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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주의 논쟁을 읽는 마르크스주의적 개입
애국주의 논쟁을 읽는 마르크스주의적 개입
  • 서동진 | 계원디자인예술대 교수
  • 승인 2009.10.06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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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판 창간 1주년 특집] 국가의 의미를 다시 묻는다
공화국만 요구하는 건 정치를 추방하는 것
무엇을 위한 자유와 평등인지 먼저 물어야

국가를 사랑한다는 수수께끼

일전 어느 신문 지상에서 애국주의 논쟁으로 왁자했던 적이 있다. 진보세력도 애국주의를 무작정 백안시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잘 써먹을 길을 찾자는 취지의 주장이 등장했다. 당연 반론도 꼬리를 물었다. 진보적 애국주의니 공화적 애국주의란 이름을 내세운 이 특별한 애국주의는, 국가에 대한 사랑이 인권을 비롯한 보편적 가치와 결합하는 한 민주주의를 추진하고 확장하기 위한 꽤 괜찮은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얼마 전부터 부쩍 유행하는 대한민국 열풍을 무조건 배척할 일이 아니라 외려 우파 세력이 농단하게 내버려두지 않고 진보운동이 이를 잘 활용해보자는 것이다. 당연 그를 둘러싼 의구와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제아무리 단서를 달아도 애국주의는 어쨌거나 태생적으로 나쁜 이데올로기라는 것이다. 그것이 어떤 제한을 통해 좋은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다면 역으로 인권의 억압이나 개인의 자율성을 억압하는 나쁜 이데올로기로 전환할 가능성도 활짝 열려 있다. 그리고 알다시피 역사적 교훈은 후자 쪽으로 기울어질 가능성이 더 크다는 점을 증언한다.

국가는 항상 서로 반대편을 향해 달리는 비판 속에서 추궁되고 규탄받아왔다. 그간의 정황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먼저 하나는 단연 자유주의자들의 국가 비판이 있다. 국가는 사회에 기생하는 괴물이며, 그것이 시민사회이든 개인이든, 모든 자율적 의지와 선택을 제한하는 나쁜 실체라는 비판이다. 한국 사회에서 ‘민주화 이후’의 정치적 기획을 주도했던 좌파 자유주의자들은 다양한 이름으로 즉 ‘파시즘’ 비판이나 ‘국가폭력 비판’ 같은 이름으로 이런 생각을 끈질기게 주도해왔다. 다음으로 우리는 이른바 신자유주의니 세계화니 하는 흐름들 이후에 국가를 소생시키려는 시도를 본다. 그것은 개발국가이든 복지국가 혹은 사회적 국가이든 자본주의적 경제의 맹목적인 메커니즘을 규율하면서 공공성이나 사회적 연대를 실현하는 힘으로서의 국가에 다시 호소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어느 베스트셀러 경제학자의 유명한 주장처럼 최악의 신자유주의보다는 차악의 발전국가가 낫다는 식의 솔직한 생각이 그런 데 해당될 것이다.

