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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과 함께-죄와 벌>의 연기술에서 받은 부조화의 인상
<신과 함께-죄와 벌>의 연기술에서 받은 부조화의 인상
  • 최원혁 | 영화감독
  • 승인 2018.02.12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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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한 연기라는 미명(美名)


나의 연기자 친구 하나는 언젠가 ‘하이퍼리얼리즘’이라는 자신만의 연기방법을 들려준 적이 있다. 영화 연기에 특수화된 연기자들은 연기자 자신만의 색이 담긴 리얼리티를 만들어낼 줄 알아야 한다는 전제로 연기하게 된다. 그러므로 리얼리티라는 것은 그 자연스러움의 보장과 동시에, 매 순간에 생경한 디테일을 산출할 줄 알아야 한다. 나름대로 영화계의 현실적 조건이 반영된 발상이었다. 여타의 미학적 논의와는 어쨌거나 다르게 생산자적 입장이 들어있어, 연기자의 시대정신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지론이 내게는 상당히 성마르게 느껴졌었다. 디테일을 대량생산한다는 듯한 뉘앙스도 끔찍하거니와 그 점이 리얼리티에 목마른 우리 영화의 어떤 논리적 극단인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디지털화로 더욱 명석해진 카메라가 잡아내는 한국인의 몸은 최근에 더욱 위화감이 풍기는 것이 되었다. 리얼한 연기라는 미명 아래, 시대착오적인 서구적 웅변술을 단지 외삽할 뿐인 바디 랭귀지를 겨우겨우 연마하거나, 한국어의 어감을 기껏해야 특정한 음감(가령 힙합이나 오페라)으로 환치해버린 것이 작금의 영화적 신체이다. 그제서야 누군가는 우리의 영화가 사실은 자신의 소중하고 미려한 것들을 다 갈아 버렸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비슷하게, <신과 함께-죄와 벌>에서 나는 마치 한국대중문화 전반의 극단적 분위기를 목도하게 된다. 리얼리티에 대한 실천의 어떤 과열이고, 그 배경으로 포스트식민주의의 서구적 웅성임이 서있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내러티브와 비주얼디자인, 카메라독트린에서도 느껴지지만, 참으로 연기자의 신체를 볼 때 더욱 그 특유의 부조화된 곯은 내를 맡게 된다. 따라서 나는 <신과 함께-죄와 벌>에서 그들의 연기를 유독 뜯어보게 되었다. 거기에 현행적 연기 일반의 어떤 경향이 있다고 믿으면서.
 
당장의 현상을 문헌에 의지하여서만 파악하려는 계보학적 탐사방법은 연기라는 대상을 인식하는 데는 전혀 맞지 않는 듯하다. 필요한 것은 문제제기이다. 상술한 것처럼 한국인 연기자들에게 부여된 지정학적 조건이 발생시킨 모순은 오늘만의 일은 아니다. 이 <신과 함께-죄와 벌>라는 영화의 특성은 장르 지향적이기 때문에, 더욱 도드라져 보이는 것이 있다. 본성상 부조화한 온갖 것을 한 몸에 억지로, 또는 정말로 무심하게 몰아 세웠다는 인상이 있다.

내가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은, 이 영화의 연기기술이란 전적으로는 소박한 리얼리즘에 위치하는 데 동의하면서도, 여전히 판타지세계라는 명분 때문인지, 연기자의 신체에 맞지 않는 옷들을 입혔다는 사실이다. 감독이면서도 연기자인 나로서는 이 맞지 않는 옷에 대해 꾸준히 의심해왔기에 조금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당장 개봉관에 걸린 영화를 생각해 보자. 첫째로 그들은 리얼리스트라기보다도 어쩌면 리얼리즘의 이상에 집착하는 것일 수도 있다. 둘째로 이 영화는 상술된 포스트식민적 상황 하의 모순에 끼어있는 것처럼 보이며 그 모순을 해소할 어떤 방편도 찾지 못했다. (여기에는 이른바 전환기의 한국이라는 기성 논의가 참조될 수 있다.)
 
첫째 경우를 보자. 리얼리티라는 것이 문제가 되는데, 그것보다는 핍진성이라는 개념이 분석틀로 쓸모가 있을 만큼 능동적으로 보인다.

