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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오직 예언자만을 믿는다
우리는 오직 예언자만을 믿는다
  • 피에르 수숑
  • 승인 2015.02.02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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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오직 예언자만을 믿는다

 

프랑스 남부의 이 서민지역에서는 공화국의 좌표가 사라지면서, 이슬람이란 정체성이 귀중한 가치가 되고 있다. 이제는 흔치 않은 전투적 노조활동에 참여하는 것처럼, 종교적 귀의가 사회 참여의 방식이 되고 있다.

 

피에르 수숑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특파원

 

“그들이 쿠아치 형제를 찾아 총으로 사살하는 데 단지 이틀이 걸렸다.” 겨울 햇살이 환하게 내리쬐는 고속도로에서 22살의 비셈이 자동차들 사이에서 곡예 운전을 하고 있다.(1) “나는 내 형제들을 생각합니다. 당신도 그것을 이해하겠지요?” 우리는 이해한다. 비셈의 낯빛이 어두워지자, 우리는 자동차 라디오의 소리를 키우고는 추억의 침묵 속에 빠지는 비셈을 바라본다. 비셈에 따르면 그의 두 형은 30세가 되기도 전에 죽었고, 형들을 죽인 살인자들은 여전히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약 2년 전쯤, 그의 첫째 형인 바쉬르는 친구 한 명과 함께 어떤 빌라를 털었다. 멧돼지 사냥에서 돌아오는 중이었던 한 이웃이 그곳을 지나가다, 바쉬르의 머리에 총 한 발을 쏘아 그를 살해했다. 총을 쏜 사람은 한 시간 동안 감금되었다. 예심은 기소면제 판결을 내렸다. 바쉬르가 자동차로 도망가는 중에 살해당했는데도 불구하고 정당방위라는 판결이 나왔다. 몇 달 후, 둘째 형 야신은 길 한가운데서 칼라치니코프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모든 마을 사람이 누가 그 짓을 했는지 알고 있다. 경찰 역시 알고 있지만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 아랍 사람 한 명이 사라졌으니 더 잘 됐다는 식이다.”

분노감을 거의 드러내지 않고 평범한 톤으로 말하는 바셈의 목소리는 확신을 드러낸다. 비셈이 흥얼거리기 시작하는 랩 가수의 노래가 이 점을 증명해 준다. “젊은이들이 시체 안치소에 더 많이 쌓일수록 젊은이들은 법정에 그만큼 덜 설 것이다. 내가 살아가는 삶을 당신은 잘 알고 있다. 곳곳에서 똑같은 방식으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프랑스가 나를 사랑할 때까지, 프랑스를 입맞춤할 것이다.”(2)

 

아랍인 살해한 사냥꾼의 무죄판결

 

야신은 바쉬르의 살인범에게 죄를 물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늘 사로잡혀 있었다고 바셈은 전한다.

“사냥꾼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그게 정상입니까? 그 백인 사냥꾼도 우리와 같은 구역에 삽니다.” 바쉬르의 친구이자 사냥꾼의 총성에 용케 살아남은 줄리앙의 발언이었다. 그는 절도를 저질렀던 순간에 사냥꾼이 쏜 두 발의 총성에서 살아남았지만 절도죄로 2년 반의 징역형을 살고 나왔다. 야신은 6살 때부터 경찰서에 들락거렸지만, 솔직히 그런 ‘조숙함’은 그 어떤 민족적 성향에서 기인한 것은 아니었다. 죽기 전에 야신은 자신의 삶을 이렇게 말했다. “나의 아버지는 빌딩에서 일을 했는데, 심한 척추 디스크를 앓아 집안 침대에 누워 있어야만 했다. 어머니 역시 암에 걸려 매우 아팠기 때문에 우리는 돈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어린 동생들을 위해 아무것이나 훔치기 시작했다. 프리쉬닉 슈퍼나 주민구호센터에서, 그렇지! 그리고 경찰들 집에서 장난감과 원격조정 자동차들을 훔쳤다.”

