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게
내가 사는 아파트 바로 뒤편에는 작은 산이 있다. 동산이라 해야 할까. 그리고 그 산 정상의 자그마한 정자로 올라가는 길에는 데크가 조성되어 있을 뿐 아니라, 나무와 꽃들도 가득하다. 매번 다닐 때마다 감탄이 절로 나온다. 봄이 오면 연한 초록잎이, 여름이 오면 무성한 나뭇잎이, 가을에는 알록달록 단풍잎이, 그리고 겨울에는 그간 뽐낸 찬란한 잎새들을 힘껏 품는 듯한 마른 가지까지. 날이 부쩍 더워진 요즘에는 오후의 뜨거운 열기를 피해 이른 아침에 그곳으로 향하곤 한다.
6월의 푸르름을 맞이하노라니, 영국의 화가이자 시인인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의 시들이 떠오른다. 사계절에게 말을 거는 <봄에게>, <여름에게>, <가을에게>, <겨울에게>라는 제목의 잘 알려진 시들이 있지만, 여름 아침의 찬란함과 어울리는 <아침에게(To Morning)>를 이곳에 옮겨본다.
아침에게(To Morning)
순백의 옷을 입은 오 거룩한 처녀여,
천국의 금문을 열고 나오라
하늘에 잠들어 있는 새벽을 깨워라, 동녘의
방들에서 빛을 일으키고 꿀 같은 이슬을
데려와서 깨어나는 낮에 달아주어라.
오 눈부신 아침이여(O radiant morning), 일어나서 사냥꾼처럼
추적에 나서는 해에게 인사를 건네고,
고결한 발걸음으로 우리의 언덕에 나타나라

소중한 것, Priceless
일반적으로 값을 측정할 수 없을 정도의 소중함을 의미할 때 영어 priceless를 사용한다. uesless, valueless가 각각 쓸모없는, 무가치한이라는 의미를 지니는 것과는 조금 다르게, 값이 없는 것이 아니라 값을 매길 수조차 없을 정도로 소중하다는 뜻일 터이다. 그런데 앞에서 찬양한 자연은 그야말로 값(price)이 없는(less) 공짜이다. 누군가도 그렇게 말을 했었다. 진정으로 소중한 것은 보이지 않거나 값없는 공짜라고. 물질 중에서 가장 소중한 공기나 비물질 중에서 가장 소중한 사랑도 보이지 않고 값이 없으니 말이다.
걷기, 그리고 사유하기
프랑스의 철학자 프레데리크 그로(Frédéric Gros)가 쓴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Marcher, Une Philosophie)』이라는 책이 있다. 걷는 것이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이라니. 근사하지 않은가. 책 속에는 니체, 랭보, 루소, 칸트 등의 작가와 철학자들이 걷기를 통해 성취한 철학적 사유를 보여주지만, 나 역시도 그저 주어진 자연을 마주하며 걷는 것은 나와 자연의 관계'함'을 깨닫는 철학하기와 다르지 않다. 나의 소박한 철학적 사유가 비록 위대한 그들에는 미치지 못할지언정, 경탄에서 감사로, 감사에서 겸손으로 이어지니 말이다.

자연이 인간에게, 인간이 자연에게
내일도 어김없이 마주할 자연에게, 마치 블레이크의 시처럼 무어라 말을 건네고 싶어질 것이다. 그런데 '햇살에게 바람에게 나무에게 꽃에게' 언제나 마음껏 인사하려면, 자연의 낭만에 빠져있던 이성을 깨워야 한다. 언제까지 그들을 객체적 대상으로 누리며 즐기기만 할 것인가? 기실 인간은 자연을 다스리는 존재가 아니라,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러니 인간은 자연과 함께 거주하는 생태적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주체적 인간이 아니라, 모든 객체를 조율하고 보살피는 책임을 지닌 존재라는 말이다. 자연은 지금도 인간에게 달콤한 인사말이 아니라 위험한 경고의 말을 건네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게 걷기가 사유하는 철학이 될 수 있는 이유는, 걷고 있는 그 길이 그 자체로 자연이며 나 역시 그 자연의 일부임을 깨닫기 때문이다. 나는 오래도록 그 길과 그곳에서 마주하는 자연과 공존하며 그들을 경탄하고 싶다. 부디 인간과 자연이 이 세상에서, 아니 이 지구에서 아름답게 공생할 수 있기를.
글·김소영
문화평론가 겸 한국외국어대학교 학술연구교수. 기술 중심의 탈경계적 대중문화에 관한 학제 간 연구를 수행 중이다. 한국영화학회 국제학술상임이사와 글로벌문화콘텐츠학회 학술이사를 역임하였으며, 현재 한국브레히트학회 공연이사 및 『영화연구』 편집위원과 『스토리콘텐츠』 편집위원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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