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예술이라는 말을 예술작품과 상관없이도 가끔 사용한다. “맛이 예술이야” “경치가 예술이야” “그 사람 예술이야” 와 같이 감동을 주는 순간, 사람들은 그것을 '예술 같다'고 표현하며 감정을 높이는 수사로 사용한다.
왜 최고의 것을 '예술'에 비유하게 되었을까?
예술은 인간의 감정과 창의성, 기술이 집약된 최고의 표현이기 때문이 아닐까? 역사적으로 예술은 단순한 기능을 넘어서 영감을 주고, 감탄을 자아내며, 인간 정신의 정수를 담는 행위로 인식되어 왔다. 완벽함의 상징이나 추구로서 예술의 속성은 예술 작품을 만들고 다듬는 과정과 결과물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다. 그래서 예술은 어떤 의미에서 완성이 없고 완전함이 없다고도 말한다. 이는 결과물이 최종 완성이 아니라 아직도 완성을 향해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입장에서도 각각 다양한 해석과 관점을 통해 이해하고 인식한다. 작품에 대한 공감이나 의외의 감동, 독특하거나 기발한 것에 "이건 예술이야"라고 말하며 최고의 찬사를 표현하기도 한다.
사실 예술이 예술자체로 만이 아니라 삶 자체에 예술적인 가치, 예술적인 심리적인 태도를 가지고 살아간다면 정말 ⸲”삶이 예술“일 것이다. 예술의 생활화, 생활의 예술화라는 말처럼 삶 자체를 가치있게 만들어가는 것은 그 사람의 심리적 태도이며 풍부한 삶의 영위를 물질적인 것에서만이 아니라 정신적, 심리적인 차원에서 추구하는 것이다. 삶의 공식이 아니라 예술적 속성을 통해 사물을 다양한 각도로 관찰하고 인식한다면 거기에서 영감을 얻기도 하고 배우기도 하며 나아가 위로를 받기도 할 것이다. 인간 삶에서 예술의 기능 중 하나는 삶에 대한 다양한 가능성에 대한 인식을 갖게 하는 영적인 에너지를 발생시키는 정신적인 힘이며 삶을 대하는 성숙한 태도를 가지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술의 본래 가치와 ‘생활 속 예술’은 단순한 작품을 넘어, 삶을 어떻게 바라보고 살아가는지에 대한 태도를 담고 있기도 하다. 예술의 생활화는 일상 속 작은 순간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예술적 감각으로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드는 것, 사소한 활동에서 창의성과 미적 감수성을 느끼는 심미적 태도를 담고 있다. 생활의 예술화 또한 일상 자체를 하나의 작품처럼 대하며, 자기만의 철학과 미학을 통해 삶을 설계하는 것, 반복되는 일상에서도 새로운 아름다움과 가치를 발견하려는 노력이며 이러한 맥락에서는 "예술"이 존중과 자기 성찰을 담은 의미로 인식된다.
예술을 특정 분야(미술, 음악 등)만의 것이 아니라, 일상 속으로 확장시켜 나가려는 사람들의 요구는 현대 사회의 빠른 속도, 삶의 방식의 변화, 디지털 사회가 가져온 탈 인간화, 인격보다는 기술이 중요시 되는 포스트휴머니즘 등의 현상들이 주는 혼란함, 그리고 인간의 정체성이 수치화되고, 알고리즘 효율로 축소되며 인간적 요소가 무시되는 현대의 현상에서는 더욱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다. 삶의 모든 순간을 아름답고 조화롭게 꾸려내는 태도, 단순한 기능성을 넘어 창의적이고 감각적인 삶을 지향하는 것은 일본의 ‘도(道, 미학적 수행)’ 개념이나, 유럽에서 강조하는 아르스 비벤디(ars vivendi, ‘삶의 기술’) 같은 철학과도 연결된다. .예술이라는 표현의 양면성, 즉 감탄과 존중을 담을 수도 있고, 조롱과 비판의 의미도 가질 수 있는 것 처럼 예술은 삶과 밀접하게 연결된 개념이고, 사람들이 예술을 대하는 태도도 그 만큼 다양하다.
예(藝), 법(法), 도(道)
생활이 예술화의 좋은 사례 중 하나는 문자라 생각된다. 문자는 글과 언어를 표현하는 수단이고 소통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을 뿐 아니라 문자의 고유한 기능을 초월해 그 자체가 예술로서 인정받기도 하기 때문이다. 문자를 이용한 시나 소설은 예술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왔고 언어나 문자가 없는 생활을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인간의 삶과 함께하며 인류의 역사와 문화를 주도적으로 이끌어 왔다. 특히 동양문화권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서예(書藝)는 전통예술로 우리나라뿐 아니라 동아시아 삼국(중국, 일본, 한국) 모두에서 공통된 뿌리를 가지고 있다. 역사적으로 선비나 귀족은 기본적으로 서예와 그림을 즐겼고 그것이 그들의 지위와 가치, 신분, 정체성을 확인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한.중.일 삼국은 서예를 문화적 가치관과 역사적 흐름에 따라 각각 독자적인 의미와 명칭으로 발전해 왔다. 우리나라에서는⸲⸲서예(書藝)”라고 하지만, 중국은 서법(書法), 일본은 서도(書道) 라고 한다.
