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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희의 시네마 크리티크]<소주전쟁> 한 잔의 소주에 담긴 시대, 자본, 그리고 이름 없는 감독
[서성희의 시네마 크리티크]<소주전쟁> 한 잔의 소주에 담긴 시대, 자본, 그리고 이름 없는 감독
  • 서성희(영화평론가)
  • 승인 2025.06.09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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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소주전쟁> 포스터

1. 부드럽고 쓰디쓴 한 잔의 드라마

1997년, 대한민국을 뒤흔든 IMF 외환위기는 단지 숫자의 위기가 아니라 인간의 존엄과 공동체의 생존을 뒤흔든 시대의 전환점이었다. 영화 <소주전쟁>은 이 혼란의 한가운데에서, ‘국보소주’라는 가상의 소주 기업을 통해 우리가 잃어버린 가치, 그리고 지키고자 했던 것들을 되묻는다.

제목만 보면 다소 유쾌한 코미디물처럼 보일 수 있지만, 영화는 자본과 인간 사이의 처절한 기업드라마를 품고 있다. "부드럽고 프레시하다"는 광고 문구로 기억되는 소주 한 잔은, 여기서 후회와 미안함, 의리와 책임을 품은 상징으로 그려진다. 한 회사와 함께 늙어간 사람과, 그 회사를 숫자로만 계산하는 자본 사이에서 벌어지는 조용하지만 치열한 전쟁. 바로 그 전선에서, 배우 유해진과 이제훈이 각각의 시대와 가치를 대변하며 정면으로 부딪힌다.

소주잔 너머로 마주한 두 개의 시대

2. 유해진과 이제훈, 두 세대의 정면 충돌

<소주전쟁>의 중심엔 유해진이 연기한 국보소주 재무이사 ‘표종록’과 이제훈이 맡은 글로벌 투자사 직원 ‘최인범’의 관계가 있다. 표종록은 소주회사 하나에 인생을 건, 전형적인 ‘회사가 곧 나’였던 시대의 가장이다. 그는 회사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내던지는 인물이고, 그 절절한 헌신은 유해진의 절제된 연기로 진정성을 얻는다. 유해진은 한 잔의 소주에 담긴 후회와 애틋함, 무너지는 삶의 잔해를 놀라울 정도로 자연스럽게 표현해낸다.

반면 이제훈은 서울대 경영학과 출신, 월스트리트를 거친 젊은 엘리트 ‘최인범’ 역을 맡아, 자본의 냉혹함과 동시에 인간적인 흔들림을 함께 보여준다. 그는 경영성과와 인수를 통해 성취와 인정을 얻으려 하지만, 종록과의 관계 속에서 점차 고민하고, 동요한다. 인정욕과 성공욕, 그리고 인간적인 회의가 교차되는 복잡한 내면을 이제훈은 깊은 눈빛과 침묵 속 연기로 설득력 있게 그려낸다.

회사가 곧 나였던 사람, 표종록 역의 유해진
자본의 논리를 품은 남자, 최인범 역의 이제훈

3. 실화에 뿌리를 둔 허구: 진로의 몰락과 ‘국보소주’

이 영화는 실화를 모티브로 한다. 1997년, 외환위기 속 진로그룹은 부도를 맞고, 결국 외국계 자본에 인수되며 해체된다. 진로의 몰락은 단지 한 기업의 문제가 아니었다. ‘국민소주’로 불리던 브랜드의 붕괴는 당시 국민에게 충격이었고, 우리 경제 구조의 치명적 허약함을 드러내는 사건이기도 했다.

<소주전쟁>은 이 실화를 바탕으로, 상징적인 기업 ‘국보소주’를 통해 한국 기업들이 어떻게 외환위기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서 무너져갔는지를 보여준다. 영화는 단순히 경제 서사를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 군상들의 무력감과 절망, 그리고 마지막까지 회사를 지키려는 의지를 통해 ‘기업’이라는 이름 아래 존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려낸다.

