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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 앞에 무릎 꿇은 평화주의
파시즘 앞에 무릎 꿇은 평화주의
  • 가이드 미나시앙
  • 승인 2016.11.21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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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 체제의 위험 앞에서 프랑스 인민전선은 집단 안보와 군비 확장을 통해 평화가 유지되기를 기대했으나, 독일이 소련과 상호 불가침조약(1939년 8월 23일)을 조인함으로써 프-영-소의 집단안보가 무산되고, 결국 영국과의 연대도 실패하고 만다. 


1차 세계대전 후 자본주의 경제가 성장세를 회복해, 경제 번영의 시기(1922~1929)가 도래했으나, 1929년 미국에서 발생한 경제 공황은 전 세계로 확대됐다. 1929~1939년 ‘암흑기’에 은행은 도산하고, 수많은 실업자가 거리로 쏟아졌다. 1935년 프랑스의 실업자는 100만 명으로 집계되는데, 이는 1931년의 2배에 달하는 수치다. 1930~1935년 프랑스의 국민소득은 30% 감소했다. 인구감소와 노령화 현상이 일어났으며, 소규모 기업들은 치열한 국제경쟁에 대처하지 못해, 프랑스 경제구조의 선천적인 약체성을 드러냈다. 이러한 가운데, 우익의 프랑스와 좌익의 프랑스라는 ‘두 개의 프랑스’가 다시 나타났다. 우익의 상류층 청년들, 즉 젊은 왕당주의자들로 구성된 ‘프랑스 행동대(Action française)’는 좌파에게 책임이 있다며 공격했으나, 좌파 노동조합 등 공화파 세력들은 20세기 초 드레퓌스 사건 때처럼 총 단결했고 프랑스는 다시 좌경화됐다. 좌익을 형성하고 있던 급진사회당, 사회당, 공산당은 1936년에 힘을 합쳐 ‘인민전선(Front populaire)’을 조직했다. 이들은 그 해 선거에서 승리했고, 레옹 블룸이 이끄는 인민전선 내각이 출범했다.

평화주의를 앞세운 블룸의 인민전선

인민전선 내각은 주 40시간 노동제, 프랑스 은행과 철도와 군수 산업의 부분적 국유화, 노사분규의 강제적 중재, 사회복지 정책의 실시 등 사회 입법을 의회에서 연달아 성립시켜 ‘블룸의 실험’, ‘프랑스의 뉴딜’로 불렸다. 이에 대한 프랑스 유산계급의 불안은 커져갔다. 우익은 “블룸보다 차라리 히틀러가 낫다”며, 블룸이 노동자들에게 필요 이상으로 여가만 늘려줬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당시 좌파연합은 “인민전선에 반대하는 자는 히틀러의 지자이며, 곧 전쟁광이다”라고 반박했다. 인민전선에게 승리를 안겨준 1936년 4~5월 선거유세의 쟁점은 외교정책이었다. 1935년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침공했고, 같은 해 프랑스와 소련이 동맹조약을 맺었다. 특히 1936년 2월 스페인에서도 인민전선(프랑스의 좌파연합과 이름 및 노선이 같다)이 집권에 성공했으나, 한 달 후인 3월 7일, 히틀러가 라인란트에 진주했다(이는 베르사유 조약을 정면으로 위반한 것이었다-역주). 이런 상황에서 블룸의 파시즘 비판은 유권자들을 파고들었다.    
그러나 이런 국제 정세 속에서도, 인민전선은 외교정책을 우선시하지 않았다. 무솔리니가 에티오피아 합병을 선언할 때 아디스아바바에서 프랑스는 홀로 국제질서를 재정립할 수단이 없었고, 1934년 폴란드와 불가침협정을 맺은 독일의 위협 앞에 체코슬로베키아,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를 계속 보호할 힘도 없었다. 히틀러가 재무장한 상황에서, 프랑스는 1935년 독일과 체결한 로카르노 조약을 지켜내기도 힘들었다. 이 모든 질문에 레옹 블룸은 “평화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프랑스인들이 있을 때, 프랑스의 목소리가 유럽 전역에 힘차게 울려 퍼질 것”이라고 답했다.