핍진성 verisimilitude

핍진성은 다차원적 용어이지만 여기서는 가장 포괄적이라고 할 수 있는 자연과학에서의 용법부터 생각할 수 있다. 과학의 핍진성이란 외부적 관점에서 재고했을 때 진실임직해 보인다는 것이다. 개연성과는 다르게 사태의 인과를 따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직관적으로 보아 문제가 없다는 것에 가깝다. 결과적으로 하나의 판타지 영화가 만들어질 때, 그런 핍진성은 일원화되어 있다기보다도, 도처에 있어서 각 위치에서 볼 때 제각기의 핍진성의 구도가 있을 수 있다. 마치 각기 다른 위치에 있는 등대가 한 배의 안전한 운항을 보전한다는 아슬아슬한 안정감과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핍진성이란 것이 무슨 아름다움의 엄정한 기준이 되기도 하느냐.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핍진성이란 것은 유한적 조건 하의 제작자가, 관객을 주무르려는 목적으로 꼼꼼하게 검토하게 되는 하나의 지각적 틀이다. 츠베탕 토도로프의 ‘산문의 시학’은 추리소설의 예를 들어서, 소설이란 보다 큰 핍진성을 추구할지라도 여전히 더 큰 핍진성의 아래에 있을 뿐이라 한다. 이것이 서사에서의 핍진성이다. 특유의 불가피한 종속성 때문에, 핍진성을 충족시킨다는 것은 단지 유한성과 갖가지 물성에 머무르는 정도 이상은 아닐 것이다. 그 때문에 핍진성의 추구란 결국 항구적인 리얼리티의 이상과는 약간 비껴서 있는 듯 보이므로 마치 대안과도 같아 안심하게 만들지만, 실제로는 영원한 평행선만을 그리게 되는 수가 있다. 그런 불만에서 핍진성 자체를 비난하고 해소를 목표로 두면, 그럴수록 작가는 핍진성의 노예가 된다. 

연기술에서 보는 <신과 함께-죄와 벌>의 핍진성 

영화 <신과 함께-죄와 벌>의 구조는 어떠한 것일까. 특히 그 연기자의 비전은 어떤 식으로 조직되었을까. 그들 역시 외부적 조건인 관객의 눈에서 봤을 때 진실임직한 것을 따르기는 한다. 진실임직하기로는 역시 물론 한국연기자들을 배출하는 아카데믹한 리얼리즘이라는 담론의 구성체와도 연관될 것이다. 거기다 판타지라는 장르적 정체성에 반응하는 어떤 비교적 최근의 모호한 컨벤션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최종적인 주관적 판단의 결행. 그들의 연기는 이런 식으로 ‘합산되고’, 리얼리티는 ‘성취(成就)’된다.

합이란 곱과는 다르게 최초의 구성인자를 최종단계에서도 또 다시 보여주게 된다. 물론 고급스러운 모든 기술이란 으레 합보다는 일련의 곱하기나 나누기의 방법을 채택한다는 것 쯤 누구나 알리라. 하지만, 문제가 되는 이 합의 논리 속에 또 한번 저열한 것이 잠겨있다고 생각한다. 내 생각에 그것은, ‘보다 많이 보여주기’ 라는 욕망이다. 즉, 전시하기와 소유욕은 이 합의 논리의 주된 배경일 것이다.

좋다고 해서 그것을 한 바구니에 다 담는 것은 유치하기 짝없는 키마이라와 같이, 무기력한 괴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어쨌든 이 정도의 리얼리티가 적어도 상업적 성공에 의해 적정 수준으로 동의된 것으로 보이는 것이 현재의 상황이다. 이들은 모두 생생함의 ‘좋음’에 대해 믿음을 걸어두고 있다.

그렇다면 어떤 괴물인가-키마이라적 보편주의 - 중국과 서구, 우리
 
▲ 키마이라는 고대 그리스신화의 상상적 동물로, 뱀, 염소, 사자 등 공포의 대명사를 한데 강제적으로 결합한 공포의 동물이다. 고대에는 통했을지 몰라도 현대에선 이런 합산된 상상력은 우스꽝스러운데 지나지 않는다.
 
배우 주지훈의 이력은 화려하다. 신세대 엔터테이너로서 모델과 틴아이돌을 모두 경험한 그에게 연기술이란 심도 있는 사유의 장이라기보다도, 우선적으로 리얼리티만 확보되면 그만인 어떤 것일지도 모른다. 이정도가 대개 연기자의 평균이고, 연기자의 사회경제적 입지가 그런 태도들을 유도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것을 도덕적으로 탓할 필요는 없다. 이 연기자가 구현하는 핍진성의 논리가 어떤 식으로 키마이라적인지를 생각해보는 쪽이 중요하다. 

