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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유랑의 시네마 크리티크] ㅡ ‘더 랍스터’ 관계의 본질, 욕망과 정치적인 것의 사이공간에서 침전하다.
[남유랑의 시네마 크리티크] ㅡ ‘더 랍스터’ 관계의 본질, 욕망과 정치적인 것의 사이공간에서 침전하다.
  • 남유랑(영화평론가)
  • 승인 2018.03.12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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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 사귐의 정치성에 대하여”

 
한 존재와 다른 누군가의 관계맺음에 관하여 오래도록 유지되어온 케케묵은 믿음이 하나 있다. 그 위로 켜켜이 쌓인 먼지 탓에, 이제는 정말로 진실한지 그렇지 않은 것인지를 따지려는 시도조차도 전혀 무익한 일이 돼버린 그런 종류의 믿음 말이다. 여기서 믿음이란 건 이를테면 어느 두 사람이 마주 잡은 손을 울타리로 삼고서, 경계 이편의 사적공간과 저편의 외부세계 사이에 불가침의 가름막을 놓는 일이 가능하리라는 확신 정도로 번역 가능할 테다. 허나 만일 이 아름답기만 해 보이는 낭만적 공상이 존재자들 스스로를 찢고 파괴하는 수동적인 방향으로 저들을 견인할 뿐이라면, 다시 말해 인간으로서 마땅히 가진 본질적 역량과 존재론적 함량을 저하시키는 방향으로 자신들을 이끌어갈 따름이라면, 사실인즉 맹신이나 광신이라는 이름으로 능히 호명될만한 성질의 것이라면, 문제는 결코 가볍지 않다. (1) 그 믿음을 필히 중단하고 또 철저히 거부해야한다는 필요를 요청하게 될 테다. 그렇다면 즈음하여 질문을 던져보아야 하리라. 사귐 내지는 관계란 것이 정말로 순전히 ‘개별적이며 사적인’ 영역에 속한 것인가?
 
많은 이들이 긍정적으로 대답할 테다. 설령, 크고 작게 주억거리는 고갯짓에 담긴 의미는 저마다 조금씩 다를지라도 말이다. 가령 혹자는 사귐의 직접적인 주체들 그리고 그들 서로간의 접속과 연합에만 오롯이 시선을 드리울 것이다. 마치 이들이 진공상태의 우주, 또는 기하학적 순수세계 속에 외따로 구별된 독립적 존재들이라도 되는 듯 말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질적인 두 존재가 서로 부대끼는 동안, 각각의 존재영역이 어느 정도 어그러지고 파열되는 것을 허락하고, 그 뭉개진 공백의 자리에 곁에 선 타인의 자리를 호명하고 채워 넣는 과정을 살펴보는 자리로까지 나아갈 터이다. 환언하자면 공동의 영역을 각자에게 비집어 틈입시키는 일이야말로 관계의 본질임을 수긍하는 것이다. 확실히 전자에 비해 조금은 더 발전적인 인식임엔 분명하지만, 여전히 두 사람만의 사적 영역 차원 그 바깥으로 나가진 못한다. 이를테면 관계맺음의 주체들만으로 구성된 공간의 외부란 존재치 않는단 믿음에 여전히 머무른단 뜻이다.
 
허나 만일 어떤 두 사람이 만들어내는 공동공간의 틈새에, 전혀 예상치 못했던 요소가 이미 벌써 바깥으로부터 침습하여 잠복하고 있다면 어떨까? 특별히 그것이 은밀하게 개입하고 활동하는 범위라는 게, 단순히 약간의 이물질이 스며들어 불쾌하단 것 정도로서 가볍게 치부해버릴 수 없는 수준이라면 말이다. 실제 두 존재의 사이공간으로부터 발원하는 이 에너지는 때로 사귐의 성격 그 자체를 다르게 채색해버릴 만큼의 강렬한 호소력과 장악력을 머금고 있다. 때론 사귐의 주체들마저도 전혀 의식적인 통제가 불가능한 방향으로 그들의 관계가 움직이기도 한다는 점은, 이 ‘숨은 것’의 존재를 확인하는 한 가지 반증이 되어주기도 할 테다.
 
물론 낱낱의 관계맺음을 규정하는 일차적 근거가 되는 건 확실히 사귐에 참여하는 개별자들의 욕망이다. 욕망들이 서로를 호명하며 하나의 위상공간 속에 엮어질 때, 비로소 관계가 정립된다는 명제는 분명 타당하다. 적어도 이 사실만은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울 테다. 상세히 주를 단다면 서로가 서로에 적극적으로 부합하는, 아니 적어도 최소한 어느 정도 납득할만한 타협의 여지를 가진 두 욕망의 덩어리들이, 적극적으로 공명하고 불화하며 부딪는 역동적인 운동의 표층부에, 이른바 관계라는 관념적인 언어가 스멀스멀 제 형상을 갖추게 된단 뜻이다. 혹 물과 열이 연결접속하는 장소로부터 비로소 거품의 대지가 피어오르는 일과도 같다고나 할까. 
 