블룸 내각 외교정책의 기조는 ‘평화’로, 전쟁 거부, 집단 안보, 군비감축의 3가지 원칙에 입각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의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한 프랑스인들은, 계속 정부 지도자들에게 전쟁에의 두려움을 상기시켰다. 평화의 바람이 프랑스에 불고 있었다. 레옹 블룸 총리는 ‘언젠가 전쟁을 유발할 수 있을’ 분쟁의 원인이 제거되기만을 원했다. 그리고 이런 암울한 시각에서 벗어나기 위해 레옹 블룸은 집단안보의 효과와 법에 의한 분쟁 해결을 지지했다. 블룸은 유일한 법적분쟁해결기구인 국제연맹을 가장 중요시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평화를 보장하는 두 기둥인 집단안보와 전반적인 군비감축이 함께 이뤄져야 했다. 중재 판결이 이뤄지고 평화적 제재가 부과되러면 각국이 ‘상당부분 군비감축’을 이뤄야만 한다. 레옹 불룸은 인민전선 연합세력의 균형유지를 최우선시했다. 국방부 장관에는 에두아르 달라디에, 외교부 장관에는 이봉 델보스 같은 급진 사회당(이하 급진당) 출신이 중용됐으며, 공산당은 의회에서 활약했다. 불룸의 대외 정책은 인민전선을 구성하는 여러 세력 간의 모순을 그대로 반영했다. 게다가 그는, 프랑스가 독일과 이탈리아 같은 과격한 이웃 나라들에 맞서 홀로 대처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나라와 연합할 것인가?

우선, 미국은 국제연맹 회원국도 아니었으며, 미국 정부는 대서양 저편에 있는 동맹국에는 관심이 없었다. 소련은? 소련 정부는 인민전선(스페인, 프랑스) 조직을 통해 파시즘에 대항하는 공동전선을 구축하는 전략에 찬성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급진당과 우파는 반대 성향의 동맹세력을 원치 않았다. 이탈리아는 어떨까? 공산당도 블룸도 이를 원치 않았다. 블룸은 이 같은 면에서 그의 전임자인 피에르 라발(후에 친독성향의 비시 정권하에서 총리직에 오른다)과 구분된다. 라발은 무솔리니와의 제휴가 이탈리아-독일 동맹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남은 것은 스탠리 볼드윈 총리가 이끄는 영국과의 제휴다. 볼드윈 영국 총리는 영불협상(1904)의 틀 안에서, 인민전선 및 이후 집권한 프랑스 정부가 1935년 6월 18일 체결된 해군협정으로 상징되는 독일에 대한 유화정책을 받아들이게 하는데 성공했다. 이 해군협정으로 나치 독일은 전투함대를 보유할 수 있게 됐다. 1935년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침공했을 때, 프랑스와 영국은 이탈리아에 가벼운 제재를 취하기로 합의하며 국제연맹 기본원칙의 권위를 스스로 침해했다.

1936년 영국은 또다시 프랑스의 독일에 대한 군사 반격을 만류했다. (가믈랭 프랑스 육군참모총장의 기억에 의하면) 프랑스가 독자적으로 행동할 수 없었고, 영국이 히틀러의 라인란트 재점령을 위협으로 간주하지 않았기 때문에, 프랑스는 영국의 뒤에 물러서 있었다. 특히 이봉 델보스와 급진당 측이 이 같은 입장 표명에 책임이 있었다. 외무장관인 델보스의 존재만으로도 평화주의와 영불 협상에 본능적으로 집착하는 급진당은 안심할 수 있었다. 사실 인민전선의 대외정책에는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민주주의 국가들은 서로에게서 고립된 채 파시즘의 위협에 노출돼 있었다. 

스페인 내전, 모든 상황을 급변 시키다

그러나 스페인 내전 발발로 프랑스는 현실과 고통스럽게 조우하게 된다. 레옹 블룸 집권 후 3개월도 채 되지 않은 1936년 7월 18일, 스페인 내전이 일어났고, 이로 인해 프랑스의 외교정책에 일시중단 상황이 왔다. 1938년 4월, 스페인의 인민전선 정부가 붕괴됐다. 레옹 블룸은 후에 “상황이 매우 급변했다”고 고백한다. 내전이기 때문에 국제연합에는 중재 권한이 없었다. 블룸 정권은 프랑스에서도 내전이 일어날까 우려했다. 블룸의 요청에 따라, 8월 유럽 열강들이 모여 스페인 불간섭 협정 관련 협상을 벌였다. 

그러나 블룸은 히틀러 앞에서 순진하게 굴지는 않았다. 1936년 가을, 국방예산을 둘러싸고 뱅상 오리올 재무장관과 에두아르 달라디에 국방장관 사이에 이견이 있을 때였다. 군 참모본부가 요구한 국방예산은 90억 프랑이었는데, 놀랍게도 블룸은 4년에 걸쳐 140억 프랑의 예산을 할당했다. 스페인 불간섭 협정 관련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인민전선 정부는 판도를 뒤집어 역동적으로 군비확충에 나섰다. 중대한 전략 수정이라 할 수 있다.

