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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시뮐라크르
유럽의 시뮐라크르
  • 세르주 알리미 | 프랑스판 발행인
  • 승인 2009.06.03 19: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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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츨라프 하벨 전 체코 대통령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사전에 결과를 쉽게 알 수 있는 선거에, 무능력하다고 소문난 온갖 후보들이 출마한다고 상상해봐라. 모든 선거가 자칭 민주적인 방식으로 진행되지만, 실은 광대극에 불과한 것이다.”(1)
하벨의 이 말은 당시 유엔 인권이사회를 염두에 둔 것이지만, 유럽의회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듯하다. 1979년 첫 유럽의회 의원 선거를 보통선거로 치른 이래, 최근 투표 기권율은 37%에서 54%로 증가했다. 그럼에도 유럽의회의 힘은 커졌고, 게다가 30년 전 1억8400만 명이던 주민 수가 4억9500만 명으로 늘었으며, 그 힘이 미치는 범위도 확대됐다. 하지만 연극 무대를 장악한 유럽은 관객에게 감동을 주지 못하고 있다. 왜 그러한가?

그것은 아마도 실질적으로 유럽 대륙의 정치적 공동체가 거의 존재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유럽연합 27개국이 유럽 내부 문제를 항상 거의 동시에 치열한 국민투표에 부치면서 갖는 소망, 언젠가는 유럽의 정체성을 갖게 될 것이라는 소망이 지속적으로 몽환적인 생각을 키운다.
스웨덴의 선거 토론에 대해 얼핏이라도 알고 있는 슬로베니아인이 누가 있으며, 불가리아의 정치 생활에 대해 알고 있는 독일인이 누가 있겠는가? 그렇지만 유럽선거가 치러진 이튿날 슬로베니아인들과 독일인들은, 스톡홀름과 소피아의 투표 결과가 자신들이 유일하게 관심을 기울였던 (자국 내) 선거 결과를 무효화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또 자신들의 표가 차지하는 비율은 실제 유럽의회 전체 표의 1%(슬로베니아)나 혹은 13.5%(독일)에 불과하다는 것도 깨닫게 된다.(2) 유럽의 지도자들은 어떻게 이런 종류의 결과 발표를 보고 유권자들이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지 않을 거라 상상하는 걸까? 선거 캠페인 덕분에 관심과 열정 속에 세 나라에서 잇따라 치러진 유럽연합 헌법조약 찬반 투표에서 국민들이 뭘 선택했는지 몰라서 지도자들이 그 결과를 저버린 게 아니라는 느낌 같은 박탈감 말이다.

프랑스의 선거구 8곳 중 7곳이 주요 정당의 당리만 고려해 나뉘었다. 선거구는 역사, 정치 또는 지역 현실과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한편 남동부 지방의 선거구에는 예전에 북서부 지방의 선거구에서 당선된 적이 있는 사회당 지도자가 출마했다. 이 정치인은 낙하산 공천을 받아 남동부 지방의 선거구에 출마하게 된 것을 ‘비통’해했다. 하지만 이 사람은, 마치 프랑스 법무장관이 유럽사법재판소가 룩셈부르크가 아닌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사람들이 선거에 거의 무관심하기 때문에 사전 당선이 점쳐진다. 한술 더 떠,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 총리는 모델과 멜로드라마 여성 배우 8명을 유럽의원 후보로 출마시키겠다고 했다.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30년 전부터 낡은 유럽 대륙 전체를 대규모 시장으로 탈바꿈시켜 새로운 국가들로 끊임없이 확장했던 정치 세력들은 갑자기 ‘보호하고’, ‘인도적이며’, ‘사회적인’ 유럽을 외치고 있다. 비록 선거 캠페인 기간 동안에는 사회주의자·자유주의자·보수주의자들이 충돌을 빚기도 하지만, 이들은 대부분의 유럽의회 선거에서는 협력해 투표한다. 그리고 이들은 위원 자리를 서로 배분한다. 사회민주당은 이들 자리 중 특히 세무, 산업, 경제 및 금융 업무, 고용, 무역 등 여섯 자리를 배당받았다. 현안 충돌의 두려움과 정치적 무관심은 “말랑말랑한 중도 우파에서 물러터진 중도 좌파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푸석푸석한 자유주의적 연정까지 포함해”(3) 통치 세력을 무기한 유임시키는 데 한몫하고 있다.

이런 정권 교체의 부재가, 초라하기 그지없는 투표율에도 유럽연합 집행위원장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조제 마누엘 바호주의 자리를 보전해줄까? 고든 브라운 영국 노동당 총리는 “그는 훌륭한 일을 했다. 난 우리가 그를 지지한다고 분명히 밝히고 싶다”고 말했다. 호세 루이스 사파테로 스페인 사회당 총리도 “난 바호주 위원장을 지지한다”며 영국 총리를 전폭적으로 뒷받침했다. 사실, 브라운과 사파테로 두 총리 모두 유럽사회당(PSE)의 계획을 대변한다. 프랑스 사회당 대표 마르틴 오브리도 유럽사회당 소속이다. 하지만 그녀는 “내가 바라는 유럽은 바호주 위원장이 자신의 친구 사르코지와 베를루스코니와 함께 이끌어가는 유럽은 아니다”라고 경고했다. 이제, 유권자들이 갈피를 잡아야 할 때다.

세르주 알리미 Serge Halimi
번역·조은섭



<각주>
(1) Vaclav Havel, ‘A Table for Tyrants’, <The New York Times>, 2009년 5월 11일.
(2) 슬로베니아는 736명의 유럽의회 의원 중 7명을 뽑고, 독일은 99명을 뽑는다.
(3) ‘An Unloved Parliament’, <The Economist>, 2009년 5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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