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03월호 구매하기
[정동섭의 시네마 크리티크]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 냉전(冷戰)의 현실과 동화 사이
[정동섭의 시네마 크리티크]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 냉전(冷戰)의 현실과 동화 사이
  • 정동섭(영화평론가)
  • 승인 2018.03.12 09:3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 멕시코의 세 친구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이하 <셰이프 오브 워터>)가 제90회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작품상과 감독상, 음악상, 미술상 등 네 개 부문에서 최고의 평가를 받았다. 이로써 멕시코 출신의 세 친구(Tres amigos)는 모두 아카데미 감독상을 거머쥐는 퍼즐을 완성한 셈이다. 2013년에 알폰소 쿠아론이 <그래비티>로 수상했고,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는 2014년과 2015년에 <버드맨>과 <레버넌트>로 연거푸 감독상을 수상했었다. 그리고 2017년 감독상이 <셰이프 오브 워터>의 기예르모 델 토로(Guillermo del Toro)에게 돌아간 것이다.  
 
2. 동화 속 로맨스
 
기예르모 델 토로가 결국 그 어려운 걸 해냈다. 아카데미 감독상을 얘기하는 게 아니다. 로맨스 말이다. 괴물이나 유령, 요정 등을 앞세워 판타지 세계를 추구하던 그가 사랑을 이야기할 줄은, 그것도 근사한 연애담을 끄집어 낼 줄은 예측하기 어려웠다. 그것도 자신의 어트리뷰트라고 할 수 있는, 그 괴물 캐릭터를 고수하면서 말이다. <셰이프 오브 워터>를 본 시네필들은 이러한 델 토로의 경이로운 변신과 진화에 갈채를 보냈다. 
 
그러나 반추해 보면, 그의 변신은 생각보다 큰 폭을 내딛은 것이 아니다. 델 토로 작품세계의 본령(本領)은 동화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려서부터 들어 온 이야기들은 ‘결혼해서 행복하게 잘 살았대요.’ 스타일의 결혼 로맨스이거나, 짐승(괴물)들이 나오는 것이었다. 이 둘을 융합하는 건 그리 어려운 과제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델 토로는 한 발 앞서 이러한 방법론을 터득한 듯하다. 그는 영화의 처음부터 엘라이자(Elisa)의 보금자리를 판타지 공간(수중 세계)에 위치시킨다. 그리고 내레이션을 사용한다. 비현실적이거나 애매모호한 공간 속에서 시작되는 내레이션은 ‘옛날 옛적에.....’로 시작하는 동화적 프레임을 형성한다. 그렇게 동화가 시작된다. 내레이터인 자일스(Giles)는 자신의 이야기가 오래 전에 있었던 일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공주님’이나 ‘멋진 왕자’ 등의 동화 속 표현들을 차용한다. 동화답게 결말 역시 내레이션으로 장식된다. 수중에서.
 
3. 역사 속의 동화
 
<셰이프 오브 워터>는 인어공주와 백설공주, 신데렐라 등을 아우르는 전지구적 이야기들의 총체이다. 그러나 아주 뻔하고 만만한 동화는 아니다. 냉전이라는 시대 배경을 통해 미국의 국가 이데올로기를 비틀고 있기 때문이다. 괴물이란 본디 한 사회 또는 국가가 가지고 있는 공포와 경계의 대상이다. 국가는 체제 유지에 위협이 되는 적대감의 대상을 괴물이란 형상에 응집해 놓으며 타자화한다. <셰이프 오브 워터>의 아가미 인간은 인간과 유사한 모습을 지니고 있지만, 인간은 아니다. 그는 인간처럼 물 밖에서도, 물속에서도 살 수 있지만 다른 존재이고 괴물이다. 
 
사실, 괴물(怪物)은 상대적인 개념이다. 판단하는 주체마다 각자의 표준이 상정되어 있고, 그 표준 영역 밖에 존재하는 것을 괴물로 정리해 버리기 때문이다. 스트릭랜드(Strickland) 같은 인물에게는 이 표준 영역(land)이 스트릭트(strict)하다. 그리고 이 괴물로 구별된 존재들은 조르지오 아감벤이 말한 호모 사케르(Homo Sacer)와 유사하다. 
 
