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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시네마 크리티크] 현실엔 없는 직장인의 재벌 혼내주기
[안치용의 시네마 크리티크] 현실엔 없는 직장인의 재벌 혼내주기
  • 안치용(영화평론가)
  • 승인 2025.06.01 23: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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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 <소주전쟁>

 

<소주전쟁>은 1997년 IMF 외환위기 당시 타격을 입어 이후 몰락한 진로그룹을 소재로 한 영화다. 탐욕으로 무장한 월가의 국제 금융자본의 먹이가 된 한국 기업이 몰락하는 과정을 극화했다. 큰 줄기는 사실이고 일부는 가공이다. 손현주가 연기한 재벌 2세 회장 석진우는 고 장진호 회장을 모델로 했다. 범법자로 도망 다니던 중에 장 회장이 중국에서 객사했기에 석진우를 영화처럼 표현하는 데에 명예훼손 우려나 도덕적 불편은 없었을 것 같다.

마찬가지로 실제 모델인 골드만삭스는 극중에서 솔퀸으로 바뀌었는데, 글로벌한 ‘쓰레기 청소부(Vulture Capital)’이니 영화에서 다룬 정도의 비난은 그러려니 하거나 모른 척하며 넘기지 싶다. 실명이 나온 것도 아니고, 오히려 부도덕한 과거의 큰 승리를 자랑스럽게 기억할까.

 

수업료

영화에서 ‘국보’라는 명칭을 사용한 소주 회사에서 인생을 바친 재무이사 종록(유해진)과 돈을 벌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글로벌 투자사 솔퀸의 직원 인범(이제훈)이 양대 캐릭터로 이야기를 끌어간다. 인범이 나쁜 놈으로 나오지만 영화엔 인범을 능가하는 악인이 드글드글 나온다. 거의 유일한 선인이라고 할 종록은 마지막 한 방을 빼고 무력하고 시종일관 얻어맞기만 한다.

종록의 상대역인 인범은 기본적으로 악인이다. 약간 회색지대에서 순간순간 갈등하는 모습을 보이는 인범과 달리, 재벌2세 석진우, 소주 회사 자문 변호사 구영모(최영준), 솔퀸에서 인범의 상사인 고든(바이런 만) 등은 일관되게 악인이다. 다만 그 선과 악이라는 것이 형사물에 나오는 현상과 다르기에, 이 영화의 악인들은 부도덕한 탐욕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능력으로 받아들이거나 자랑스러워하기까지 한다. 과장된 극화가 아닐 것이다.

IE003474848_STD.jpg?20250601224840953▲ '소주전쟁' 스틸사진 © 쇼박스

 

술 중에서 소주는 앞에 ‘국민’이란 수식어를 단 유일한 술이다. 성인 한 명당 매년 50병 이상을 마신다고 한다.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하다가 부도 위기에 몰린 국보를 먹잇감으로 점찍은 인범은 월가로 날아가 먹잇감을 소개하고 자신이 그 일을 하겠다고 맡겨달라고 한다.

세계적인 투자자문사라는 명성을 무기로 석 회장에게 접근해 인범은 국보의 경영을 자문하면서 동시에 뒤에서는 먹어 치울 작전을 펼친다. 헐값에 채권을 사모아 화의가 끝나는 시점에 경영권에 참여해 원하는 대로 막대한 투자이익을 챙긴다.

부도 위기에 몰린 국보의 경영을 자문하는 시점에 인범과 종록은 함께 일하고 소주를 마시며 우정을 쌓는다. 5년의 세월이 흘러 국보가 다시 부도가 나면서 그 과정에 솔퀸이 개입한 것을 알게 되며 종록은 그제야 인범의 의도를 파악한다. 그러나 두 사람의 재회가 비장하게 끝나지 않는다. 유해진을 캐스팅했다면 결말을 대충 짐작할 수 있지 않은가.

종록과 인범은 두 가치관을 대변한다. 그리 오래지 않은 과거, 아직 평생직장 개념이 온존한 시대에 회사에 모든 걸 걸었던 당시의 전형적 한국인 종록. 탐욕스럽고 사악한 재벌 회장의 온갖 갑질을 참아내며 회사를 지켜내려고 한 종록의 우직한 행태가 분명 바보스럽게 느껴지지만, 영화는 따뜻하게 묘사한다. 그때 우리 직장인의 모습이 사실 거의 그랬다. 그렇다고 그런 행태를 영화가 옹호하는 것 같지는 않다.

