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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형진의 문화톡톡] 독일 연극과 공론장
[임형진의 문화톡톡] 독일 연극과 공론장
  • 임형진(문화평론가)
  • 승인 2025.06.23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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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이성의 공적 사용과 사회적 진보의 모델
연극-퍼포먼스 [가면과 권위] (작/연출/퍼포먼스 임형진, 2011), Berlin ©테아터라움 철학하는 몸
포스트드라마 연극-퍼포먼스 [가면과 권위] (작/연출/퍼포먼스 임형진, 2011), Berlin ©테아터라움 철학하는 몸

 

독일 연극예술의 핵심 가치인 ‘공공성’은 단순한 재정 지원을 넘어, 극장을 시민 사회의 필수적인 ‘공론장(Public Sphere)’으로 기능하게 하는 철학적, 제도적 토대 위에 구축되어 있다. 이는 계몽주의 사상가들로부터 시작되어 프리드리히 쉴러(Friedrich Schiller)의 ‘도덕적 기관으로서의 연극’ 개념으로 구체화 되었으며,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의 서사극을 통해 비판적 사회 분석의 도구로 발전하였다. 오늘날 ‘슈타트테아터(Stadttheater)’라는 공공극장 시스템은 이러한 철학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고 있으며, 극장이 상업적 논리에서 벗어나 동시대의 사회적, 정치적 담론을 생산하고 비판하는 토론의 장으로 작동하게 한다. 그러나 이 이상적인 모델 역시 관객의 사회적 편중 현상이라는 현실적 도전에 직면하며, 공공성의 범위를 확장하기 위한 지속적인 성찰을 요구받고 있다.

 

무대, 광장이 되다.

독일 사회에서 극장은 단순한 문화 향유 공간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민주주의 사회의 건강 상태를 가늠하는 지표이자, 시민들이 사회적 현안에 대해 숙고하고 토론하는 살아있는 공론장으로서 기능한다. 이러한 독일 연극의 특성은 단기간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깊은 철학적 뿌리와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견고한 사회적 합의 및 제도에 기반하고 있다.

 

계몽에서 도덕적 기관으로

독일 연극의 공공성 개념은 칸트(Immanuel Kant)로 대표되는 독일 계몽주의 사상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계몽주의가 이성의 ‘공적 사용’을 통해 사회적 진보를 이룰 수 있다고 보았듯, 연극은 시민들이 이성적으로 사유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함양하는 중요한 매체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생각은 극작가이자 철학자인 프리드리히 쉴러에 의해 ‘무대는 도덕적 기관’이라는 개념으로 구체화 되었다. 쉴러에게 극장은 법이 처벌하지 못하고 종교가 다루지 않는 인간 삶의 복잡한 문제들을 다루면서, 관객에게 감정적 정화와 함께 도덕적 성찰의 기회를 제공하는 교육의 장이었다. 즉, 극장은 국가와 시민을 연결하고 공동체의 윤리적 기준을 형성하는 핵심적인 공적 기관으로서 자리매김하였던 것이다.

 

포스트드라마 연극 [당신의 만찬] (작/연출 임형진, 2019), 일민미술관 ©일민미술관/테아터라움 철학하는 몸
포스트드라마 연극 [당신의 만찬] (작/연출 임형진, 2019), 일민미술관 ©일민미술관/테아터라움 철학하는 몸

 

공론장의 제도적 실현

이러한 철학적 이상은 ‘슈타트테아터’라는 독특한 제도를 통해 현실에 구현되었다. 독일의 거의 모든 중소 도시들은 자체적인 공공극장을 운영하며, 연방 및 주 정부의 막대한 재정 지원을 받는다. 이 시스템의 핵심은 극장을 자본시장의 논리로부터 보호하는 데 있다. 흥행 수익에 얽매일 필요가 없는 극장들은 상업적으로 성공하기 어려운 실험적이거나 정치적으로 민감한 주제의 작품들을 과감하게 무대에 올릴 수 있다.

이러한 극장들은 아이디어를 생산하고 토론을 촉발하는 ‘토론 환경’으로서 기능하며, 도시의 공공 공간과 직접적으로 상호작용한다. 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가 이론화한 ‘공론장’이 이성적 비판을 통해 공적 여론을 형성하는 공간이라면, 독일의 슈타트테아터는 바로 그 공론장의 제도적, 물리적 현신이라 할 수 있다.

 

비판과 저항의 무대

독일 연극은 단순히 지배적인 담론을 재생산하는 것에 그치지 않으면서, 기존 질서를 비판하고 전복하는 ‘대항-공론장’의 역할을 수행해왔다. 20세기 가장 중요한 연극 연출가이자 이론가인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자신의 서사극을 통해 관객이 무대의 환상에 몰입하는 대신, 사회 구조의 모순을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변화의 필요성을 깨닫게 하고자 하였다. 그의 연극은 관객을 감정적 소비자가 아닌, 이성적 분석가로 만들려는 시도를 보여주었다.

 

이상과 현실의 간극

이처럼 강력한 공공성의 이념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독일 연극은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막대한 공적 자금이 투입됨에도 불구하고, 실제 극장 관객은 대부분 고학력의 특정 사회 계층에 편중되어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곤 한다. 이는 극장이 모든 시민을 위한 보편적 공론장이라는 이상과 달리, 실제로는 특정 집단만을 위한 배타적인 공간으로 기능할 수 있다는 현실을 보여준다. 진정한 의미의 공론장이 되기 위해, 독일 연극은 더욱 다양한 사회 구성원들을 포용하기 위한 혁신적인 방법을 모색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장을 민주 사회의 필수적인 토론의 장으로 여기는 독일 연극 모델이 예술의 사회적 역할과 책임에 대한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글·임형진

상명대학교 예술대학 연극전공 교수. 극단 테아터라움 철학하는 몸 대표 및 상임연출가. 독일문화와 예술, 수행성의 미학, 포스트드라마 연극에 대한 연구 및 예술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제5회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 젊은비평가상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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