 1937년으로 넘어가는 시점에, 레옹 블룸은 유럽이 심각한 위험에 직면해있으며 프랑스는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프랑스는 미국과의 연대를 시도했지만, 프랑화 평가절하에 상응하는 조치들과 수요정책을 이용해 경제성장을 회복세로 돌리는 방안에 대한 의견 교환 외에는 구체적인 성과가 없었다. 대소련 정책은 1935년에 체결된 조약 비준을 막고, 소련이 스페인 정부군을 군사적으로 지원(비행기, 전차, 기관총, 소총, 군사고문단 파견)하는 것을 비판하는 급진파의 단호한 태도에 부딪혔다. 인민전선의 대소련 외교는 스탈린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더 진전되지는 못했다.

결국 프랑스는 1936~1937년 스탈린의 피의 숙청 기간에 신중한 입장을 견지했다. 프랑코 군대에 유리해진 스페인 내전 상황은 독일과 이탈리아에는, 1936년 11월부터 반민주주의, 반공산주의 독-이 전선을 구축하는 기회가 됐다. 사실 독일과 이탈리아는 스페인 파시스트들에게 비행기, 탱크, 탄약, 군사고문단을 지속적으로 지원공급하고 있었다. 한편 프랑스는 중립을 지켰다. 레옹 블룸은 프랑코 군대에 맞서 싸우는 정부군 측의 국제여단 자원자 모집과 군비 수송에 눈 감은 채, 비공식적으로 ‘느슨한 불간섭’ 전략을 고수했다. 프랑스 정부가 개혁 행보를 ‘중단’한 1937년부터 유럽에 드리운 전운은 점점 짙어졌다. 경제상황이 파국으로 치달으면서 프랑스 정부는 국내정책에 힘을 쏟았고, 이로 인해 1937년 6월 인민전선 내각은 붕괴했다.

히틀러의 오스트리아 합병 다음날인 1938년 3월 13일, 급진당의 카미유 쇼탕 내각(1937.6~1938.1)의 뒤를 이어 총리로 복귀한 레옹 블룸(2차 블룸 정부-역주)은 전쟁이 불가피함을 깨달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스페인 카탈루냐로 군대를 보내는 생각도 고려해봄직했다. 그러나 때가 아니었다. 재집권 한 달 후인 4월 10일 블룸 정부는 상원에 의해 전복됐다. 평화주의자 에두아르 달라디에가 블룸의 뒤를 이어 총리직에 올랐다. 달라디에 정부는 사회주의자는 배제한 채 우파 장관들을 입각시켰으며, 의회에서도 공산주의자들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 인민전선이 무너졌다. 전쟁의 북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히틀러가 체코 수데티 지역을 병합하고 1938년 9월 30일 뮌헨 협정을 통해 이를 법적으로 유효하게 만들면서 먼저 체코에서, 이어 1939년 9월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전쟁이 시작됐다.

블룸은 사회당의 내부 균열 때문에, 혹은 동맹은 맺었지만 비타협적인 급진당, 공산당과 충돌하면서 인민전선을 통합의 구심점으로 만들어내는 데 실패했다. 인민전선에 종지부를 찍은 달라디에(Daladier) 정부는 1938년 4월부터, 독재자 히틀러가 집권한 나치스 독일에 대한 전쟁을 준비했다. 경제 위기에 의해 쇠약해지고, 정치적으로는 좌·우익으로 양분된 데다가 외교적으로 고립되고, 단지 방어전략 하나 밖에 없는 프랑스는 사실상 교전 준비가 거의 안 된 상태였다. 1939년 9월 1일 새벽, 독·소 불가침 조약을 맺은 독일 국방군은 폴란드 국경을 침범했다. 이에 대한 맞대응으로 프랑스는 영국에 이어 마지못해 독일에 전쟁을 선포했다.

프랑스군은 이미 전의를 상실했기 때문에 거의 저항하지 않았다. 그리고 파리를 ‘무방비 도시'로 선언해 전투 없이 독일군에게 내줬다. 1940년 6월, 파리 함락으로 인해 총리가 된 제1차 세계 대전의 ‘영웅',  페탱 원수는 독일에 항복하고 휴전 협정을 체결했다. 이어 비시 정부를 세우고 제3공화정 헌법을 폐지, 스스로 국가 주석에 취임해 피에르 라발과 함께 독일에 협력, 독재적 전체주의 국가 체제를 만들었다.  


글·가이드 미나시앙 Gaïdz Minassia
역사학자

번역·조승아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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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드 미나시앙
가이드 미나시앙 역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