왜 서예를 각기 다르게 받아들이고 각기 다르게 명명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배경과 가치관의 차이에 대해 하영삼 교수는 논문 「서예의 개념과 명칭에 관한 고찰」에서 서예를 지칭하는 용어—‘서예(書藝)’, ‘서법(書法)’, ‘서도(書道)’—의 의미와 그 차이에 대해 분석하고 각 용어가 강조하는 측면과 문화적 배경에 관해 연구한 내용이 흥미롭다.
중국의 ‘서법’(書法)은 글자의 법도, 규범의 예술로 문자 그대로 ‘글씨를 쓰는 법칙’이라는 뜻으로, 형식과 규범을 중시했다. 중국은 한자 문명의 본산으로, 문자 자체의 형식적 정확성과 규범성에 큰 가치를 두고 있다. 한나라부터 당나라, 송나라에 이르기까지 서체(예서, 해서, 행서, 초서 등)의 발전은 제도와 권위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며 서법은 단순한 예술이 아니라 수신(修身)과 정치적 교양의 상징이었고, 유교적 이상인 ‘인격 수양’과 일치한다. 서법은 지식인의 품격과 도덕성을 반영하는 도구로의 가치관을 반영한 것이며. 질서, 구조, 정통성, 규범을 중심에 두고 형(形)보다 법(法), 미(美)보다 의(義)를 더욱 큰 가치로 인식했다.
일본의 ‘서도’(書道)는 글씨의 도(道), 수행의 길로써 선(禪)적 수행과 예술적 몰입을 강조하는 개념이다. 일본은 중국 문화를 받아들이면서도 독자적인 도(道) 사상을 발전시켜 왔다. (예: 무도(武道), 다도(茶道), 화도(花道) 등). 메이지 유신 이후 서예는 ‘정신 수양’의 도구로 재해석되었고, 내면의 집중과 단순함, 정신 통일에 초점이 맞춰졌다. 서도는 예술이라기보다 자기 수양과 수행의 한 방식, 선불교의 영향으로 무심(無心), 비움, 집중, 중시. 절제, 단순함, 형식보다는 마음의 흐름, 가치관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서예’(書藝)는 표현의 영역으로 ‘글씨의 예술’로, 예술성과 감성 표현을 강조하는 개념이다. 고려~조선 시대 유학자들이 서법을 학문과 인격 수양의 일부로 삼았지만, 근대 이후 ‘예술’로 인식되는 전환점을 맞는다. 20세기 초 전통예술에 대한 재조명과 민족예술의 자각 속에서 ‘예(藝)’의 관점이 강조되었고 민족 정체성과 예술 표현의 독립성을 중시하면서, 단순한 규범보다 창의성과 표현력을 부각하는 용어로 자리잡았다. 서예는 단순한 필법이 아닌 감성과 미의식의 표현. 전통 계승과 더불어 창조적 재해석을 허용하고 한국 특유의 정서적 깊이, 한(恨), 여백미의 가치관을 반영하고 있다.

이처럼 같은 뿌리를 공유하는 예술도 언어와 명칭을 통해 각 문화의 가치관이 반영되며 다르게 발전하고 있다.
우리나라 서예의 역사는 한자 문화권의 영향을 받으며 발전해 온 긴 전통을 가지고 있다. 서예는 단순한 문자 기록을 넘어서 예술로 자리 잡았으며, 서예에서 사용된 대표적인 서체들은 대부분 중국에서 유래했지만, 우리 고유의 미적 감각과 철학이 더해져 독특하게 발전했다. 일반적으로 서체는 전서(篆書), 예서(隸書), 사경체(寫經體), 해서(楷書), 행서(行書), 초서(草書), 추사체(秋史體)가 있다. 특히 추사체는 김정희(1786–1856, 조선 후기 서화가)에 의해 창시(創始)되었다. 추사체의 특이한 점은 전서, 예서, 해서, 행서의 요소를 융합하고, 구조는 엄격하면서도 획에는 강약과 리듬이 있는 것이 특징으로 기존 서체의 틀을 깨고 개성적이며 실험적인 미감을 추구하는 한국 서예의 자주성과 창조성을 대표하는 독자적 서체이다.