하지만 순전히 개별자들에게 속한 줄로만 알았던 낱낱의 욕망들이 이미-항상 외부조건의 스밈과 짜임에 의해서 방향 지어져 있는 것이라면 꽤나 이야기가 달라진다. 가령 물속에 침전된 불순물들은 열의 작용을 훼방하여 100도씨의 경로를 어긋나게 하고, 비바람에 잦아든 뭉근한 불길이 아무리 처절하게 손을 내뻗어본다 한들 거품은 수면에 피어오를 리 없다. 말하자면 존재자들이 발 딛고 선 객관적 상황적 진실이 그네들의 욕망의 지형을 일정부분 틀 잡고 있단 뜻이다. 의심의 여지없이, 이 상황적 진실이란 건 특수자들로서의 개인과 집단으로서의 보편을 둘러싼 항상적인 긴장과 갈등 그리고 첨예한 길항의 역학을 그 내용으로서 취한다. 꽤 범박한 용어를 차용하여 번역하는 행위를 혹 용납한다면, 쉽게 말해서 정치적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정치적이다. 이 정치적인 것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면 위에 주체의 욕망이 발 딛고 있고, 그 낱낱의 욕망들을 준거 삼고 기대어서 마침내 존재자들 간의 사귐이 일구어진다면, 그 관계맺음 또한 부인할 수 없이 정치적일 것임엔 틀림없다. 역설적이게도 철저히 낭만에 붙들린 것만 같은 사귐이라는 말과 정치라는 차가운 언어가 기실은 뫼비우스의 띠의 양극과도 같이 긴밀히 엮어진 채 존재하고 있다는 해설이다. 사적영역이라는 환상 위에 덕지덕지 점착된 먼지 탓에, 어지간해선 진실을 갈파하는 일이 어렵게 돼버렸지만 말이다.
 
“차마 도식의 이름으로 포획할 수 없는”
 
아마도 즈음해서 필자는 구태여 상당한 지면을 할애하여 영화와 무관한 이야기를 뇌까린 연유에 대해 소명하란 요구에 직면케 될는지도 모르겠다. 결론부터 간단히 일러두자면, 사실은 ‘전연 텍스트와 무관하지 않다고’ 할 테다. 본 영화 읽기에 있어 입체적인 시선은 필연적으로 요청된다. 만약 관계의 문제를 순전히 개별자들 간의 자유로운 사귐의 층위에서 간주하는 인식 수준에 그치게 된다면 몇 가지 심각한 문제에 대답할 수 없게 돼버리고야 말 테다. 지나치게 간단한 도식이야말로 영화 <더 랍스터>의 복잡한 지형을 숨기는 데에 일조하리란 뜻이다.
 
가령 표피적인 논리를 준수한다면, 수감자들(그들이 죄수처럼 이름을 박탈당한 채 번호로 호명되고 있다는 점에서)을 갱생(좀 거친 표현이지만 영화적 문맥에선 충분히 적합한 언어가 된다)시키는 데 복무하는 호텔은 ‘개별적 존재’를 힘으로 제한하고 억압하려는 거대한 폭력의 공간으로 해설 될 수가 있을 테다. 환언하자면 ‘집단적 폭력’이 현상되는 장소란 뜻이다. 더 간단하겐 작은 것과 큰 것이 갈등하는 자리랄까? 물론, 일견 옳게 보일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틀렸다 말하기조차도 좀 어려울 테다. 허나, 그 한계 영역은 분명하다. 단순성에 함몰되어서야 끝끝내 가시권역 너머를 바라보지 못하리라는 점을 지적하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단 뜻이다. 개별적인 것과 집단적인 것을 단순한 대결구도 속에 방치해두는 사유는 ‘문제적 진실’의 깊이감각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하는 범박한 이원론의 늪 속으로 존재자들을 끌어들인다. (2) 반면에 이 진실이란, 현사실적 세계 속에서라면 애당초 개인부터가 결코 순수한 즉자존재가 아님을, 따라서 그/녀의 욕망은 처음부터 투명할 수 없단 사실을 인식하는 바로 그 자리에 놓여 있다.
 
