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 애스터의 공포영화가 오늘날 관객에게 매혹적인 이유 중 하나는 그가 ‘공포’의 감정을 그려내는 방식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공포는 주로 익숙한 것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지는 지점에서 온다. 우리가 안전한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 사실상 우리의 존재를 위협하는 것으로 드러날 때 겪는 극도의 혼돈이 공포의 한 축을 이루는 것이다. 그가 영화에서 공동체의 모순적 구조를 주로 다루는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유전>을 지나 <미드소마>에서 한층 강화되었던 이러한 혼돈의 감정은 <보 이즈 어프레이드>에 이르면 더욱 전면화된다.
<보 이즈 어프레이드>, 보가 두려운 이유는?
진짜 가족에서 유사 가족으로 나아간 아리 애스터 감독의 가족적 공포는 다시 진짜 가족으로 돌아온다. <미드소마>에서 이단 종교를 중심으로 한 마을 공동체를 통해서 서로 다른 몸을 가진 이들이 마치 한 몸처럼 움직이는 기괴함을 보여주었다면, <보 이즈 어프레이드>에서는 성인이 되어서도 독립하지 못하고 여전히 엄마의 몸 안에 거주하는 듯이 행동하는 자녀의 모습, 또는 자녀에게 그렇게 행동하길 강요하는 엄마의 모습을 통해 더욱 현실적인 기괴함을 보여준다. 다 큰 성인, 심지어 중년 남성인 보(호아킨 피닉스 분)는 정신적으로 엄마의 치마폭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물론, 물리적으로도 엄마의 지배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녀에게 되돌아간다. 영화 전체가 보가 엄마에게 되돌아가는 여정을 다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좁은 통로를 지나 도착한 곳에서 물속에 거꾸로 처박힌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정확하게 그가 엄마의 뱃속으로 회귀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아리 애스터의 공포 영화가 대개 그렇듯, <보 이즈 어프레이드>의 공포는 기괴함과 혼돈의 감각이 한데 섞여 있다. <보 이즈 어프레이드>의 공포는 특히 후자에 방점이 찍혀 있다. 영화 전반에 깔려 있는 강박과 불안, 죄책감과 뒤늦음의 감각은 보의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의 엄마인 모나의 것이기도 하다. 더욱 정확하게는, 그것은 보의 것이기 ‘이전에’ 모나의 것이었다. 사실상 보와 모나는 하나의 몸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는 보가 태어나는 또는 모나가 출산하는 장면으로 시작하여, 그가 그녀에게 회귀하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하나의 몸이 서로 다른 두 개의 몸으로 분리되었다가 다시 하나의 몸으로 합쳐지는(귀환하는) 과정을 상징적인 차원에서 그려내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관객은 영화 내내 강조되는 혼돈의 감각이 누구의 것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이 거대한 혼돈은 보의 망상인가, 모나의 집착인가?

영화는 시작과 동시에 출산의 현장을 보여주며 영화 전반을 관통하는 혼돈의 감각이 모나에게서 ‘유전된’ 것임을 암시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히스테리’에 가까운 태도로 의료진을 몰아붙이는 모나의 목소리는 보의 불안과 강박의 원인이 그 자신이 아님을 암시하는 듯하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가? 그러니까, 보의 ‘현재’는 과연 모나로 인한 것인가? 후반부에서 영화는 더욱 노골적으로 모나의 집착이 혼돈의 원인이라는 데에 방점을 찍으려는 듯이 보이지만, 그조차 분명치 않다. 보의 의심과 불안은 엄마로부터 유전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모나에게 그것은 보를 낳으며 대가로 치러야 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내부가 “텅 빌 때까지 짜내고 또 짜내서” 모든 것을 준 것도 모자라, 평생을 보에게 바친 그녀가 헌신의 대가로 받은 것은 “슬픔(grief)”과 “증오(hatred)” 뿐이었다. 남은 삶 전체를 “사랑(love), 공포(panic), 걱정(worry)”에 시달리며 살게 한 것은, 다름 아닌 보의 존재인 것이다. 심지어 마지막 장면에서 재생되는 어린 보의 일탈을 보고 있노라면, 보의 현재가 모나로 인한 것이 아니라 모나의 현재야말로 보 때문이었음을 짐작하게 된다.