가업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석진우 회장 역의 손현주

4. 전쟁은 영화 밖에서도 벌어졌다

<소주전쟁>의 제작과정에서 벌어진 시나리오 저작권 분쟁은 영화의 주제와도 묘하게 겹친다. 연출을 맡은 최윤진 감독은 시나리오 집필 초기 단계부터 주도적으로 참여했지만, 이후 박현우 작가가 원작자임을 주장하며 법적 분쟁이 발생했다. 한국시나리오작가조합의 감정 결과, 박 작가가 제1각본가, 최 감독은 제2각본가로 인정되었고, 결국 제작사인 더램프는 최 감독을 ‘현장 연출’로만 표기하게 된다. 이로 인해 <소주전쟁>은 한국 영화 역사상 처음으로 ‘감독 이름 없이’ 개봉된 상업 영화라는 전례 없는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이 사건은 단지 한 신예 감독의 데뷔작 분쟁이 아니라, 한국 영화계에서 창작자의 권리가 얼마나 불안정한지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영화가 다루는 자본과 인간의 갈등이, 현실 제작 환경에서도 반복된 셈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영화의 외부 갈등이 그 내부 메시지를 더욱 절실하게 만든다.

글로벌 자본의 상징, 고든 역의 바이런 만

5. 글로벌 자본의 얼굴: 바이런 만의 등장

영화에서 특별출연한 배우 바이런 만(Byron Mann)은 글로벌 투자사 ‘솔퀸’의 홍콩 본부장 ‘고든’ 역으로 등장해, 피도 눈물도 없는 자본의 논리를 상징한다. 그는 <빅쇼트>, <스카이스크래퍼> 등 헐리우드 작품에 출연한 배우로, 이번 <소주전쟁>이 그의 한국 영화 첫 도전작이다. 외국 배우를 직접 기용함으로써, 영화는 글로벌 자본의 현실성을 더했고, 냉정한 외부 자본의 시선을 인물로 형상화하는 데 성공했다. 고든이라는 인물은 단순한 악역이 아니라, 감정과는 무관한 체계로 움직이는 자본주의 그 자체다.

바이런 만의 캐스팅은 단지 외국 배우의 참여에 그치지 않는다. 한국 영화가 글로벌 경제 질서 속의 현실을 이야기하면서도, 배우 구성과 연출을 통해 그 긴장을 체화하려는 의도가 엿보이는 지점이다.

<소주전쟁> 자본과 사람 사이의 종록과 인범

6. 우리는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가

<소주전쟁>이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다. ‘표종록처럼 회사를 끝까지 지키는 삶이 옳은가, 최인범처럼 현실을 냉정히 계산하며 살아야 하는가.’ 이 질문은 선악의 문제도 아니고, 정답이 있는 것도 아니다. 마치 그날그날 기분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는 소주 한 잔처럼, 관객들은 저마다의 감상과 판단을 안고 영화관을 나선다.

또한, 영화는 직접적으로 묻는다. “우리는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우직하게 진실되게’, 혹은 ‘솔직하게 나를 위해’ 살아가는 삶, 그 사이 어디쯤에 위치한 수많은 현실의 사람들에게 영화는 작은 거울을 건넨다.

<소주전쟁>은 기업 드라마, 자본주의 비판, 감독 분쟁이라는 복잡한 이슈를 품은 한국 영화다. 제목은 다소 가볍게 들릴 수 있지만, 그 속에는 진지한 시대성, 섬세한 인간 연기, 그리고 치열한 창작의 그림자가 응축되어 있다. 이 영화는 묻는다. 누가 회사를 지켜야 했고, 누가 이름을 지켜야 했는지. 그리고 관객 각자에게 다시 한 번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를 돌이켜보게 만든다.

* 사진 출처 : 네이버 영화 <소주전쟁> 포토

 

글·서성희
영화평론가, 영화학박사. 오오극장 대표, 대구영상미디어센터 센터장을 지냈으며, 대구경북영화영상사회적협동조합 전 이사장으로 활동했다. 현재 TBC 라디오 ‘서성희의 영화세상’(월요일 오후 7시)에서 영화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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