잠시 논의를 정돈해보도록 하겠다. 가벼운 이항도식에 천착해버릴진대 이미 개별자들의 욕망 가운데 기입된 상황적 맥락 내지는 정치적인 것의 간여를 미루어 살피기란 어렵다. 첨예한 긴장과 대립의 국면 한 가운데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어쩌면 자신과 싸우는 대적의 논리체계에 가까운 것이 스스로의 내면 깊숙이 침착해 있을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좀체 간파해낼 수 없단 뜻이다. 혹 조금 더 거창한 말을 동원한다면, 존재의 코나투스 속엔 이미-항상 아비투스가 겹쳐 쓰기 되어있음을 포착하는 일이 불가능하게 되리라고도 말해 볼 수 있을 테다. (3) 허나 이처럼 가시영역에 현상된 문제의 이면을 끝끝내 헤아릴 수가 없다면, 가까스로 호텔로부터 도주해 숲으로 나아간 이들의 피땀 어린 노력이 결국엔 무용한 결과로 귀착하고 말았다는 사실을, 더 나아가 기실 '전과 동일하다고까지‘ 말해봄직한 결론을 되풀이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달리 해명해낼 도리가 없다. 여전히 자폐된 가름막 속에서만 맴돌며 관계의 본질이 형성되는 실정적인 무대의 복잡성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어째서 동일한 문제가 반복해서 재연되는지 파악하는 건 조금도 가능하지 않으리란 것이다. (4) 궁극적으로는, 두 번의 쓰라린 상처를 딛고서 마침내 숲마저 빠져나온 이들이, 어찌하여 ’이제는 자연히 얻을 수 있으리라고‘ 예상했던 행복한 결말을 맞이할 수가 없게 (적어도 불투명하게) 돼버린 것인지 역시도 소명할 수 없게 될 테다. 여하한 사실들을 충분히 염두에 둘 때에야, 비로소 텍스트의 혈관 속으로 한 걸음 더 가까이 떼어놓을 준비가 되었노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도시, 사라진 문법의 주인”
 
영화 속에서 자칫하면 간과하기 쉬운 한 가지가 있다. 호텔과 숲의 팽팽한 긴장관계에 몰입하다보면 자연히 잊거나 또 경시하게 돼버리는 그 존재는 텍스트 속에서 도시라는 이름을 부여받는다. 하지만 만약 이 도시의 존재를 의식의 궤도 위에서 혹 놓쳐버린다면, 유비컨대 본 영화를 구성하는 촘촘한 언어조직에서 그 중추에 해당하는 '동사'를 망실해버리는 것과도 꼭 같은 우를 범하게 된다. 물론 그건 텍스트 세계 속을 살아가는 인물들에게도 역시 매한가지다.
 
도시라는 바깥세계(숲과 호텔은 그것으로부터 철저히 격리된 해변에 위치한다)는 소위 정상성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공간이다. 그리고 이 세계의 출입을 승인받을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이란 완벽한 자신의 ‘짝’을 갖추는 것이다. 요컨대 사귐과 관계맺음이 없는 단독자로서 그곳에 발을 들여 놓는 일이란 좀체 불가능하다고 할 수가 있다. 혹 여기에서 완벽함이란 표현을 동일성이란 언어로 번역한다 한들 전혀 문제가 되진 않을 테다. 하지만 완벽한 또는 동일한 짝이라는 게, 정말로 존재할 수 있을까? (5) 외견상 신체적 조건의 같음이 존재의 동일성을 담보할 수 있다는 추론은 가능치 않다. 차라리 너무나 허무맹랑하다고 할 테다. 설령 형태상의 동일함을 만족한다 한들 개개의 성격형질이라든지 정서구조의 상이함, 그리고 낱낱 욕망의 지형도가 그 구체적인 모습을 분명 달리할 것이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이 모든 측면에서 완전한 동일성의 상태를 상정하는 일이 혹 가능하다고 할지라도, 그건 계측하고 정식화할 수 있는 정태적 불변의 조건이 아니라, 다만 끝없이 꿈틀거리는 두 존재가 우연찮게도 잠정적인 평형상태를 이루게 된 경우라고 보는 편이 한층 더 옳을 테다. 말하자면 잠시잠간 후면 다시금 틀어지게 되리란 뜻이다. 도시의 강요된 문법이란 상상에 그 토대를 둔 지극히 허위적인 산물에 불과하다.
 
