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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연의 시네마 크리티크] 좀비를 피해 달리는 두 가지 방법:탈출하거나 혹은 귀환하거나 <서울역>(2016, 연상호)
[이대연의 시네마 크리티크] 좀비를 피해 달리는 두 가지 방법:탈출하거나 혹은 귀환하거나 <서울역>(2016, 연상호)
  • 이대연(영화평론가)
  • 승인 2017.12.11 17: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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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서울역이 그들의 집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 수도 서울의 한가운데 있으면서도 지방에 가기 위해서는 거쳐야 하는 출구이며, 반대로 지방에서 서울로 들어오기 위해서 통과해야 하는 관문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마치 클라인의 병처럼, 지상 위로 솟은 거대한 구조물과 깊은 지하통로가 서로 뒤엉키는 그곳은 중심이자 가장자리이며 내부이면서 동시에 외부이다. 그 정체불명의 모호한 공간에 그들이 있다. 서울역이라는 공간의 모호함이 그들을 규정한 것일까, 서울에 살면서도 서울의 질서 밖에 있는 그들은 쉽게 발견되지만 쉽게 포착되지 않는 반투명의 허상으로 존재한다. 서울역이라는 커다란 구멍 주변에 떨어진 얼룩 같은 존재들이다. 우리는 그들을 ‘노숙자’ 또는 ‘노숙인’이라고 부른다. 
 
그런 까닭에 <서울역>의 괴질이 그들로부터 시작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징후란 종종 내부의 질서로는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연상호 감독의 전작 <사이비>에서는 김민철이, <돼지의 왕>에서는 정종석이 그 역할을 맡았다. 타지를 떠돌다 고향에 돌아온 김민철은 포악한 인물이다. 그는 겉으로는 평화로워보이는 마을이 수몰 보상금을 노린 상비 교회에 의해 장악되어 있음을 눈치 채고 이를 파헤친다. 그런가 하면 정종석은 학교라는 질서정연한 공간에서 ‘개 돼지 같은’ 존재로 사육되고 성장하는 비정한 현실을 깨닫고 살인을 저지른다. 그들에게 선악이나 능력의 유무, 도덕과 부도덕은 의미가 없다. 단지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만이 중요할 뿐이다. 
 
<서울역>은 잘 알려진 것처럼 실사 영화인 <부산행>의 프리퀄이다. 물론 전사(前史)라기보다는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는 별개의 이야기에 가깝다. 구체적으로는 <부산행>에서 뉴스를 통해 스쳐가듯 영상이 비쳐진 ‘폭동’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좀비’로 통칭되는 정체불명의 감염자들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폭동의 실체에 대한 영화다. 보다 정확히 말해 ‘왜 폭동으로 불리게 됐는가’에 대해 말하고 있다. <부산행>을 통해 짐작할 수 있듯이, 폭동은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폭동으로 규정된 재난이 있었을 뿐.
 
 
<부산행>에서 서울역을 출발한 KTX의 목적지는 부산이다. 서울과 부산이라는 두 점을 잇는 가장 빠른 길이다. 그러므로 열차는 하나의 직선이다. 그 직선이 만든 질서 위에서 그들의 탈출은 평온하다. 감염된 소녀가 열차 안으로 뛰어들지만 않았어도, 아마 그들은 모두 무사히 부산에 갈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수면에 떨어진 잉크 방울처럼 순식간에 승객들이 감염되며 일어난 혼란은 그들의 안전을 위협한다. 점과 점 사이를 어긋나고 가로지르며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확장되는 감염은 직선의 질서로는 감당할 수도, 파악할 수도 없는 공포이다. 직선으로 뻗은 길에 일어난 균열인 것이다. <부산행>은 ‘탈출기’에 가깝다. 정작 그들이 도망쳐야 하는 것은 좀비가 아니라 권력과 자본이다. 금세 끝날 것 같던 그들의 탈주는 마치 이스라엘 민족의 엑소더스처럼, 출발과 도착 사이의 공간을 떠돈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이 그러했듯 손에 피를 묻힌 자들은 탈락하고 소녀와 임산부만이 부산에 들어간다. 반면 <서울역>의 인물들은 탈출구를 찾지 못한다.
 
 
 
노숙인은 집이 없는 사람들이 아니다. 길이 그들의 집이고, 안과 밖, 중심과 주변이 겹치는 공간으로서의 서울역이 그들의 길이다. 가출소녀 혜선이 좀비에게 쫓기며 집에 돌아가고 싶다고 훌쩍이자 나이 든 노숙인이 덩달아 “나도 집에 가고 싶다. 그런데 돌아갈 집이 없다”고 통곡할 때 그의 탄식은 단순히 집이 없음을 토로하지 않는다. 그의 집이 서울이라는 도시 내부의 질서에 포획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혜선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녀는 자신이 노숙인들과 다르다고 믿었다. 돌아갈 집이 있고, 자신을 찾는 아빠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유일한 피난처이며 끔찍한 상황에서도 생존해야 하는 이유였다. 그러나 그녀가 끝내 도착한 곳은 아빠라 불리던 포주의 품이며 꿈꿔보기에도 벅찰만큼 화려하고 근사한 모델하우스이다. 그들은 길 위에 있기에 안전한 출구를 찾을 수 없다.  연상호의 작품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속도감 넘치는 역동적 작화는 어쩌면 필연적이었을 것이다. 탈출구 없는 이들의 몸부림이기 때문이다. <부산행>이 실패한 (혹은 누군가에게는 성공한) 중산층의 탈출기라면 <서울역>은 출구도 전망도 없는 길 위를 떠도는 자들의 실패한 귀환기이다. 
 
 
<부산행>의 결말부가 구원과 희망의 가능성을 남겨두는 반면, <서울역>은 출구도 없고 전망도 없는 암울한 세계관으로 되돌아온다. 첫 장편 <돼지의 왕>에서 ‘돼지 되기’에 대해 말했다면, 이번에는 ‘좀비 되기’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도망가고 또 도망가는 지난한 과정의 끝에서 질문오는 것은 그런 까닭일 것이다. 죽거나 좀비가 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겠느냐고.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글: 이대연
영화평론가. 소설가. 저서로 소설집 『이상한 나라의 뽀로로』(2017), 공저 『영화광의 탄생』(2016)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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