스트릭랜드는 냉전 시대의 미국 또는 미국 정치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앵글로색슨 프로테스턴트 백인(WASP)인 그는 자신같은 백인의 외모가 하느님과 가장 가까운 형상이라고 생각한다. 성경을 잘 모르는 어머니가 무책임하게 작명해 버린 젤다 같은 흑인이나 남미의 더러운 강에서 잡아온 생명체는 등급의 차이가 있지만, 결국 그에게는 괴물일 것이다. 백인이기는 하지만 엘라이자나 자일스 역시 그의 영역에 포함되는 이가 아니다. 엘라이자는 이탈리아 혈통의 고아이고, 자일스는 동성애자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들 모두는 우주시대의 지배자를 꿈꾸는 미국의 미래가 아니다. 그저 그런 ‘똥닦개들’이나 ‘오줌닦이들’, 또는 사진(미래)에 밀려 도태된 별 볼일 없는 게이 화가일 뿐이다. 
 
미국의 미래는 자일스가 그리는 그림에 나타난 정상가족이다. 그 그림 윗부분에 씌어진 ‘미래는 여기!!(The future is here!!)’라는 문구는 회사가 주문한 것이었다. 그 회사 관계자는 그림 속 젤로(Jello)의 색깔을 녹색으로 바꾸라고 일방적인 요구를 하기도 한다. 그것이 미래의 색이기 때문이다.  
 
가족을 기준으로 호모 사케르 또는 괴물을 구분할 수도 있다. 남매를 둔 백인 부부가 정상적인 가족이라면, 외롭게 살아가는 엘라이자와 자일스는 비정상적인 존재들이다. 더욱이 자일스는 동성연애자. 그런 의미에서 파이가게의 인종차별적 바텐더가 흑인 부부와 함께 자일스를 쫓아내면서 “다신 오지 말아요. 여긴 가족 레스토랑이오.”라고 하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흑인에 자식도 없는 젤다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엘라이자를 위시한, ‘하찮은’ 존재들은 다른 생명체를 함부로 괴물로 분류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자기를 객관화하고, 타인과 공감하는 소중한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엘라이자는 괴물이 자기처럼 입을 움직이고, 자기는 괴물처럼 소리를 못 낸다고 고백하며 괴물과 자신 사이의 경계를 허물어뜨린다. 따뜻한 마음을 지닌 그녀에게 괴물은 괴물이 아니고, 살아남아야 할 생명체인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괴물과 자기 사이에 존재하는 존재론적 차이를 삭제해 버린다. 괴물에게 ‘당신을 친구로 둬서 기뻐요’라고 쓰여진 카드를 수줍게 보여주는 장면에서 샐리 호킨스는 첫사랑을 고백하는 소녀의 순진함을 연기했고, “당신은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를 거예요.”라며 사랑의 아픔과 고통을 설득했다. 
 
자일스는 괴생명체를 처음 보았을 때 ‘멋지다’고 감탄했으며, 이후에는 ‘재미있는 친구’로 표현했다. 러시아 스파이로 미국 주류 사회에 편입될 수 없는 호프스테틀러 역시 괴물이 지능이 있고, 언어 능력이 있으며 감정을 이해할 줄 안다고 스트릭랜드를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스트릭랜드는 그런 점에서는 소련인이나 베트남인들도 마찬가지라며 그의 주장을 일축한다. 이 지점에서 냉전과 베트남 전쟁을 동시에 겪고 있는 미국인들의 신경증이 작동한다. 그리고 매카시즘 이후 냉전의 레드 콤플렉스를 통해 빨갱이들은 괴물로 치환된다. 
 
화장실에서 손을 씻는 방식으로도 남자를 분류하는 스트릭랜드는 모든 영역에서 구별 짓기와 편 가르기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동차 딜러를 통해 녹색(green)과 청록색(teal)을 구분할 줄 알게 된 그의 마음은 뿌듯하다. 더욱이 그 색깔은 미래를 상징하는 색깔이기도 하다. 스트릭랜드는 미래를 놓고 벌이는 소련과의 우주개발 경쟁의 최첨단에 서 있는 사람이다. 영악한 딜러는 스트릭랜드를 ‘미래의 인물’이라고 치켜세우기까지 했다. 그가 차를 살 이유는 이미 차고 넘친다. 하늘을 바라보며 미래를 지향하는 미국과 스트릭랜드의 눈높이에 미국 ‘아래’에 위치한 남미의 어느 물속에서 건져진 괴생명체가 눈에 들어올 리 없다. 
 
주요 인물들이 근무하고 있는 항공우주연구센터에는 방들과 구역 등의 공간이 구분되어 있다. 전 직원이 지니고 있는 신분증과 출입증에는 그들이 출입할 수 있는 구역이 그들의 신분과 역할에 의해 지정되어져 있다. 결국, 이 센터는 구분과 등급, 차별의 공간인 것이다. 이곳에서 폭력과 고문이 행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차별은 폭력의 전제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곳은 연구센터임에도 불구하고, 연구원들이 아닌 전직 군인(보안책임자 스트릭랜드)과 현직 군인(호이트 장군)에 의해 장악되어 있다. 
 
