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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각자의 길로 천국에 가야 한다
누구나 각자의 길로 천국에 가야 한다
  • 베라 홀라이터|자유기고가
  • 승인 2009.12.03 21:02
  • 댓글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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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다문화] 독일 여성이 말하는 한국 사회
‘인터넷 게릴라들’ 욕설 불구 격려·위로 더 많아
누구나 다른 누군가의 외국인…‘차이’ 존중해야

“누구나 각자의 길로 천국에 가야 한다.” 나는 한국에 사는 동안, 조선의 세종대왕에 버금가는 프러시아의 왕인 프레데릭 대제가 남긴 이 말을 자주 떠올린다. 이 경구는 1740년 프레데릭이 프러시아제국에서 종교의 자유를 재확인하기 위해 내뱉은 말이지만, 이제는 흔히 선택의 자유를 강조할 때 쓰인다. 이를테면 여기에는 라이프스타일의 선택이나 직업 및 배우자의 선택 같은 보편적 선택의 자유가 포함된다.

프레데릭의 이 발언은 프러시아의 수도이기도 했던 베를린에선 자유로운 사회를 강조할 때 가장 많이 인용되는 말이 됐다. 예컨대 한 여름에 짧은 팬티 외에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거리를 뛰는 남자, 머리를 빡빡 민 여자, 머리를 울긋불긋하게 염색한 펑크족, 크리스토퍼 거리에서 휘황찬란한 행진을 벌이는 게이들, 그리고 자신들의 전통을 유지하는 이민 공동체 등은 바로 이 한 구절로 설명된다.

나는 종종 이해하기 힘든 낯선 것을 마주치면, 혼자서 조용히 이 말을 되뇐다. 내가 생각하는 프레데릭 경구의 현대적 버전은 이렇다.

“그것이 나를 위한 일이 아니지만, 당신이 무엇을 원하든지 편한 마음으로 하라.”

사람들이 나의 라이프스타일뿐 아니라 식생활 습관, 외모, 종교, 그 밖의 것들을 놓고서 내가 있는 자리에서 또는 내가 없는 자리에서 말할 때, 나는 바로 이 문구를 떠올렸다.

다양성 인정, 말처럼 쉽지 않아

해외에 체류하는 사람이나, 그런 외국인과 함께 사는 사람들은 자신이 익숙했던 것과는 아주 다른 낯선 라이프스타일과 마주하기 마련이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놀랍고 당황스럽지만,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은 상이한 라이프스타일의 다양성을 가까스로 받아들인다. 이런 과정이 바로 다문화 사회의 근본을 이룬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다문화 사회를 이룬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주류 문화에 새롭게 편입하는 ‘낯선 사람들’을 통합하는 일이 가장 큰 과제다. 오랜 이민의 역사를 가진 몇몇 국가들은 경험을 통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가기도 한다. 독일의 경우, 1960년대 경제 활황 이후 이민자를 대거 받아들여 큰 규모의 이민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다. 오늘날 독일 인구의 약 19%가 이민자이거나 이민자 출신 후예들이다.

 


하지만 독일의 상황은 결코 완벽하다고는 볼 수 없다. 1990년대 후반, 보수당은 독일이 이민국가가 아니라고 강조하고 나서는 등 반외국인 정서의 기류가 점차 확산될 기미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문화적 정서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슬람 사원의 건립에 반대하는 시위에 나서고, 또 상당수는 외국인이 경제위기의 와중에 일자리를 훔쳐가고 있다고 비난한다. 더욱이 외국인의 일자리가 독일인이 별로 관심을 갖지 않는 청소부, 건설노동자 같은 직종인데도 말이다. 이처럼 독일에서 이뤄지는 외국인에 대한 형편없는 선동은 먼 타국에서 자신의 젊음과 능력, 건강을 헌신한 사람들에 대한 멸시감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한국에서는 변화 속도가 워낙 빠른 만큼, 이민 문제는 다소 낯선 현상으로 생각된다. 내 생각에는 아직 많은 한국인이 상당수 외국인이 한국에 살기 위해 와 있다는 사실을 체감하지 못하며, 따라서 다문화 사회에 대한 고민을 별로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많은 한국인이 생각하는 외국인의 스테레오타입(전형)은 북미 출신의 백인으로, 이들은 영어를 가르치거나 돈을 벌기 위해 또는 즐기기 위해 잠깐 왔다가 가는 사람들이다.