야신은 사법관들과 끊임없이 대면하면서 보낸 자신의 어린 시절과 청소년 시절을 상세히 이야기했다. 보호소에 수감된 일, 결코 획득하지 못한 목공직업 자격증, 불행히도 키 박스에 열쇠가 꽂혀 있어서 그 자동차를 타고 10살의 나이에 도시를 휘젓고 다닌 일, 시청 벽에 낙서한 일…. 삶의 충동에 의해 저지른 자신의 멋진 ‘권모술수들’을 모두 이야기했다. 18살이 넘자 몇 건의 절도와 마약을 한 죄로 야신은 사법적 훈계를 받는 대신에 감옥에 가게 되었다. 그런 다음에, 야신은 23살에 그런 모든 짓을 그만 두었다. 그 후 긴 수염을 기르고 전통의상을 입고 다녔고 정결한 식료품점을 열었다. 야신은, 뒷방에 가서 기도하는 시간 동안, 자기 고객들을 가게에 내버려두곤 했다. 그는 신학자처럼 이슬람의 활력에 심취되었고, 신실하게 자신의 종교를 실천했으며 ‘자신의 신’을 흠모했다. 방황에서 완전히 벗어난 그는 무엇보다도 ‘좋은 일’을 하고 싶었다. 그는 무슬림 형제들이 근동에서 운영하는 학교에 최근 몇 달 동안 머물렀다. 자신의 긴 체류기간 동안 코란에 대한 지식을 완벽하게 쌓기 위해서였다. 그가 프랑스로 되돌아왔을 때, 그는 다시 경찰의 관심 대상이 되었다. 예전에 비행 청소년이었고 현재 이슬람을 독실하게 실천하는 무슬림이라는 두 가지 프로필이 경찰의 요주의 대상이 되기에 딱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젊은 시절의 오래된 원한이 그를 죽게 만들었을 것이다.

자기 형제들의 죽음은 비셈의 삶을 뒤흔들어 버렸다. 그는 자동차 정비사 자격시험장에도 가지 않았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대부분의 내 친구들처럼 마약 거래를 하다 감옥에 가거나 죽는 일이다. 혹은 일자리가 없으니 한 달에 며칠씩 여기서 상품을 운반하고 저기서 피자를 배달하는 것이다. 이것 또한 죽음이나 마찬가지다.” 비셈이 사는 서민지역에서 20~24살 연령층의 실업률은 2012년, 이 연령층의 전국 실업률이 13%인 데 반해, 57%까지 치솟았다. 비셈은 ‘수염 기른 사람들(무슬림)’이 운영하는 케밥집 앞에 주차한다. 우리도 점심을 먹기 위해 이 케밥집에 자리를 잡는다. 케밥집에 들르는 것이 자신의 형제들과 종교에 다가가는 그의 방식이다. “나는 내 믿음이 커지길 기대한다. 나는 기도하고 단식도 한다. 내가 수염을 기르게 되고, 좋은 무슬림이 되는 순간이 곧 올 것이다. 현재는 내가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비셈은 <샤를리 엡도>에 그려지는 풍자만화를 용인할 수 없었다. “그것은 증오심이다. 예언자는 찬양받아야 하고, 우리가 믿는 유일한 사람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 분마저 공격한다.” 젊은이들은 그 어디에도 애착을 두지 못한다. 학교는 어떤가? 학교는 ‘부패한 조직’ 속에 처박아 넣는 기계다. 경찰과 사법부는 어떤가? 이 기구들은 눈 한 번 깜짝이지 않고 그의 형제들을 매장해 버렸다. 사회통합 대책들과 온갖 종류의 직업 교육은 어떤가? “교육을 받아도 나중에 일자리가 전혀 없다.” 미디어는 어떤가? “미디어는 아무 말이나 한다. <샤를리 엡도>를 공격한 사람들은 이 지역 젊은이들이 아니다. 미디어는 무슬림들에게 책임을 떠넘기려 한다.”

비셈과 그의 친구들에게 공화국이 자유롭고, 평등하고, 박애주의적이라고 강조하는 끝없는 미디어의 선동은 아마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할 것이다.