허나 당장에 생존을 위협해오는 급박한 문제 앞에서 누구라 한들 진실에 귀를 기울이기란 어려운 법이다. 결국엔 도시가 입론한 연금술적인 공상은 곧 일반의 진리규범으로서 수용되며, 또 정상과 비정상의 기준을 가름하는 원리로써 정초된다. 나아가, 이러한 도시의 문법에 준거하여 만일 혹자가 정상개념으로부터 탈구된 사실이 입증된다면 그/녀는 지체 없이 호텔이라는 갱생시설로 보내진다. 실제로 도시의 모든 공권력이 생활영역 곳곳에서 이 일을 수행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이송된 이들은 소위 (재) 정상화라는 과정을 밟아나가게 된다. 숲과 호텔을 오가는 긴장과 서스펜스의 흥분된 리듬 가운데서도 도시의 존재감을 망실해선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 중요성은 단지 도시의 문법이 내세운 '완벽한 짝'이라는 조건이 기실은 불완전한 기획의 산물이라는 점을 깨닫는 일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한 발 더 나아간다면 이 기획에 단초를 둔 정상과 비정상의 가름이 호텔을 있게 한, 더 나아가서는 그 안티테제로서의 숲을 존재하게 한 동력으로 작용했다는 인식에까지 가닿아야만 할 터이다. 좀 더 쉽게 번역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시선을 사로잡는 치열한 대결 아래엔 그 대결을 있게 한 차원 더 깊은 기저원인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놓쳐선 안 된다고나 할까. 물론, 그 깊고 어두운 것이 역시나 존재자들의 내면성 깊이에까지 모종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리란 추측은 유효하다. 아래에서 다루게 되겠지만 궁극적으론 남녀 중심인물들이 비극적 결말을 맺게 되는 이유란 것도, 기실은 매한가지로 도시와의 연장선상에서 사유될 때에야 비로소 그 적실성을 담보할 수가 있게 된다.
 
▲ [정상성의 문법이 지배하는 도시]
 
▲ [외부로부터 격리 및 단절된 호텔]
 
“호텔, 동물들, 그리고 숲”
 
호텔은 도시의 정상적 삶 양식에서 탈구된 존재들을 수용하는 공간이다. 바로 조금 위에선 정상화라는 무거운 언어를 사용한 바 있으나, 실상 그 과정은 너무나 가볍고 다분히 ‘절차적’인 경로를 따른다. 절차적이라니? 대상 존재들을 위하여, 곧 그들의 처우를 위해 방점을 찍는 게 아니라, 철저히 집단적 관리시스템 그 자체의 행정적인 목적을 위한 과정이라는 뜻일 테다. 따라서 이른바 '공직자의 친절함'이라고 표현할 법한 수준의 편의들이 수용자들에게 주어지기도 하지만, 정확히 딱 거기까지 만이다. 단 한 걸음도 그 앞으로 나아가진 않는다. 그건 온전히 합목적적인 편의에만 봉사하기 때문이다. 개별존재로서 수용자들의 인격이나 개성 따위는 전혀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절차진행을 무리 없이 이행하기 위한 수준 그 이상도 이하도 제공될 필요란 없는 셈이다. 뿐만 아니다. 만일 수용자들이 그 구획된 경계선과 틀거지를 언감생심 넘어서기를 꾀한다면 즉각적으로 가차 없는 형벌이 집행될 따름이다.
 
호텔에 입소하는 바로 그 최초의 순간부터 남녀 및 젊은이와 늙은이의 구분 따위란 없이, 모두는 같은 장소에서 예외 없이 헐벗겨질 비극적 운명에 처한다. 애당초 사람다움 같은 걸 고려한 게 아니기에 여타의 배려를 기대하는 일이란 정말로 무익하다. 도리어 혹자가 다른 누군가의 나신을 보고서 성적 갈증을 느끼게 되는 편이야말로, 수용소 측에서 바라는 일이 될 터이다. 궁극적으로 모든 초점은 수용자들이 저마다 완벽한 짝을 만나 정상화되는 것(=커플이 되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짝을 찾지 못한 모두에겐 동일한 색상의 상의와 하의, 반치수를 허락하지 않는 철저히 규격화된 사이즈의 신발만이 공급된다. 그리곤 짝을 찾기까진 매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파시즘적 선동에 가까운 세뇌교육이 이루어진다. 한 발 나아간다면 성적 욕구를 가능한 극대화함으로써 연애(=욕구분출)의 대상을 갈구토록 유도하기 위한 목적에서, 수음행위는 철저하게 금지된다. 반면에 최대한 성애의 갈증을 돋우도록 매일 아침 호텔 직원에 의한 성기마찰 의식이 진행진다. 물론 배설에 이름으로써 리비도의 풍랑이 잠재워져선 안 되는 까닭에, 성기의 말초신경에 혈류가 몰리고 발정하는 순간에 이르면, 일단의 조치들은 중단된다. 요컨대 이상의 모든 절차들이 동일한 기획안에서 가지런히 수렵된다. 구성원 모두가 정상화라는 단일한 목적 하에 진행되는 45일 간의 프로세스를 밟아가는 중이기에,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어떠한 종류의 예외조항도 좀체 허용될 수가 없다. 
 
