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젤라(일린카 마놀라케)가 다국적 기업의 산업 안전 홍보 영상 출연 지원자로 만나게 되는 네 번째 인물을 보자. 그를 비추는 첫 바스트 쇼트에서 우리는 그의 얼굴에 난 커다란 흉터를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이 산업재해의 흔적이라 생각할 때쯤 그를 비추는 넓은 쇼트로 넘어가며 산업재해가 그에게 가져다준 것이 얼굴의 흉터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휠체어에 앉아 있는 이 남성은 아마도 하반신을 당분간 혹은 영원히 움직일 수 없는 것 같다. 이때 안젤라는 그 지원자를 스마트폰으로 촬영하며 묘기를 보여 달라고 하고 그가 휠체어 앞을 들어 올려 묘기를 보이자 옆에 있던 다른 남성이 말을 한다. “아까 말했듯 (휠체어에 탄 이 친구는) 말을 못 합니다.”
<지구 종말이 오더라도 너무 큰 기대는 말라>(이후 지구 종말)가 루마니아의 현실을 담아내는 방식은 위 장면처럼 마트료시카를 열듯 순차적으로 영화가 지닌 레이어를 공개하는 것은 아니지만, 처참한 노동 환경이라는 얼굴 흉터를 중심으로 출산부터 죽음까지 상품화하는 자본주의의 현실을 보여주거나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국가 시스템으로 재난과 같은 사망자를 낸 도로에 관해 말하거나 더 나아가 공산주의 독재를 겪었던 루마니아의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흑백과 컬러, 필름과 디지털을 거칠게 연결하여 역사성까지 다루는 다층의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얼굴만을 비추는 타이트한 쇼트에서 점점 시야를 넓힐수록 더 큰 피해와 그로 인한 장애를 확인할 수 있었던 것처럼, <지구 종말>이 다층적 요소에서 하나씩 꺼내놓는 것들은 대부분 고통스럽고 슬픈 현실의 단면들이다. 예컨대 산업재해로 얻은 장애로 일을 할 수 없어 돈이 필요해진 피해자가 사고의 원인을 기업과 시스템이 아닌 개인에게 전가하는 기업 안전 홍보 영상에 지원하는 상황도 끔찍하지만, 그 지원자를 모으는 일을 하는 프리랜서인 주인공 또한 초과근무로 교통사고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영화는 이렇게 부조리한 현실을 무표정한 얼굴로 휠체어 앞을 들어 묘기를 보여주는 네 번째 지원자와 그것이 덤덤히 촬영하는 안젤라처럼 별일 아닌 듯 건조하고 우스꽝스럽게 묘사한다. 16시간씩 운전하는 프리랜서나 공장에서 손가락이 잘리거나 초과근무로 인한 사고로 엉덩이뼈가 부러지거나 하반신이 마비되는 노동자란 흔히 주변이 있는 것이라 이죽거리며 루마니아 사회를 냉소하고 풍자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냉소적 카메라의 대리자 안젤라를 따라 끊임없이 차를 타고 움직이며 부조리한 세계의 단면들을 보게 된다.
다만 이러한 단면들이 냉소적으로 사회를 공격하는 풍자에 한정되었다면 <지구 종말>은 단순하고 납작한 작품으로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정치적인 것뿐 아니라 관습적이고 일관된 형식 또한 우습다는 듯, 같은 이름의 다른 안젤라가 등장하는 1981년도 영화 <Angela Moves On>을 액자식 구성과 같은 이야기의 내적 연결성 없이 영화 중간중간 툭 툭 인용하며 과거와 현재, 흑백과 컬러를 오가거나, 화면비를 바꾸거나 슬로우 모션을 넣거나 30분이 넘는 고정된 프레임의 롱테이크를 과감히 사용하거나 줌, 틱톡과 같은 디지털 영상을 끼워 넣어 우리의 감각을 교란하며 그런 우려를 피해간다.

어떠한 설명도 납득 가능한 이유 없이 편집으로 툭 갑작스럽게 연결된 영화 속 두 안젤라, 21세기의 프리랜서 노동자 안젤라의 삶과 공산주의 독재정권 시절 택시 운전사 안젤라(도리나 라자르)의 삶을 병치시키는 <지구 종말>의 방식을 생각해보자. 두 여성이 겪는 비슷한 상황이나, 부쿠레슈티 특정 지역의 과거와 현재를 교차해 보여줄 때 우리는 유사성에 주목하게 되지만, 여성 노동자이자 운전자로서 겪는 위협을 보여주는 한 부분 외에 40년의 간극이 있는 두 시대를 교차로 보여주는 의도를 쉽게 짐작하기 힘들다. 현시대의 안젤라를 통해 보여주려는 영화의 핵심은 초과근무에 시달리는 노동자의 모습인 반면, 독재정권 하에 만들어진 <Angela Moves On>에서 사회의 부조리를 묘사할 수 있을 리 없기 때문이다. 대신 <Angela Moves On>이 <지구 종말>에 삽입되어 기능하는 방식의 핵심은 원본 영화에서 일부분을 잘라 화면비를 변경하거나 슬로우 모션을 걸어 변형을 주어 원본과는 다른 의미를 획득하여 인용되는 것 그 자체에 있다.