서민구역에서 30km 정도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잘레스 지역에는 사암으로 지어진 주택들이 포도 경작지들 사이에 펼쳐져 있다. 공화국은 여기에서도 박애주의 정신을 보여주고 있다. “아랍인들의 성전을 잠재우는 방법은 간단하다. 군사법정을 설치하여, 그들 머리에 탕!하고 총알 한 발씩을 쏘는 것이다”라고 무기판매소에서 한 사냥꾼이 장담한다. 무기 판매상은 약간 강도를 낮춰서 비난하기 시작한다. 전쟁 이야기들이 사업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샤를리 엡도>에 대한 테러가 발생한 다음날, 무기가 다 팔려버렸다. 11시에 이미 장전식 소총도 섬광탄도 탄약도 다 떨어졌다. 나는 쏟아지는 주문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고객들이 반격하러 갈 것이라고 나에게 설명했다”고 말하며 그 무기 판매상은 만족해한다.

결과적으로 공화국 가치를 옹호하는 사람은 비셈의 아버지인 몽세프뿐이었다. “나는 1970년에 알제리를 떠났다. 알제리에는 일거리가 적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적은 돈을 받고 그 일을 했다. 프랑스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공사장에서 많은 급여를 받는 일자리를 찾았고, 세큐리테 소시알(사회보장보험)에도 가입했다. 프랑스는 우리를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그러나 몽세프는 고통스러운 순간도 기억하고 있다. “야신이 태어나고 1982~83년부터 일거리가 더 줄어들었다. 공사가 훨씬 더 줄어들었고 주문이 감소했으며 경쟁이 심해졌다. 스페인 사람들과 동구권 사람들이 점차 들어오기 시작했고 그들이 가격을 파괴해 버렸다. 더 어려워졌지만 나는 불평하지 않는다. 여전히 사람들이 당국에 신고하지 않은 잡일들을 시키려고 나를 부른다. 그렇게 번 돈으로 퇴직연금을 보충한다. 나는 한 달에 700유로의 퇴직연금을 받는다.” 몽세프는 자신의 허리띠를 고쳐 맨다. 비셈은 아버지와 상황을 다르게 파악한다. “아버지가 여기에 온 지 40년이 되었고, 이 지역 부자들의 빌라를 짓기 위해 거의 쉬지 않고 밤에도 일을 했다. 아버지는 등을 다쳤지만 너무 미미한 퇴직연금 때문에 67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회반죽을 바르고 콘크리트를 타설한다. 내가 자신과 같이 석공이 되기를 원했다. 나는 그게 싫다고 말했다.”

죽기 얼마 전 야신은 친구 나빌의 집에서 저녁나절을 보내곤 했다. “나빌은 야신의 아주 친한 친구였다.” 그들은 공통점이 많았다. 부모들이 알제리 출신이었고, 어린 시절을 같은 구역에서 보냈으며, 청소년 시절에는 똑같이 ‘바보짓’을 저질렀다. 나빌은 중심가 일반 고등학교에 입학한 도시의 유일한 ‘아랍 사람’이다. 그 학교에서 가라데 지역챔피언이라는 신분은 첫 날부터 엄청난 성과를 냈다. “한 백인 학생이 나에게 어디 출신이냐고 물었다. 뻥하고 한 방에 그를 날려 버렸다. 내가 사는 동네에서 ‘너 어디 출신이야?’라는 질문은 일종의 불손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후에 나는 그런 질문이 정상적인 질문이고 자신을 소개하는 하나의 방식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빌의 무용담과 명성은 서민아파트 구역에서 그를 두려운 리더로 만들어주었다. 전혀 마약 거래를 하지 않으면서도 말을 듣지 않을 경우 폭력을 행사할 것이고 위협하면서 그가 마약 거래에서 세금을 징수한다. 십일조가 걷히는 것처럼, 나빌은 얼마 안 되어 매달 수천 유로의 수입을 얻게 된다. “내가 고등학생이었기 때문에 나의 높은 생활수준은 경찰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나는 위장할 직업이 필요했다. 그래서 퀵(Quick, 맥도날드와 비슷한 프랑스 패스트푸드점-역주)이 개점하자마자 거기에 취직했다.” 그는 다시 그곳의 ‘유일한 아랍 사람’이 되었다. 우승 트로피를 여러 개 획득한 그를 좋게 생각했던 시청이 압력을 행사하여 퀵에 취직시켜 주었다. 3달 후, 사장이 일한 시간을 계산해 주지 않는다는 ‘백인들’의 불평에 자극받은 나빌이 대문을 발길로 부수고, 매니저를 벽에 밀어붙인 후, 돈을 계산해 달라고 요구한다. 사장이 90시간을 ‘빼먹었다’고 사과하면서 곧바로 돈을 계산해 주었다. 노조 상근 직원이 이 멋진 사건의 이야기를 듣고서, 나빌을 만나 부서 하나를 조직해 달라고 제안한다. “프랑스에 노동법이 있다는 사실을 내가 알게 되었습니다. 노동법은 내 열정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갈등의 불씨는 유태인이 아니라 자본주의

