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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아름의 시네마 크리티크] 과도한 희생과 철모르는 수혜로 그린 가족(假族) - 영화 <효자>가 제한하는 모(母) 그리고 자(子)
[송아름의 시네마 크리티크] 과도한 희생과 철모르는 수혜로 그린 가족(假族) - 영화 <효자>가 제한하는 모(母) 그리고 자(子)
  • 송아름(영화평론가)
  • 승인 2025.05.19 10: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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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꿈꿀 듯한 평화로운 가정은 가족 모두의 힘으로 만드는 것이 이상적이겠지만, 가장 쉬운 방법은 누군가 자신의 인내와 희생을 감수하고 드러내지 않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혹여 드러난다해도 이것이 나의 혹은 그의 역할이라고 일축한다면 평화는 유지될 수 있다. 아버지이기에 혹은 어머니이기에 이것 정도야 참고 넘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가정은 그 당사자가 정하는 것이 아니면서도 그들이 해야 할 것은 차고 넘치고 참아야 할 것도 산더미처럼 쌓아 놓는다. 과연  이 사이 효자(孝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부모의 곤혹스러움을 알아채는 것만으로 가능한 것일까 아니면 이조차 불가능한 것일까? 영화 <효자>에서 보여주는 소동극은 과연 효자란 무엇인가, 아니 더 나아가 효자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 가닿는다. 쉽게 쓰는 ‘효자’라는 단어 그리고 그 뜻에 찬물을 끼얹듯 얼얼해 보이는 질문이다. 그러나 영화가 이 질문을 던지는 방식과 그 대답은 그리 신선하지 않으며 깊은 씁쓸함을 남긴다. 


곧 태풍이 온다는 소식에 엄마의 산소를 찾은 아들들. 그러나 산소는 온데간데 없고 심지어 엄마의 시신조차 찾을 수가 없다. 여기저기 도움을 청하지만 이미 사라져버린 산소도 엄마의 시신도 찾을 길이 없고, 절망한 아들들은 집으로 돌아온다. 이때 파리한 얼굴로 엄마(연운경)가 집으로 들어서고 아들들은 혼비백산한다. 영화 <효자>는 이미 사망한 엄마가 집으로 돌아오면서 시작된다. 아들들은 엄마가 좀비가 아닐지 혹은 우리를 물거나 해치는 것은 아닐지를 걱정하지만 결국 받아들이기로 마음을 모은다. 제대로 말도 행동도 하지 못하는 엄마가 겁이 나긴 하지만 좋은 음식을 그리고 편안한 휴식을 주기 위해 노력하며 도리를 다하려 한다. 그러나 점점 엄마의 존재가 알려지며 아들들은 난처한 상황에 처하고 급기야 엄마는 가족들에게도 위험한 존재가 된다.

처음 영화 <효자>의 방점은 죽어 돌아온 어머니를 위해 분투하는 다섯 아들에 맞춰져 있다. 아들 길남(김뢰하)과 길중(이철민), 길영(정경호)은 투닥대면서도 한 동네에 살며 서로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물론 이 사이 갈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길남은 아픈 아이를 고치기 위해 경제적으로 힘든 상황이며, 종산을 팔아버린 길중과 이를 원망하는 길영은 틈만 나면 투닥댄다. 막내 아들 길호(전운종)는 웹툰 작가로 편집장의 구박을 받으면서 큰 일이 생겼을 때에야 고향으로 내려와 형들을 만날 수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평소 형님, 동생하며 친하게 지내는 듯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배다른 자식으로 내쳐지는 춘복(박효준)은 형들을 원망하면서도 가까이 가고자 끊임없이 노력한다. 모두 상황은 다르지만 다섯 아들은 엄마에 대한 애틋함은 놓지 않고 엄마를 모시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영화가 진행되면서 <효자>는 문득 영화의 제목에 의문이 드는 상황들을 펼쳐 놓는다. 얼핏 그들의 행동은 엄마를 위한 것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아들들의 상황을 지키는 것은 오히려 엄마이기 때문이다. 엄마는 마을 사람에게 화를 닥치게 할 존재일지도 모르며, 아픈 아이의 목을 졸라 위험에 처하는 상황을 만들기도 한다. 아들들은 가뜩이나 무서운 마당에 감당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엄마를 두고볼 수만은 없지만 그렇다고 직접 엄마를 없앨 수도 없다. 결국 마을 사람들이 나서 엄마를 해하려 할 때 춘복은 엄마를 납치하여 자신의 집으로 모신다. 남들이 배다른 자식이다 뭐다해도 자신을 감싸주며 결코 쓸모없는 것은 없다던 엄마의 말은 춘복이가 살게하는 힘이었다. 그 은혜를 갚고자 움직인 춘복은 엄마를 데려와 닭죽 만들 준비를 하고 잠시 외출 후 돌아왔을 때 엄마는 사라진 후였다. 그리고 춘복이가 만들려던 죽은 깔끔하게, 옛맛 그대로 완성되어 있었다.