그러나 영화는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간다. 모나에게 불안의 일차적인 원인은 보의 존재이지만, 보다 정확하게는 보의 존재에 ‘앞선’ 것으로서 삽입과 사정이다. 삽입과 사정을 문제시하는 태도는 영화 전반에서 두드러지게 가시화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구체적으로 보의 집 바로 옆에 있는 성인용품점의 간판에서(‘Erectus Ejectus’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나체로 배회하며 행인들을 무자비로 ‘찔러’ 죽이는 살인마의 모습에서(살인마의 이름은 ‘Birthday Body Stab Man’이다), 그리고 외부로부터 침범당하는 내부의 이미지로서 나타난다. 보의 집은 노숙자와 마약중독자, 정신이상자 무리에게 ‘점거되고’, 보가 차에 치인 후 머물게 되는 부부의 집은 자동차가 주택에 ‘박혀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그 자동차에 살고 있는 것은 부부의 '가짜' 아들이다). 영화에서 내부는 끊임없이 외부로부터 침범되고, 이는 공간적인 차원뿐 아니라 시간적인 차원으로도 구현된다. ‘78번 채널’에서 보게 되는 장면들이 대표적으로, 시간의 순서가, 사건의 전후가, 논리의 인과가 뒤바뀐 데에서 오는 듯한 기이한 공포가 영화를 뒤덮는다.
우연히 도착한 숲속의 연극 무대에서, 보는 별안간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어 현실과 다른 삶을 산다. 이야기 속에서 결혼도 하고 자녀도 갖게 된 그는, 우연히 발견한 숲에서 자신의 이야기가 연극으로 펼쳐지며 이야기로(책의 형태로) 전해지는 순간을 목격하곤 소리친다: “내 이야기잖아!” 그러니까, 그는 이야기의 ‘안’이 아니라 ‘밖’에서 그것을 마주친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이야기 ‘안’에 있지 않은가? 한편, 지난한 여정을 마치고 드디어 엄마의 집에 도착한 보는 그가 주려던 선물이 이미 도착해 있는 것을 마주한다. 즉, 그가 엄마에게 주려고 가져온 손바닥 크기의 모자상은, 이미 그곳에 거대한 크기로 설치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이를 통해 영화에서 암시하는 분명한 사실 한가지는, 보가 결국에는 실패할 것이라는 점이다. 보는 언제나 뒤늦게 도착할 것이다. 즉, 그는 결코 때맞음(timing)을 성취할 수 없을 것이다.

삽입과 사정을 문제시하는 태도는 무엇보다 보의 유전적 질환으로 강조된다. 자신의 아버지가 삽입과 사정의 순간에 죽음에 이르렀으며 그것이 유전되는 병이라는 사실을 전해 들은 보는, 삽입과 사정이 자신을 죽게 할 것이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성관계를 거부한다. 이러한 보의 모습은 어딘가 자폐적이다. 그것은 시제를 초월한 자기 부정의 형상에 다름 아니다. 자신의 기원이 무엇보다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것은 (마찬가지로 시제를 초월한) 가족의 형성에 대한 거부이며 이는 곧 또 다른 자신에 대한 거부이다. 자신의 기원에 대한 (소급적) 부정이자 자신의 미래에 대한 (사전적/예비적) 거부로서, 그의 두려움은 사실상 스스로에게서 비롯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거부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외면함으로써 이루어지고 있는데, 그것은 곧 삽입과 사정에 의해 (실제적인 차원에서든 상징적인 차원에서든) ‘죽은 여자들’이다. 어딘지 모르게 분열증적인 영화의 인상은 여기서 기인한 것처럼 보인다.
그의 아버지는 사정의 순간에 죽지 않았다. 오히려 (상징적인 차원에서) 죽은 것은 모나다. 여자는 죽고 엄마가 되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마치 대가를 치르듯 공포와 증오, 걱정에 시달리며 살아가게 된다. 삽입과 더불어 사정의 순간에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이 남자가 아니라 여자라는 사실은, 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의 사정으로 인해 뻣뻣하게 굳어가며 죽은 (듯 보이는) 것은 여자다. 영화는 이를 놓치지 않고 담아내고 있으면서도, 보의 두려움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탓에 어느 쪽으로도 나아가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나르시시즘적 태도는 중년의 형상이 된 보의 유아적 태도가 그러하듯 기괴함을 자아낸다. 사실을 알면서도 정작 중요한 순간에 그것을 외면해 버리는 이러한 태도가 의도적인 것이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어쩌면 보의 두려움은 자신의 삽입과 사정이 가져올 결과를, 즉 그것이 결국에는 가족이라는 모순적인 구조를 반복할 것임을 (엄마를 통해서) 이미 알고 있다는 데에서 기인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글‧김윤진
시각예술 및 대중문화에 대하여 글을 쓴다. 2024년 대한민국 만화평론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았다. 2023년 영평상 신인평론상을 수상하였고, 같은 해 GRAVITY EFFECT 미술비평상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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