자본주의 세계관을 대변하는 인범의 가치는 외환위기 때와 비교해 많이 달라진 현재 직장인의 관점을 보여준다.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 목표를 달성하려 드는 정글자본주의자이지만 인범은 어떤 지점에서는 흔들린다. 이제훈은 “인범은 선악이 모호한 인물이다. 자신의 욕망과 목표가 명확한 반면, 종록과의 우정 앞에서는 끊임없이 갈등하는 인간적인 면모도 있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영화에서 ‘차이니즈 월(Chinese Wall)’로 언급된 자문과 투자의 벽을 넘어서는 것은 개의치 않으면서 구명모의 변호사법 위반은 문제 삼는 이중행태를 보인다. 영화에서 설정한 인범이란 캐릭터에 내재한 모습이자 인범이 종록과 우정을 쌓으며 변화한 모습이란 이중성이 엿보인다. 권모술수를 마다하지 않으며 목표를 달성한 인범이 같은 방식으로 되치기당해 감옥에 가는 장면과 종록이 석 회장의 범법행위를 되치기하는 장면은 방향이 반대이지만 일종의 대중적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장치라고 할 만하다.

IE003474850_STD.jpg?20250601224840953▲ '소주전쟁' 스틸사진 © 쇼박스

 

만약 이 영화가 해피엔딩을 도모한다면, 되치기한 두 사람이 우정을 회복하는 결말쯤을 기대하는 게 무난하지 않을까. 석 회장과 솔퀸이란 두 거악을 동시에 물리치고 종록이 노동자와 함께 국보를 찾아오는 결말은 아마 제작진이 검토했겠지만,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얘기라 배제하였을 터이다. 진로 소주가 아직 삼겹살집에서 팔리듯 영화의 국보는 살아남았다. 현실로 돌아가면 한국경제가 수업료를 세게 냈을 뿐이다.

영화에서 얘기하듯 선진 금융이란 것이 선진 사기에 불과할 때가 많다. 외환위기를 계기로 한국 기업과 국민은 글로벌한 금융 깡패의 존재를 인식하게 됐다. 특히 서브프라임 사태에서 밝혀진 미국 금융기관들의 부도덕하고 주먹구구인 행태는 선진 금융의 민낯을 제대로 폭로했다. 진로 사태 등을 계기로 우리나라에도 ‘차이니즈 월’이 제도로 도입됐으니 소 잃고 외양간 고친 정도는 아닌 셈이다.

 

차이니즈 월

‘차이니즈 월’은 금융회사 내 자문과 투자 부서 간의 칸막이를 설치해 정보를 차단하는 제도로 미국 월가에서는 1930년대 대공황 이후 처음 도입되었지만 엄격하게 적용되지는 않았다. 예컨대 투자은행이 증권 발행을 주관한 후, 자문 부서나 중개 부서를 통해 그 주식을 고객에게 매도하거나 내부 정보를 활용해 자산 거래를 하는 이해상충(conflict of interest)은 계속 이어졌다.

엔론 사태(2001)로 월드컴, 타이코 등 회계분식이 드러나고 아서앤더슨이 파산하면서 다시 한번 칸막이 강화의 필요성이 제기되며 법제화 등의 후속 조치가 있었다. 영화가 다룬 진로의 경영권 좌초 과정에선 국내에서 ‘차이니즈 월’이란 개념이 생소했고 입증하기가 어려워 글로벌 금융자본의 전횡을 바로잡을 수 없었다.

앞서 인범과 종록이 영화의 축이라고 했는데, 정확하게는 종록 대 ‘석진우+구영모+솔퀸’의 대립구도라고 보는 게 맞다. 영화는 음주 장면에서 소주와 양주를 대비하여 보여준다. 도수 차이이지, 양주나 소주가 모두 알코올인 건 매한가지다. 소주이든 양주이든 술 자체보다 누구와 마시느냐가 더 중요하다.

영화의 결말은 받아들일 만하면서 꺼림칙하다. 종록의 관점에서 보면 현실은 더 끔찍해야 했다. 다큐멘터리도 아니고, 관객을 너무 괴롭힌다는 생각에서 제작진이 자제하였을 수 있겠다. 또한 예술영화도 아니고 완성도도 그만하면 됐지 싶다. <서울의 봄>처럼 <소주 전쟁>도 역사물이다. 총과 칼이 여러 형태가 있음을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필요한 역사영화이다.

 

글 안치용, 사진 (주)쇼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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