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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프롬나드] 섹스, 바람, 똥, 참을 수 있는 존재
[안치용의 프롬나드] 섹스, 바람, 똥, 참을 수 있는 존재
  • 안치용 / 한국CSR연구소장
  • 승인 2017.10.12 16: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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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차를 몰고 나가는데, 타이어 공기압을 점검하라는 표시가 들어왔다. 타이어에 펑크가 난 건 아니고, 갑작스러운 기온하강으로 공기밀도가 줄어들어 공기압 또한 떨어진 것. 고무공간 안에서 밀폐되어 지내는데, 온도변화로 위축까지 되었을 공기 입자들을 생각하니 가엽다. 사람도 이런 날 혈관계통에 문제가 있으면 손발이 시리거나 머리가 아플 것 같다. 혈압이 떨어져 머리로 밀어 올리는 혈액이 줄어들면 없던 두통이라도 생기겠지.

 

나에게는 아직 그런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 계절의 전환 앞에서 두통으로 고개를 갸우뚱하는 (당사자들은 동의하지 않겠지만) 우아함 같은 건 없다. 차량의 공기압 표시등처럼 이럴 땐 정확하게 그저 비염이 찾아온다. 변화에 대응하는 나의 몸은 연달아 재채기를 하거나 코를 훌쩍거린다. 아무리 우기려고 해봐야 비염에서 우아함을 기대하긴 어렵다. 기품이 저절로 우러나는 요즘 같은 본격적인 가을의 문턱에서 코나 풀다니.

 

변화는 앞서 아침 산책에서 체감했다. 어젯밤 잠들기 전에 보아둔 일기예보를 떠올리곤 오늘 아침 집을 나가기 전에 힐끔 파카를 쳐다봤지만, 어제와 동일하게 바람막이를 걸치고 산책을 나섰다. 애초에 분리 불가능한 털옷을 입은 개들에게서 기온변화로 인한 불편 같은 게 느껴지지 않았다. 개는 아니지만 개털은 가을과 잘 어울리는 단어이다.

 

뭔가 한기가 느껴지는 아침 공원에서 코를 훌쩍이다 오늘은 낯선 방문객을 만났다. 반팔 셔츠에 정장 바지를 입고 홀로 벤치에 앉아 있는 젊은 남자. 드러난 맨살을 가릴 웃옷 종류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반팔 차림의 그 남자는 추운 기색 없이 앉아 특이하게도 책을 읽었다. 쌀쌀한 가을 아침 공원에서 반팔 차림으로 책을 읽는 젊은 남자. 살아온 경험에 근거한 일종의 편견에 입각하여 판단하면 그에게서 지적인 인상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떤 인상의 사람이든 요즘 공원에서 책 읽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모두 스마트폰을 열심히 뒤적일 뿐.

 

나는 그 남자가 무슨 책을 읽는지 무척 궁금했다. 하지만 책 표지가 보일 듯 말 듯 그 남자의 손 밑에서 희미했고, 더구나 물어볼 엄두를 낼 수는 없었다. 어젯밤 귀갓길 전철 안에서는 맞은편 사람이 무슨 책을 읽고 있는지 알아냈다. 슬리퍼에서 발을 반쯤 빼낸 채 뒤꿈치를 살짝 들고 엉덩이를 의자 뒤쪽까지 밀어 넣지 않아 약간 펼쳐지듯 배를 접은 자세를 한 여자가 읽은 책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었다. 아침 공원의 남자와는 자세가 달라 책 표지를 비교적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표지 그림으로 보아 민음사에서 번역한 책이었고, 읽은 분량으로 보아 테레자와 토마시의 사랑이 본격화하기 전이지 싶었다. 테레자가 일종의 외도로 토마시가 아닌 다른 남자와 섹스를 하는 대목이 문득 기억났다. 테레자는 섹스 후에 곧바로 그 낯선 남자의 집에서 화장실로 달려가 용변을 보았다.

 

섹스, 바람, 똥. 스콜과 걸리버로 말하자면, 당연히 그 남자의 책에는 관심이 없다. 시종일관 다른 개의 분비물 냄새를 식별하느라 나를 이리저리 끌고 다닐 뿐이다. 그러다가 엉거주춤, 엉덩이를 새우처럼 구부린 게 곧 똥을 쌀 기세다. 나는 주머니 속에 손을 넣어 비닐봉지가 있는지를 확인한다. 곧 타이어 공기압 표시등의 경고를 마주할 쌀쌀하고 우아한 가을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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