<신과 함께-죄와 벌>의 내용은 명계(冥界)로 영락한 현대한국인의 이야기다. 영화에는 저승사자와 지옥의 관료들이 등장한다. 글자 그대로의 중국몽일 ‘명계’에 한국어성(性)과 토착성이 개입된다.

어쩌면 이미 한국어권에서 역사적으로 제작되어온 문학이나 사물 일체가 이런 긴장 속에서 진행되어왔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그런 역사를 서둘러 인정하면, 그 컨벤션은 가히 하나의 독자적 리얼리티-세계를 구축했다고도 말해질 수 있으리라. 그런데 이런 생각은 어떤 점에서 그저 기만인 것은 아닐까. 리얼리티란 기껏해야 진실임직한 것일 뿐이다. 즉, 고작 핍진성에 특정 정도로만 기대기로 한 어떤 것에 리얼하다는 결정적 표현을 수여할 수는 없다. 그것은 늘 잠정적이다. 거기에는 ‘그만하면 된 것이다’ 식의 수준의 합의만이 가능하다.

그렇기에 현대의 관객층으로서는 자연히 영화에서 벌어지는 리얼리티의 그러한 권리주장 일체에 대해서 의아심을 품을 수밖에 없다. 나조차도, <신과 함께-죄와 벌>에서 재현해놓은 명계의 모습에 억지로 공감하도록 요구받는다고 느꼈다. 특히 그들이 의식적으로 공들인 리얼리티의 개개는 진실이라기보다도 진실임직한 것들로만 진열된 것처럼 느껴진다. 역설적으로, 그 끈질긴 노력의 구슬땀에 반비례하여서 제작자의 의중일 어떤 집착심을 회의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 노력의 무익한 확장은 명연기자, 명연기라고 하는 것들에 의해서 보상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에 도무지 끊이지가 않는다.)

 일전에 학교에서 배우면서, 유명 프로그램 전설의 고향을 고안한 나이든 PD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 저승사자란 것의 검정복장이나 흰 분칠 따위, 갓끈 따위가 사실은 빈약한 자료조사 아래 급조된 것이라 한 고백을 들었었던 것은 소중히 기억하고 있는 증언이다. (그런데, 이것이 실제로 우리가 저승사자로 알고 있는 모습 아니었나.) 도상이란 이미 우연선택적인 것으로, 불가능한 무엇이라 할 수 있다. 거기다 이 저승사라는 것은 그러고보니 명계라는 것의 주요한 구성인자이다.

이런데도 배우 주지훈의 연기방침은 저 나름의 이성을 통해서 명계의 관료를 리얼리티라는 이상의 수준에서 구성하려 했으니, 나는 토도로프와 같이 이렇게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한 리얼리티란 다른 리얼리티에 의해 또 다시 굴복되거나 합병될 것이다. 요재지이라든가 산해경에서 정리된 전형으로서의 까불이성(性)을 연기하는 것, 스토리 상 갈등의 부분에서 서구적 웅변술을 활용하는 것. 그래, 이런 노력들이 어느 정도의 설득력을 갖추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동시에 그렇기에 그의 리얼리티-고착적 측면이 더욱 돌출된다. <신과 함께-죄와 벌>는, 명계라는 우연적 이미지에서 참으로 끈덕지게도 어떤 필연성을, 우리가 현실이라 합의한 어떤 수준에서만 구축해내려 애쓴다. 그 우연적 이미지의 집합이 심지어 무슨 역사적 정통성이 있다 한들, 그런 것의 반대는 생각해보지도 않는 것이 현재 영화들의 평균이다.

아무튼 나는 여기에 반감을 느끼고 있고 그래서 여기 소수의견을 제시해본다. 자연인으로서의 내가 느끼는 현실의 본래적 모습이란, 상당히 웅성둥성하기도 하고 얄팍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 보편성의 감투를 쓰고 놀기도 하는 그런 모양새인데, 소위 사실주의 연기술, 리얼리티를 연기함이란 그 현실의 지각과 산출에 있어 ‘합의된 현실을 따라하기’ 수준에 머무를 뿐으로 보인다. 위에서 나는 문헌학적 검토보다는 문제 제기 쪽에 역량을 집중해야한다고 말했는데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주지훈의 연기방침에서 엿볼 수 있는 한국연기자의 제반조건이란 실제 문헌을 뒤져서 근거를 확충하는 식으로는 설명 불가하다. 연기자 경험이 축적된 나로서만, 그리고 영화의 현행풍토를 아는 나로서만 심리주의와 문서적 실증이라는 두 방법 말고 증언의 예외적 방법을 택할 수 있었다. ‘나’의 말이란 상당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연기자의 몸 안에서 일어나는 동서길항의 대략적 도식