델 토로는 구체적인 역사적 배경 속에서 동화를 접목해 왔다. 인종차별과 성차별, 그리고 레드 콤플렉스로 미국이 우뚝 섰던 1962년의 볼티모어. 그는 다름을 용납하지 않던 이 시기의 미국을 통해 현재를 이야기하고 싶었음에 틀림없다. 50년 이상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인종과 젠더, 섹슈얼리티의 문제에서 큰 걸음을 내딛지 못하고 있는 미국의 현실을 그는 자신의 동화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4. 물의 모양
 
‘물의 모양’이라는 원제는 야릇하다. 고유의 모양이 없기에, 그 어떤 모양도 될 수 있는 물. 그런 물의 특징을 생각하면 깊이 있는 표현이기도 하다. 동시에 그것은 생김새(모양)가 주는 차이에 기초한 차별과 구별짓기의 대척점에 위치하며, 포용과 관용을 의미하는 키워드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천재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관객은 괴물과 사랑을 나눈 엘라이자가 출근할 때의 버스 장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비가 내리는 밤. 그녀가 탄 버스 차창에는 물방울들이 흩어져 있다. 그리고 버스가 움직임에 따라 이 물방울들은 뒤로 밀린다.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엘라이자는 마치 이 물방울들과 교감하듯 버스 안에서 손가락으로 그 물방울을 따라간다. 뒤로 밀리던 물방울 중 두 개가 하나로 합쳐진다. 괴물과 엘라이자의 사랑에 대한 거부할 수 없는 은유. 틀림없다. 그런데 중요한 관람 포인트가 하나 더 있다. 물방울들은 버스가 가는 방향이 주는 관성에 의해 뒤로 밀리는 것이 아니라, 엘라이자의 손가락이 움직이는 방향대로 그녀를 따라갔던 것이다. 즉, 물방울들은 관성의 법칙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동화의 법칙에 의해 엘라이자의 손가락을 따라간 것이다. 그것은 그녀가 물의 나라의 공주님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 초반에 그녀가 괴생명체와 자신의 경계를 허물어버린 것이 복선일 수도 있다) 그녀와 괴물의 사랑은 언제나 물 속에서 이루어지며, 그녀는 자위도 물이 가득 담긴 욕조 안에서 했다. 
 
마지막 수중 신에서 괴물의 입맞춤으로 그녀가 부활하는 것은 백설공주와 인어공주를 연상시킨다. 그녀가 수중에서 숨을 내쉴 때 그녀 목에 난 세 가닥 상처는 물고기의 아가미가 된다. 그러면서 카메라는 물속에서 포옹한 채 아래로 내려가는 두 주인공들의 모습을 롱 쇼트로 보여준다. 엘라이자가 동화 속 공주처럼 한 짝의 구두만을 신고 있던 그 마지막 롱쇼트는 신데렐라에 대한 오마주였을까? 이어지는 자일스의 동화같은 내레이션 역시 그녀가 해저 나라의 공주였음을 은밀하게 제안한다.  
 
사족 하나. 내레이터는 왜 자일스일까? 동화는 본디 옛날 옛적의 이야기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하는 건데..... 자일스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세월을 살아낸 것이다. 왜냐고? 신(神)이 그의 머리와 팔을 축복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린 마일>(프랭크 다라본트, 1999)의 폴 에지컴(톰 행크스)을 기억하는 이들이라면 고개를 끄덕이리라. 
 
 
* 사진 출처: 네이버 - 영화 –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 포토
 
글: 정동섭

영화평론가이자 영화연구자. 현 전북대학교 스페인중남미학과 교수. 『돈 후안: 치명적인 유혹의 대명사』, 『20세기 스페인 시의 이해』, 『영화로 보는 라틴아메리카』등의 저서와 『바람의 그림자 (전2권)』, 『파스쿠알 두아르테 가족』, 『돈 후안 테노리오』, 『스페인 영화사』, 『스페인 문학의 사회사 (전5권)』 등의 번역서가 있음.

 
  • 정기구독을 하시면 온라인에서 서비스하는 기사를 모두 보실 수 있습니다.
이 기사를 후원 합니다.
※ 후원 전 필독사항

비정기구독자님이 비공개기사에 대해 후원(결제)하시더라도 기사 전체를 읽으실 수 없다는 점 양해바랍니다.
* 5000원 이상 기사 후원 시 종이신문 과월호를 발송 드립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