물론 대부분의 외국인은 언젠가는 한국을 떠나 자신의 나라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한국에는 이곳에 살기 위해 온 적지 않은 이주노동자와 외국인 배우자가 있다. 이들로 인해 미래의 한국은 이민의 새로운 물결을 맞을 것이 분명하다.

최근 몇 가지 흥미로운 한국 관련 뉴스가 나왔다. 첫째,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가장 낮은 출산율을 기록했고, 기대수명은 빠른 속도로 늘어나 머지않은 장래에 노인국가가 될 것이라는 점이다. 둘째,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 비율이 2040년에는 약 10%가 될 것이라는 점이다.

통계적으로 보면, 한국은 외국인 혐오증을 가질 이유가 없다. 물론 모든 국가가 그러하지만.

한국은 곧 인구 감소 추세에 대처하기 위해 외국인을 필요로 할 것이다. 그 무렵에는 한국만이 저출산을 겪는 산업 선진국이 아닌 탓에 경쟁력 있는 외국인 노동자를 확보하기 위한 치열한 국가 간 경쟁을 벌일 게 분명하다.

얼마 전, 인도 출신의 한 교수가 버스에서 인종차별적 욕설을 당해 법정까지 갈 수밖에 없었던 사건은 한국의 긍정적 이미지를 훼손했다. 한국에 사는 외국인 가운데 일부는 자국의 미디어와 관련된 일을 하고 있고, 일부는 블로그와 인터넷 포럼을 운영하고 있다. 이들은 주로 한국에서 외국인이 겪는 문제를 다룬다. 따라서 한국에 관한 뉴스는 한국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세계 밖으로 향하고 있다. 만일 인도의 고급 인력이나 아프리카의 인재들이 인터넷이나 신문을 통해 한국이 인도인이나 아프리카인에게 아주 불편한 곳이라고 깨닫는다면, 다른 나라를 택할 것이다. 독일이나 다른 국가들이 이들에게 더 매력을 줄지 모를 일이다.

컴퓨터를 끄는 수밖에 없었다

한국은 세계에서 인터넷 네트워크가 가장 발달한 나라다. 하지만 인터넷은 친구이면서 적이 될 수 있다. 한국의 높은 인터넷 이용률은 정보의 신속한 전달과 한국에 관한 좋은 뉴스의 빠른 전파를 가능하게 하지만, 한편으로는 상대방에게 모욕감을 주는 나쁜 루머와 스캔들을 만드는 통로로 이용되기도 한다.

실제로 일부 한국 네티즌은 스스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하고, 상대를 응징하는 인터넷 게릴라가 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판단은 종종 사실에 기초하지 않는다. 내 경우 <서울의 잠 못 이루는 밤> 출간 후 인터넷에서 공격을 받았을 때, 네티즌 대부분이 심지어 내 책을 읽지도 않고 나를 비난했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그들은 검증되지 않은 틀린 번역문에 의존했다. 물론 모든 나라에는 원인에 대한 규명 없이 판단부터 하고 보는 인터넷 이용자가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번에 내가 놀란 것은 그같은 인터넷 소문에 실제로 귀기울이는 한국인이 적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이다.