좀 부산을 떠는 것 같기는 해도 다시금 사대주의라는 말을 환기해보자. 근래 사대주의란 어쩐지 서구적 입맛만을 의미하는 듯하지만, 본래는 중국과의 화이적 세계관을 표명한 어떤 자발적 복종의 태도였다. 그리고 어찌된 일인지 이 영화 <신과 함께-죄와 벌>에는 중화주의가, 새롭고 넓은 방향에서의 중화주의가, 다시금 서구적 미메시스와 엉겨들고 있다. (평론가 박평식 씨의 10자평도 이 점을 가볍게  언급한다. 액션과 청승의 중국화)

이것이 대다수의 우리 연기자의 몸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의 진상이다. <신과 함께-죄와 벌>의 연기자이기 위해서는 중국적인 명계의 현대한국적 재현이라는 목표 아래에, 특정한 리얼리티의 노선을 따를 수밖에 없었으리라. 나 역시 한 명의 한국어 연기자로서, 자연스러움을 획득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최대한의 즉물적 반응을 이용하게 됨을 매번 체감하게 된다. 이때, 자연스레 제반 조건 또는 지정학적 조건이 흘러든다. 그런 와중의 압력은 다음과 같은 도식으로 진행되게 된다. 즉 소중화(小中華)로서의 한국을 서구적으로 재현하기.

 그 메커니즘의 경험적 경과를 풀어서 보자면,

- 중화주의적 전통이란 바로 규범 중심의 예도가 그대로 예술적 표현으로 옮아가면서, 여전히 그 규율의 선행이 우선되는 것이다. 그것은 경거망동을 허락지 않는 군자적 몸가짐의 본뜨기이다.
- 반면 서구적 연기술이란 진리를 재현하려는 의지에서 나오는 내면 쪽의 외부방향으로의 표출로, 그 심리적 표현을 중점으로 하여 되도록이면 로고스 중심의 진리관을 극한까지 밀어붙이는 정념적 조작이 권장되곤 했다.
 카메라와 영화라는 서구발 포맷은 따라서 동양의 서양화라는 대략적인 얼개를 갖추고 있다. 이 얼개가 내게는 하나의 모순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군자를 본뜨는 행동을 할 때에 내가 군자의 로고스를 완전히 느낀다고 느끼지는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소위 로고스는 뒤따르는 것이라고 어른들은 말했었다.

이것이 한국어로 연기할 때 내적으로 만져지는 큰 그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연기자들에 알력적으로 전제되었던 이러한 조건들은 물론 더 자세히 연구될 수 있고 이미 그렇게 되어 있다. 그저 현행 간에 강하게 발생하는 어떤 불협화음을 직접적으로 대면할 필요성이 있다는 점을 제기하는 선에서만 나는 그치도록 하겠다. (작고 미세한 스케치는 ‘연구자가 아니고!‘ 연기예술가 개인의 몫일 것이다.)

이렇듯 크게 보아 두 힘이 <신과 함께-죄와 벌>에서도 불협화음을 내고 있다. 심지어는 이미 충돌이라고도 거의 하기 힘든 어떤 둔하고 무딘 부조화의 감각이 내 눈에 자꾸만 밟힌다. 배우 주지훈이, 참으로 인간주의적이기만 한 관점에서 명계의 관료를 ‘그래도 그들은 사람 같기 할 것이다.’라는 특정 전제에서 묘사하고, 거기에 우리의 현재이기도 한 현대적 바디랭귀지라던가, 서구화된 희로애락의 마스크를 인용할 때 말이다. 리얼리티는 늘 미완일 수밖에 없다. 이런 숙명을 거부하고 불충분하게 숙지한 아티스트의 신체를 볼 때 즐거운 관객이고자 하는 나는 점차로 괴롭게 된다. 참으로 퍼석퍼석하기만 한 몸이 아닌가.