영화 <효자>가 그리고 있는 모자 사이는 꽤나 애틋하고 안타깝다. 엄마를 제자리로 보내주자며 농약을 주었으면서도 막상 엄마가 그 잔을 들면 쳐내며 저지하는 모습이나 좀비가 된 엄마를 보면서도 과거 자신들을 감싸주었던 엄마의 모습을 떠올리는 순간들은 충분히 다정하다. 그러나 이러한 장면들이 쉽사리 감동적인 가족의 이야기라거나 엄마의 사랑으로 귀결되는 것은 꽤 잔인해 보인다. 남편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상황에서 엄마는 아들 다섯을 키웠고, 심지어 한 명은 친자식이 아니었어도 거두어야 했었다. 조금이라도 아이들을 먹이기 위해 연신 음식을 했고, 그 상황의 회한은 노래로 천천히 흘려보냈다. 게다가 이런 과거를 보냈던 엄마가 죽었다 다시 돌아온 것조차 한 순간도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엄마의 역할은 무엇인가? 


영화는 엄마가 돌아온 이유를 명확히 밝히진 않는다. 그러나 엄마의 행보를 보았을 때 그 이유는 충분히 짐작가능하다. 엄마가 돌아오고 나서 아들들이 겪고 있던 모든 갈등은 깨끗하게 해결되기 때문이다. 엄마가 손녀의 목을 졸랐다는 오해는 아이가 앓던 병을 가져가기 위한 행동이었으며, 시어머니에 대한 며느리 영숙(안민영)의 고백으로 딸의 병원비를 고민하는 길남을 위해 동생 길중이 종산을 팔았던 사실 등이 밝혀진다. 여기에 천덕꾸러기 같던 춘복조차 엄마가 아들로 살뜰히 품어줬다는 이유로 더 이상 이방인 취급을 받지 않는다. 즉 엄마는 모두에게 오해를 받거나 불 태워지기 직전에 처할 수 있었음에도 자식들의 치유를 위해, 그들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돌아왔던 것이다. 엄마로 인해 형제들은 누구 하나 낙오되는 이 없이 하나로 묶일 수 있었다. 그 후 남아있으면 문제가 될 엄마는 스스로 아궁이로 기어들어가 모습을 감추며 어떠한 문제도 남기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을 감동적인 가족 이야기라고 바라본 것은 지극히 자식의 입장에선, 엄마의 희생을 전적으로 아름다운 것이라 전환시킨 자식의 시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따라올 질문이 있다. 도대체 <효자>라는 제목에서의 효자는 무엇을 혹은 누구를 가리킨 것인가? 엄마의 이 많은 희생을 그저 받기만 한 자신들이 무엇을 했으며, 또 그들의 행복을 모든 가족의 행복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일까? 너무 이기적인 시선은 아닌가? 이러한 질문이 앞다투어 떠오를 즈음 영화는 효자(孝子)의 자(子)를 천천히 다른 한자인 자(咨)로 바꾸어 놓는다. 이렇게 한 글자를 물을 자(咨)로 바뀌는 순간 이 작품의 제목이 담고 있는 것은 많은 것을 해결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효를 묻다, 혹은 탐닉하다로 전환할 때, 영화의 내용은 결국 자식들이 효(孝)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살아돌아 온 부모보다 중요한 것이 있고, 또 곧 돌아가실 수 있는 부모보다 보살펴야 할 것이 있는 자식들은 늘 닿지 못할 어딘가에서 스스로를 위안하는 효를 그리고 있었던 것이 아니냐고 영화는 묻고 있었다.


그러나 이처럼 자식을 아무것도 모른 채 받기만 하는, 결코 부모의 마음에 도달할 수 없는 이들로 그리는 것은 어딘가 억울하다. 그리고 이는 엄마를 모든 것을 내어주고 죽어서까지 아이들만을 위해 살아가는 존재로 그리는 것에 대한 반감과 연결되는 것이기도 하다. 어떤 역할에 도달점이 정해지는 순간, 그 아래로는 모두 미달이라는 딱지를 붙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그 도달점이 곧 정답이 되고 미달하는 모든 것은 부족한 것으로 내려앉는다. <효자>에서 그려진 엄마의 상도 엄마지만 그렇지 않은 엄마도 엄마이며, 아무것도 모른 듯 천방지축으로 엄마의 돌봄만 받는 이도 자식이지만 오히려 그 반대 역시 자식일 수 있다. 그러나 미리 정해놓은 도달점은 그와 가깝지 않은 많은 것들을 영역 밖으로 밀어내며 틀린 것으로 취급하고 당연한 듯 그 역할 놀이에 동참해야 한다고 부추긴다. 

영화 <효자>는 노인과 좀비가 다르지 않다고 이야기 했다. 생과 사에 경계에 있는 좀비처럼 자신의 의지대로 무엇인가를 하기 어렵고, 종종 무섭게 보이기도 하며, 만약 치매에 걸린 상황이라면 더욱 더 좀비와 가깝다는 것을 영화는 군데군데에서 말하고 있었다. 이들이 혐오의 대상이 되지 않으려면 (무서웠던 동네 할아버지와는 다르게) 힘겹게 몸을 끌고 내려와 자식들의 문제를 해결해주었고 스스로 사라지며 모든 것을 정리해 주는 역할이어야 할 때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어도 그들의 삶을 긍정할 수 있는 방법은 충분히 있을 것이다. 이는 자식에게 역시 적용될 수 있으며 그래야 한다. 불안할수록 굳건한 울타리가 필요해서인지 과도할 정도로 희생적인 가족 이야기가 넘쳐나는 요즘이다. 과연 모두가 그 안에서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

<효자>(2022)
이미지 출처: 네이버

 

글·송아름
영화평론가. 한국 현대문학의 극(Drama)을 전공하며, 연극·영화·TV드라마에 대한 논문과 관련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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