하지만 인터넷 공간을 오염시키는 네티즌은 결코 한국 사회를 대표한다고 볼 수 없는 지극히 적은 무리의 인터넷 이용자다. 내가 아는 모든 한국인 가운데 인터넷에서 모욕적인 언사를 일삼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그들은 대개 교육을 잘 받았고, 지각 있는 성격이며, 폭력을 행사하는 작은 그룹의 네티즌과는 공통성이 없는, 유쾌한 사람들이다. 그렇지만 그런 사람들조차 한국 언론의 보도에 따라 인터넷의 댓글이 과반수의 의견을 반영하고 있다고 믿는다.

네티즌은 흔히 주목받길 원하고, 불행하게도 많은 한국인은 그런 그들에게 관심을 보인다. 이같은 네티즌의 탈선에 유일한 해법이 있다면, 그것은 아예 그들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한국에서 인터넷 모욕을 경험하면서, 나에 대해 쓰인 어떤 글도 읽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내가 택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방법은 컴퓨터 스위치를 끄는 것이었다.

비록 내 책에 관한 인터넷 스캔들이 유쾌하진 않았지만, 나로서는 지금까지 겪은 최악의 경험은 아니었다. 나는 이 사건 후 한국인과 외국인 친구·동료들로부터 격려와 위로를 받았다. 특히 나는 내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많은 한국인이 나를 적극 방어했다는 사실을 알고서 적이 감동을 받았다.

나는 처음 한국어를 배울 때 ‘정’이라는 단어를 배웠다. 한국어 사전은 이 단어의 의미를 ‘호의’(affection)나 ‘동정’(compassion)으로 표기했으나, 나로선 항상 그 의미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한국인이 나를 변호하는 것을 보고서, 나는 마침내 ‘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았다. 나는 테네시 윌리엄스가 쓴 희곡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마지막 장면에서 블랑시 뒤부아의 대사를 떠올렸다. “나는 낯선 이들의 친절함에 의지했다.”

내게는 이 구절만큼 외국인의 느낌을 완벽하게 묘사해주는 말이 없었다. 즉, 그것은 종속적이고 나약한 존재의 기분, 그리고 그토록 갈구했던 도움을 마침내 얻었을 때의 감사함을 담고 있다.

그러나 낯선 이의 친절함은 외국인이 항상 의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많은 국가에서 외국인은 여전히 예측불허의 불안정한 상황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외국인, 위협적 존재 아닌 공헌자

현지 주민은 대개 외국인의 고달픔을 잘 알지 못한다. 그들은 외국인을 그들의 관습을 거부하고, 자신의 삶의 방식을 고집하는 침입자로 보는 듯하다. 특히 외국에 살아본 적이 없는 사람들로서는 외국인이 어떤 문제를 안고 있는지 상상하기 힘들다.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외국인과 현지 주민의 관계가 오해로 가득한 것이 사실이다. 양쪽은 그들이 각자 누구인지, 어떤 점에서 서로 다른지 이해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주 자신들의 문화적 정체성이 실종되지나 않을까 두려워한다.

하지만 내 생각으로는 현지 공동체가 외국인을 위협적인 존재로 보지 않고 사회를 풍요롭게 발전시키는 공헌자로 이해한다면, 이민과 문화의 교류는 국가를 더욱 강하게 만들어준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모든 문화가 동등하고 귀중하며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세계 어딘가의 외국인이다. 외국에 사는 한국인은 한국의 전통을 고수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한국에 사는 외국인 역시 자신의 문화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것은 당연하다. 서로 다른 문화들은 나란히 존재할 수 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각자의 방식대로 천국에 가야 한다.”

글·베라 홀라이터 Vera Hohleiter
1979년 독일 하일브론에서 태어났다. 베를린과 파리의 대학에서 문학·정치학·역사학을 공부했다. 여러 신문과 잡지에 글을 쓰고 있으며, 문학잡지와 동인지에 단편 에세이가 실렸다. 현재는 서울에 살며 한국방송 <미녀들의 수다> 등 한국 텔레비전과 라디오에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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