 

야신이 감옥에서 출소하고 종교에 귀의했던 순간에, 나빌은 CGT(프랑스 노동총동맹)의 노조대표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마약거래의 ‘세금징수’를 포기했다. 15년 전부터 성직자로 일하며, 반복되는 사회갈등, 파업, 점령, 기업위원회, 해고 전 사전 상담 같은 일에 열심히 관여했다. “나는 16세에 퀵에 들어갔다. 거기에는 나빌이라는 멋진 사람이 있었다. 그는 주기적으로 우리에게 노동조건, 정치 등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나는 비로소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 마침내 우리는 모든 비정규직 직원의 취업을 요구하기 위해 18일간 파업을 했다. 놀랍게도 20명으로 구성된 한 팀 전체가 100% 파업에 참여했다!”라고 얼마 후 지역 공무원이 된 아웁이 우리에게 말해 주었다. 아웁은 현재 좌파전선(Front de gauche)의 투사다. 나빌은 자신을 수없이 해고시킨 퀵에 다시 복직하길 소망한다. 그런데 그 역시 <샤를리 엡도>의 풍자만화에 감정이 상해 있다. CRS(공화국 보안 기동대)가 체포한다고 위협하는 노동자 측 파업 감시인을 지원하기 위해 싸울 준비가 된 100여 명의 ‘지역 젊은이들’을 불러모을 수 있을 정도로 능력 있는 이 투사에 대해 CGT는 오히려 피곤해하고 있다. “우리는 조직과 필요한 행동양식에 대해서 이민 출신 젊은이들과 의견을 달리하고 있다”고 노동조합의 한 책임자가 아주 완곡하게 설명한다.

그런데 극우 국민전선(FN)이 지난 유럽의회 선거에서 승리를 쟁취한, 오랫동안 공산당이 장악해 온 이 마을에서 얼마나 많은 다른 ‘나빌’이 생겨날 수 있을까? 정치적 차원의 성격을 띤 종교적 귀의가 더 전통적인 수십 년간의 좌파 투쟁주의를 대체하고 있을 때, 아웁의 노정이 정치화된 노동조합 선배의 노정과 교차할 기회는 얼마나 될까? 심지어 CGT조차 나빌과 그보다 앞선 다른 사람들(3)을 ‘이민자’라는 정체성에 연결시키고 있는 때에 어떻게 출신 문제를 더 사회적인 테마 속에서 용해시킬 것인가? 바쉬르가 죽기 전에 자주 들렀던 지역 선교원에서, 여성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불만을 에둘러 털어놓는다. 보호소 청소년들에서부터 직업이 없어 종교적으로 급진화되는 청소년들에 이르기까지 쿠아치 형제들의 이야기는 자신들에게 일상적으로 친숙한 이야기라고 말한다. “문제는, 우리 방식으로 말해 본다면, 비록 우리가 하는 일에 믿음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자리가 충분치 않다는 것이다”는 말을 오렐리가 마침내 뱉어낸다. 입구 홀에는 ‘나는 샤를리다’라는 작은 포스터가 여러 장 붙어 있다. 사회계층 사이의 단절이 피부로 느껴진다. 비셈이 우리를 역까지 바래다주면서, “유태인들이 미디어를 소유하고 있다”고 단언했던 바로 그 순간, 우리는 딱 한 번 그의 말에 반박했다. “아니야, 그것은 자본주의야.” 그러자 “자본주의가 무엇입니까?”라고 그가 물었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남아 있는 것이다.

 

글·피에르 수숑 Pierre Souchon

번역·고광식

 

(1) 증인들의 익명성을 보장하기 위해 이름과 지명을 가명으로 사용했다.

(2) 2인조, <93 Hardcore>, 비코우즈 뮤직, 2005년

(3) 압델 마브루키, <불안정한 세대>, 르 쉐르쉬-미디, 파리,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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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수숑
피에르 수숑 <르몽드 디플로마티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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