국가와 정치적 보편성

▲ 2006 독일월드컵 기간에 서울시청 앞 광장에 모인 붉은악마들-<한겨레> 이정용 기자
애국주의 논쟁도 그런 논쟁의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 논쟁이 혼란스러운 점은, 논쟁에 참여한 이들도 인정하듯이, 애국주의란 이데올로기에 대한 반성과 국가라는 정치적 공동체를 향한 반성이 뒤섞여 있다는 점이다. 물론 둘을 뒤섞을 수 없다. 이 둘을 뒤섞을 때 우리는 국가라는 정치신학에 대한 비판에서 맴돌고 말기 때문이다. 진보적 애국주의에서 정작 문제는 애국주의적 이데올로기를 옹호한다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편에 보편성의 역할을 부여하는 정치적 시점을 도입한다는 점에 있다 해야 옳다. 그것은 특수한 이해 속에 분열된 시민사회를 매개하고 규제하는, 그리하여 보편적인 이해를 담지하는 사회적 심급으로 국가를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알다시피 이런 주장은 여러 가지 갈래로 나뉜다. 사회계약론에서 말하는 주권적인 국가, 공화적 애국주의자들이 호소하는 국가가 있을 수 있다. 주권적인 국민이 자신의 ‘일반의지’를 결집해 설립한 정치적 공동체로서의 국가가 아마 그들이 생각하는 국가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국가란 얼핏 보면 일반의지란 개념이 환기해주듯이 보편성을 가진 듯 보여도 그것은 어떤 사회적 내용도 비운 형식적인 규범에 불과하다. 그래서 헤겔 같은 이는 사회계약론을 단호하게 비판한다. 헤겔에게서의 국가는 ‘가족-시민사회-국가’란 관계 속에서의 국가다. 헤겔식 사고에서 국가란 개인의 자율적 의지와 선택을 통해 나오거나 아니면 역으로 그에 반해 부과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부르주아적 시민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등장한 것에 불과하다. 사실 그렇지 않은 국가란 불가능하다. 그도 그럴 것이 전근대적인 사회에서 국가란 전연 자율적인 심급이 아니고 따라서 반성될 대상으로서 존재하지도 않는다. 국가가 사회 그 자체와 외연을 같이한다면 국가는 무엇인지 인식할 수 있는 무엇으로 현상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헤겔에게서 국가는 추상적인 형식이 아니라 부르주아사회의 모순을 매개하고 또 지양하는, 그리하여 인륜성이란 모습으로 실체화해야 하는 국가였다. 즉, 행정적 제도와 장치로서의 국가, 즉 사회를 구성하는 하나의 수준으로서 국가가 아니라 특수한 것과 보편적인 것을 매개하는 국가가 문제인 것이다. 따라서 헤겔에게서 우리는 처음으로 보편성을 담지할 수 있는 유효한 정치적 공동체의 형식으로서 국가를 생각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이는 곧 마르크스에 의해 곧 격렬한 조롱을 받는 운명이 될 것이다.

자본의 보편성인가 국가의 보편성인가

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애국주의 논쟁을 되짚어보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일까. 그것은 애국주의 논쟁을 가로지르는 전제, 즉 국가는 유효한 정치적 공동체일 수 있을지, 그리고 그로부터 보편성의 정치를 생각해낼 수 있는가 하는 저변의 물음 때문일 것이다. 진보적 애국주의자들이 국가에 대한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문제 삼아야 하는 것 또한 어떤 국가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왜 국가가 그러한 정치적 보편성을 효과적으로 담지하는 정치적 공동체이냐는 것이다. 물론 어떤 역사적인 국가이냐의 문제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팬덤 국가’, 즉 ‘대한민국, 사랑해요’를 외칠 때의 국가가 파시즘에서의 국가와 같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민족의 모성적 대지로서 국토와 관광지화된 구경거리로서의 국토가 다르듯이, 또 숭고한 맹목적인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국가와 마케팅 대상이 되어 적극적으로 제조되어야 하는 이미지로 간주되는 국가가 다르듯이, 근래의 애국주의를 과거의 애국주의와 동렬에 놓을 수는 없다.