서예에서 말하는 예(藝)·법(法)·도(道)는 단지 서예에만 해당하는 개념이 아니라 모든 전통예술 혹은 장인 정신이 깃든 예술영역에 걸쳐 공통으로 흐르는 철학적 틀이다. 예(藝)는 기술, 솜씨 등 서예에서는 붓을 다루는 능력, 글자를 구성하는 구조 감, 손의 감각이라면 다른 예술, 즉, 무용은 몸을 쓰는 기본기, 테크닉으로, 음악은 연주력, 발성법으로, 미술은 붓질, 색감 조절, 조형 능력으로, 공예는 칼질, 재료 다루는 능숙함이라 말할 수 있겠다. 법(法)은 규범, 전통의 원리로 서예에서는 서체의 법도, 필법, 구성 원리, 선현들의 고법(古法)을 따르는 것이라면 무용에서는 바가노바 체계(Vaganova Method), 궁중무의 정형화된 형식, 음악에서는 고전 작곡기법, 악보 해석의 규범, 미술에서는 구도법, 비례, 색채의 고전 이론, 공예에서는 도자기 굽기, 목공의 전통 규칙 등이라 말할 수 있다. 도(道)는 궁극의 정신과 철학으로 서예에서 도는 글씨를 넘어선 정신 수양과 예술적 경지라면 무용에서는 몸의 움직임을 통해 정신을 드러내는 내면의 수양, 음악에서는 소리를 통한 마음 전달, 수행 같은 연주, 미술에서는 붓을 들기 전에 마음을 닦는 수행, 공(空)의 미학, 무예에서는 기술을 넘어서 인격 수양으로 가는 무도의 길이라 말할 수 있겠다. 즉, 예는 손과 몸의 훈련(기술), 법은 전통과 형식의 이해(이론), 도는 예술을 통한 깨달음(철학)으로 서예뿐 아니라 전통예술 전반에서 예→법→도를 향한 수련과 깨달음의 흐름은 공통된 구조이다.
무용에서 예는 “어떻게 몸을 움직이는가?” (기술)의 문제이고 법은 “그 움직임은 어떤 맥락과 규범 안에 있는가?” (형식)의 문제이며 도는 “그 춤을 통해 나는 무엇을 말하고, 나는 누구인가?” (철학)의 문제이다. 무용은 언어가 없는 예술이지만, 이 예·법·도의 층위를 따라 몸이 곧 언어가 되고, 예술이 철학이 되는 과정이며 결과이다.
현대 예술에서도 이러한 구조가 은근히 유지되며, 장르를 막론하고 이 "예·법·도"를 품고 있다. 무용 분야에서의 예(藝)·법(法)·도(道)는 몸을 매체로 삼는 기술적 수련과 신체 감각, 그리고 정신적인 성숙이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춤을 잘 추기 위한 기술적 능력과 신체 훈련. 무용 장르마다 내려오는 형식, 구조, 움직임의 규범, 무용의 정중동(靜中動), 삼박자 구조 등, 무작정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이 아닌, 질서와 맥락 안에서 표현하는 방식이다. 춤이라는 행위를 통해 삶, 자연, 인간 존재에 대한 사유에 다가가는 경지이며 ‘춤을 잘 추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춤 그 자체로 살아가고, 깨닫는 삶의 길이 되는 것이다.
생활이 곧 예술
우리가 생활 속에서 무심히 지나쳤던 사소한 현상이나, 습관처럼 익숙해서 소홀했던 많은 것들이 이미 우리의 무의식 속에 유전되어져 역사와 전통과 예술의 예,법,도의 실체를 나도 모르게 머금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가끔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시켜주고 문득문득 생활 속에서 아무렇지 않게 드러나기도 한다. 다만 몸에 밴 습관처럼 특별하지 않게 여기고 있을 뿐이며 너무나도 당연해서 우리가 굳이 의식으로 끌어내지 않고 있을 뿐일지도 모른다.

생활의 예술화는 사실 우리 민족의 속성 중 하나이다. 우리나라처럼 “생각이 예술”인 민족이 또 있을까? 고됨을 희망으로 희석하고, 부조리를 풍자와 해학이라는 높은 수준의 표현으로 공유하고, 현재보다 다음 세대에 대한 기대를 품고 사랑이라는 이름의 희생도 기꺼이 겪어낸 민족, 그 힘든 고비 고비에 서로의 입장이 위로되어, 내가 아닌 우리로 살아온 민족. 그뿐인가 길가의 흔한 풀잎으로도 악기를 만들고 노랫가락으로 호흡을 맞추며, 나무젓가락으로도 훌륭한 연주를 할 수 있는 민족, 잘하기 때문이 아니라 할 수 있으니 하게 된 노래와 춤으로 공감하고 소통할 수 있는, 그래서 서로 의지가 되어 역경을 극복할 수 있는 내공을 가진 민족, 외유내강의 문화를 만들어내고 생활 곳곳에 예술의 개념과 의미가 배어 있는 우리의 삶, 그런 문화를 구축하고 그 문화가 정체성인 민족. 바로 그 자체의 삶이 예술이 아니겠는가.
“삶이 예술”인 우리의 본질, 그 예술적 삶이 우리의 정체성임을 잊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글·이인숙
문화평론가, 교육학박사, 문화예술경영전공. 현재 청주대학교 영화영상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북경수도사범대학교과덕대학 공연예술대학부학장역임, 한국ESG위원회 공연예술위원회 위원장, 한국연기예술학회이사, 국제문화예술교육교류협회회장, EINSchool이사, 국제문화&예술학회 국제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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