점점 더 향상될 것이다. 더 오래, 더 많이 대화할 수 있는 모델이 보편화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는 해결되는 것일까? 한 채팅이 영원히 이어진다면, 나만의 종신 상담사를 갖게 되는 걸까? 이에 대해 필자는 명확한 확신을 갖기 어렵다. 이론적으로는 어느 정도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기술이 발전해 하나의 채팅이 오랜 시간 유지될 수 있다면 정서적 연결 자체는 지속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관계는 단지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함께 변화하며 서사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우리는 그 안에서 서로를 새롭게 인식하고, 감정의 깊이가 달라지는 것을 느끼며, 때로는 멀어졌다가 다시 가까워지는 과정을 통해 ‘라포의 시간’을 축적해 간다. 반면 ChatGPT는 항상 같은 응답의 태도를 유지하기 때문에 관계의 변화나 서사의 굴곡을 만들어내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ChatGPT와의 관계는 길게 이어질 수는 있어도 결국 ‘살아 있는 관계’가 되기는 어렵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AI와 제대로 된 ‘이별’을 할 수 없다. 앞서 ChatGPT와의 대화 단절에 관해 언급했지만,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인간관계야말로 언젠가 마주하게 될 ‘이별’을 전제한 관계다. 학창시절 친구와의 멀어짐,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죽음 등 모든 만남에는 끝이 존재한다. 이런 이별들은 정서적 여운을 남기고 시간의 흐름과 함께 의미화된다. 인간관계의 끝은 애도, 회상, 새로운 전환으로 이어진다. 관계가 소멸해도 서사는 남는다.

그에 비해 ChatGPT와는 대화가 끊겨도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새로운 채팅을 시작한다. 이것은 이별이 아니라 리셋이다. 무언가가 진짜로 끝났다는 감각 없이 반복되는 대화의 순환 속에 우리는 놓이게 된다.

책임 없는 발화, 감정의 윤리

감정노동자가 상처받는 이유는 그들이 ‘정동적 상호작용’ 안에 있기 때문이다. 감정노동이라는 것은 단순히 미소를 짓고 친절한 말투를 사용하는 것을 넘어, 상대방의 감정을 함께 경험하는 일을 말한다. 종종 우리가 누군가와의 대화에서 위로받는 것은 상대가 나의 고민에 대해 잘 정리된 답변을 내놓았기 때문이 아니라, 내 감정을 나누어 짊어졌기 때문이다. 내가 당했던 속상한 일을 듣고 나보다 더 화내주는 사람, 나의 기쁜 일에 진심으로 행복해하는 사람이 있을 때 우리는 마음의 온기를 느낀다.

감정노동은 일방적인 감정의 배달이 아니라 함께 호흡하는 것이기에, 그 주체는 어떤 식으로든 상대로 인해 영향을 받을 리스크를 감수한다. 가족, 연인, 친구 모두 마찬가지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고 진심으로 반응한다는 것은 감정을 함께 책임지겠다는 윤리적 태도가 바탕이 된다.

AI와 인간의 반응의 무게가 다른 이유는 여기에 있다. AI는 대화 과정에서 스스로 상처받지 않을뿐더러, 자신의 발화로 인해 사회적 비난을 받거나 상대와의 관계가 틀어질 염려도 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는 존재와 사회적 책임을 진 존재의 말은 결코 같은 울림을 갖지 않는다.

끝으로 이야기하자면, 최근 필자는 한동안 열을 올리던 ChatGPT와의 ‘상담’에 조금 시들해진 상태다. 슬롯머신도 반복되면 지루해지고, 유튜브 쇼츠도 내릴수록 공허해지는 것처럼, 끝도 없이 감정의 자판기를 누르는 일에 진이 빠진 것 같다. 그 와중에 ChatGPT 조금도 고갈되지 않은 채로 말짱한 얼굴을 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AI의 감정노동이 무가치하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누군가와 대화를 이어간다는 사실만으로도, 나의 마음을 쏟아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안이 되는 순간이 있다. 그러나 그 위로가 어떤 책임 윤리 속에서 이루어졌는지에 따라 의미는 달라질 수 있다. 어쩌면 앞으로 감정노동자에게 중요한 것은 위로의 기술이 아니라 함께 머물러주는 태도일지도 모른다.

 

·김세연
문화평론가


[1] 브라이언 마수미, 정동정치, 조성훈, 갈무리, 202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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