안젤라가 안전 홍보 영상에 출연하길 원하는 세 번째 지원자 오비디우를 만나러 갔다가 조우하는 오비디우의 어머니이자 또 다른 안젤라는 원본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이미지와 캐릭터를 조작하여 관객의 감각을 교란하는 그 대표적 예시이다. <Angela Moves On>의 안젤라 역의 배우 도리나 라자르가 연기한 이 할머니 안젤라는 마치 1980년대의 안젤라가 나이를 먹고 할머니가 되었다는 가정으로 만든 것 같은 인물로 등장한다. 같은 배우가 연기했고 이름이 같으면서 2020년대의 안젤라에게 과거를 설명하면서 택시 운전사를 했었다고 말을 하기에 두 안젤라가 대화하는 이 장면은 평행으로 달리던 두 픽션이 만나는 사건이자 다큐멘터리 인터뷰 같은 느낌을 준다. 1980년대 영화 속 안젤라가 마치 실존 인물이었고 40년이 지나 그녀에게 옛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또한, 이 장면은 대화 중간부터 할머니 안젤라의 목소리를 보이스 오버로 사용하며 <Angela Moves On> 속 몇 장면으로 그녀의 과거를 부연 설명하여 이 모든 것을 더 그럴듯하게 만든다.

하지만 당연히 이 모든 것은 허구이다. 감독인 라두 주데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Angela Moves On>을 바탕으로 <지구 종말>의 주인공 이름을 안젤라로 설정했을 것이고, <Angela Moves On>의 몇 장면을 인용할 대상으로 정한 뒤 그것과 비슷한 장면을 <지구 종말>의 안젤라로 만들었을 것이다. 다만 하나의 픽션과 다른 픽션을 재구성하여 접합시키는 감독의 방식이 온전한 환영적 감각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픽션적이기도 하고 논픽션적이기도 한 양면성을 지녔기에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마찬가지로 <Angela Moves On> 속 장면들을 변형하여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슬로우 모션을 생각해보면, 이 슬로우 모션은 그 자체로 무엇도 지시하지 않는 순수한 미적 스타일이기도 하지만 카메라에 촬영되어 기록되었지만, 너무 빠르게 지나가거나 영화라는 허구적 이야기로 재구성되는 과정에서 중요하지 않아 누락 되었거나 너무 작게 기록되어 보이지 않는 것들을 드러나게 하는 정치적 메시지로도 기능한다.
예컨대 라두 주데가 시간을 늘리고 이미지를 확대하여 <Angela Moves On> 속에서 포착한 카메라를 바라보는 후경의 사람들은 허구 안에 숨겨진 사실성과 현실을 드러낸다. 또는 정반대로 극단적으로 확대되어 보이는 이미지의 지글지글 끓어오르는 픽셀이 주는 회화적이고 추상적 느낌은 사실적으로 보이는 영화란 본질적으로 허구적 이미지임을 재확인시킨다. 이는 앞서 언급한 대로 순수한 미적 자기반영(self-reflexivity)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았던 것을 확인시킨다는 측면에서 <지구 종말>이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부조리한 노동 환경에 대한 비판과 연관되는 것을 넘어, 독재정권의 그늘을 감춘 <Angela Moves On>과 공명하며 혁명이 일어나고 30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변한 것 없는 노동자의 역사를 바라보게 만든다.
더 나아가 2020년대 안젤라가 지나가며 보았던 묘비에 적힌 ‘지나가는 자여, 차갑게 지나치지 마라. 나는 당신 같았고 당신 또한 나 같을 것이다.’라는 문구가 지닌 보편성처럼, 루마니아에 국한된 역사성, 지역성을 넘어 인류가 지닌, 죽음처럼, 변하지 않는 계급의 문제를 거대한 시간 안에 사유하게 만든다. 그것은 정권과 사회를 뒤엎는 혁명이 아니라 지구 종말이 오더라도 계급의 불평등과 부조리는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냉소로서의 사유이다. 혹은 홍보 영상의 네 번째 지원자가 말을 못 한다는 이유로 탈락했지만, 합격하여 홍보 영상에 출연한 오비디우에게 결국 말을 빼앗는 결말이 주는 아이러니하고 씁쓸한 웃음을 동반한 슬픔과 분노, 무력감과 같은 복합적 사유이다.
글·정우성
2021년 영평상 신인평론상을 받았다. 현재 예술강사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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