자본주의는 상품적인 교환 관계를 기반으로 해 모든 세계, 모든 사물과 삶의 형태를 등가화한다. 이런 자본주의적 보편성은 상당 기간 민족국가라는 허구를 통해 혹은 혹자의 말을 빌리자면 ‘상상의 공동체’를 통해 굴절된 모습으로 자신을 실현했다. 그것은 나/우리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건네는 이들에게 당신은 무엇보다 민족의 성원이며, 민족국가의 국민임을 일깨우고 또 그를 통해 자신을 에워싼 삶의 현실을 체험하고 공감하며 또한 반성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물론 그 바탕에는 국민과 계급 사이의 긴장이 놓여 있다. 자본주의적 적대가 계급투쟁이란 형태로 현상하지 못하도록 했던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는 국민국가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국민국가는 모든 자연적 배경이나 유구한 전통으로부터 혹은 일차적인 소속집단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내고, 국민 혹은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을 동등하게 대하려고 했던 점에서 보편주의적 충동으로 충만해 있었다고 보는 것 역시 옳다. 그렇기에 어떤 민족주의도 특수주의적 환상이기에 선험적으로 유죄라는 주장은 민족주의에 유령처럼 달라붙어 있는 보편주의적 충동을 고려하면 지지하기 어렵다. 차라리 민족주의는 언제나 정치적·윤리적으로 애매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한편 민족주의는 친족집단이든, 직업적 배경이나 출신 지역이든 심지어 자신의 성별 정체성 같은 일차적 정체성을 ‘비워내고’ 그것을 ‘개인’을 만들어내는 과정으로 전환시킨다. 다시 말해 민족주의는 ‘개인화된 개인’이라고 부르는 것을 만들어내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 때문에 민족주의에는 또 다른 방향에서 보편주의를 실현할 계기가 담겨 있다. 다시 말해 국가란 바로 개인화된 개인을 만들어내는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라고 부를 수 있다. 국가의 성원으로 등록됨으로써 우리는 또 하나 제거하기가 불가능한 보편주의적 차원이 발생한다는 점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사생활과 개인적 양심을 자율화함으로써 자연적인 소속이나 일차적인 문화들이라고 할 만한 것을 국가 아래에 복속시키고 변형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은 국가나 공적 영역이 존재한다는 사실에서 자신의 직접적인 소속으로부터 거리를 유지하는 커다란 틈새를 확보할 수 있다. 노동자이든 여성이든 동등하게 자신들의 투쟁을 조직하고 갈등적인 주체로서 자신을 정립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오직 그들 각자가 개인으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국가의 정치신학에서 벗어나기

그렇다면 애국주의를 주장하는 이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국가 사랑을 우리가 적극 옹호하자는 것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국가를 정치적 보편성의 심급으로 실체화하는 것은 그것이 부르주아사회 혹은 자본주의적 시민사회의 적대 혹은 구성적 분열로부터 국가가 출현한다는 것을 괄호 쳐버린다. 사실 진보운동에 더 익숙한 것은 주권적 개인의 결사체로서의 국가 혹은 공화주의적 국가가 아니라 계급적인 국가다. 여기에서 우리는 지배계급의 이해를 도구적으로 대변하는 국가를 재탕하는 것이 아니다. 계급적 국가란 법률적으로든 인격적으로든 자유로운 개인 사이의 관계를 보편화함으로써 착취 관계를 효과적으로 조직할 수 있는 국가를 가리키는 이름일 뿐이다. 그러므로 국가가 유효한 정치적 공동체로 작동할 수 있는 조건은 역설적이게도 그것의 가능성을 끊임없이 내부로부터 파괴하는 자본주의적 적대 관계 자체이다. 다시 말해 국가로 하여금 자신을 보편적인 정치적 공동체처럼 현상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그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라 할 자본주의적 사회관계, 즉 적대와 불평등의 보편성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이한 운명에 처하지 않을 수 없다. 착취와 불평등을 고발하고 개선하기 위해 우리는 더 많은 권리, 더 좋은 법에 호소하려 한다. 그러나 국가는 그럴수록 효과적인 정치적 공동체로 구실하지 못한다는 점을 드러낸다. 그래서 국가를 제거한다면? 놀랍게도 그것은 자본주의를 비판할 수 있는 가능성 자체를 제거하는 것이기도 하다. 국가 없이는 자본주의도 가시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자본주의적 보편성과 정치적 공동체로서 국가가 갖는 보편성은 전적으로 서로에게 의존하면서도 또한 근본적으로 모순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유와 평등은 공화국만으로는 불가능하다고 말해야 한다. 무엇에 대한 자유와 평등인가. 그것을 묻지 않고 그 투쟁을 개시할 수는 없다. 국가가 정치적 공동체로서 보편성을 담지하려 한다면 그것은 결국 자본주의와의 대결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오직 공화국만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공화국이 더 이상 아니다. 그냥 정치를 추방한 사회일 뿐이다.

글·서동진
계원디자인예술대 교수, 문화평론가. 저서로는<록, 젊음의 반란>(1998), <디자인 멜랑콜리아>(2009)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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