영화감독 로베르 브레송은 한없이 기계적인 금속성으로서의 카메라의 존재를 즐겨 말했다. <신과 함께-죄와 벌>에서 카메라의 본분이란 사물을 인정사정없이 담아올 뿐이기에, 자칭 명계적 어조(리얼리티)는 너무도 가련할 만큼이나 정확히 포획되어 그 신적인 날개를 다 꺾이고 만다. 요컨대 군자를 본뜬다는 ‘주자가례’적 이상에서 아우라는 모조리 걷혀버리고야 만다고 할까. 한편 반대쪽도 사정은 낫지 않아 그나마 남기는 남은 소위 우리 연기자의 희로애락의 실력(?)이란 기껏해야 셰익스피어 극단의 아류가 되어 버린다.

<신과 함께-죄와 벌>에 대해 행해지는 평의 논지가 대체로 신파의 여부에 초점이 모아진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영화가 신파인가 따지는 것은 내가 보기에 이런 문제에 비하면 크게 중요치 않다. 큰 스크린, 영화라는 장소에서 벌어지는 진정한 권력의 작용은, 바로 스크린 밖의 물질적 행동 전반을 강제적으로 변이시키려는 일련의 삼투압 현상이다. 멈출 수 있을까. 여기에서는 이 멈춘다는 상상력 자체가 어느 정도 자연스럽기는 해도 여전히 어둡기만 한 통찰의 발로라는 점만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도 이 모든 교환과 이동의 배후에 연기자들의 리얼리티에 대한 집착이 존재한다는 점은 한 번쯤 공론화시켜볼 만하다. 

생생한 연기술에 대한 추구가 오히려 리얼리티 자체를 잡아먹는다는 역설적 사례가 목전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것은 상술된 토도로프의 핍진성에 대한 논의와도 맞물린다. 그리고 이 핍진성의 구축과 포스트 식민주의적 느낌의 사안이 일반 연기자의 영역에서조차 복잡다단하게 발생하는 데에, 그리고 우리의 신체가 ‘정말로’ 그렇게 이행해 가는 데에 나는 그저 놀랄 따름이다. 정말이지, 내게 있어 진절머리나도록 리얼한 것은, 속절없이 이행되고야 마는 정치적 알력의 신체화 그 자체다.

비트겐슈타인의 오리

▲ 비트겐슈타인의 오리
 
오리-토끼는 현대에 만들어진 상상적 동물이다. 키마이라는 외곬의 보편주의적 집착 탓에 부조화하지만, 오리-토끼는 이른바 착시라는 것과 한 뼘 차이의 관점적 다양성을 경유해서만 존재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환상적 동물이다. 오리-토끼의 몸이라는 테마에서, 상태의 공존에 적격인 동물이다. 나는 어쩐지 이 오리-토끼에게서 능청스레 포용할 줄도 아는 대인배의 웃음을 듣는다.

기세좋게 뭔가 말했지만 대안을 제시할 수는 없었다는 점을 인정한다. 고작해야 핍진성에 기대는 정도의 리얼리티의 관념이 우리 연기자들에게는 현실적으로 가히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 점에 대해서는 키마이라의 이미지로 간추린 어떤 합산적 태도를 말함으로써 약간은 괴물적이라는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초두에 소개한 나의 연기자 친구가 ‘하이퍼리얼리즘’이라는 자신만의 테크닉을 말했을 때에도 그런 느낌을 받은 것이다. 다만, 보편주의의 강압적 지각으로서 예시한 키마이라의 이미지(각 개별성이 각자의 권리를 떠들고 있는)가 있다면, 반대로 현대적으로 각광받는 다른 방식도 있는 법이다. 그러한 전위성은 모두 40년도 전에 다 실험되었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예술사를 참조하시라.

토도로프가 은근하게 경고한 ‘핍진성의 노예 상태’를 참으로 벗어나고자 한다면, 불특정 다수의 관객이 암암리에 구성하는 눈초리를 의식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싶다. 한 명의 연기자인 동시에, 영화감독인 나로서는, 어쩌면 카메라의 그 냉철한 ‘담아내기‘ 자체에 핍진성이란 이미 마련된 것이 아닐까 하고 묻게 된다. 어떤 식의 연기든, 생동감은 카메라라는 영화매체 특유의 방식으로 보장된다. 이 점만 받아들여지면 우리의 연기자들이 리얼리티의 이상을 포기하고서 오리-토끼처럼 능청스러워질 수 있을까. 그들은 ’적당히‘라는 것의 값어치를 알 필요가 있는 것이다.


글: 최원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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