▲ [예외를 두지 않는 수용소의 메커니즘]
 
▲ [파시즘적 선동에 가까운 세뇌교육]
 
세상의 다른 모든 종류의 절차들과 마찬가지로 호텔의 그것 역시 ‘완결’의 지점을 상정해 둔 채 진행된다. 기약된 45일의 과정이 완료되는 시점에 다다르면 그 끝은 마침내 두 갈래로 대별된다. 존재자들의 처우는 정상화의 도달 여부에 따라 판가름된다. 정상인으로의 갱생에 성공하여 도시로의 귀환에 임하게 되든지, 내지는 비정상의 낙인을 부여받게 되는 경우라고 말할 수 있겠다. 물론 상술한바 아주 특별하고 예외적인 경우로서 사냥에 주어지는 상급을 거론하지 않을 순 없을 테지만, 그건 단지 종말의 때를 잠시잠간 뒤로 미루어두는 유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기억하여야만 할 테다. 곧 새로운 제3의 선택지는 아니란 뜻이다. 이를테면 정상/비정상이라는 구분범주에 들어오기를 거부하는 이들을 소멸시킴으로써 호텔의 목적에 봉사하고 그 업무의 효율을 증진시켜주었음에, 기여만큼의 포상이 주어진다는 임시처방일 따름이다. 호텔의 체류기간을 연장 받은 그/녀 역시도 결국엔 잠시나마 유보되었을 뿐인 두 갈래 길을 향해 달음질하는 입장에 처해있다는 사실만은 전혀 바뀌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들 두 갈래의 길 중에서도 도시로의 회귀라는 한 편은 너무나 명쾌하기 때문에, 그 남은 한 쪽을 살펴보아야 할 테다. 요컨대 낙인이 찍히게 되는 경우 말이다. 혹 이에 대해선 정말 동물 되기인지 혹은 죽음인지에 대한 논의가 분분할 수 있다. 데이비드(콜린 파렐 분)와 그의 수용소 친구들의 대화 속에서는 끝내 정상화에 실패한 이들의 혈액과 장기가 몰래 다른 곳으로 이송되더라는 이야기가 새어나온다. 나아가 데이비드가 (잠시나마 짝으로 삼고자 했었던) 비정한 여인을 동물전환(transformation)실로 끌고 간 바로 그 당일에 수용소를 영구히 떠났다는 점이라든지, 후일 숲에서 만난 연인에게 끝까지 그녀를 어떤 동물로 전환시켰는지를 발설치 않았다는 점 등을 들추어 본다면, 어쩌면 동물 이야기가 그저 기만적 허구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추론해 볼 수도 있다. 물론 그와 정반대로, 돼지와 개와 토끼가 한 숲에서 머물고, 심지어는 사막에나 있을 법한 쌍봉낙타가 호텔 주변의 숲을 돌아다니고 있다는 지점 따위를 고려한다면, 소위 동물 되기라는 것이 아주 허무맹랑한 이야기만은 아닐는지도 모른다는 결론 역시 유효해진다. 물론 도시의 정상인들을 위해 혈액과 장기를 적출한 후 수용자들이 입소 당시 남긴 기록에 근거해 새로운 동물을 몰래 들여놓았다고 보는 편이 조금 더 현실성 있는 대답일 테지만, 사실 이편이건 저편이건 크게 중요하진 않다. 어째서일까?
 
▲ [정상인으로서의 갱생에 성공한 경우]
 
▲ [비정상의 낙인을 부여받게 되는 경우]
 
정말 눈 여겨 보아야 할 지점은 낙인찍기의 의미 그 자체에 놓여있다. 존재자들을 멋대로 동물로 전환하겠다는 것도, 혹은 저들의 동의 없이 신체를 임의로 찢고 훼손한다는 것도, 사실은 그들이 비정상 곧 (정상적인) 인간이 아니며 또한 그렇게 될 수도 없음이 '선언됨'으로써만 비로소 가능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비정상의 낙인찍기란, 곧 비인간, 좀 더 정확히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유령의 위치를 부여받게 되는 일과도 같다. 따라서 그것만은 극구 피하고자 존재자들은 주어진 한정된 시간 동안을 한시 바삐 움직인다. 누군가를 유혹하기 위해 과잉된 섹스어필을 하기도 하며, 때론 뜨거운 욕정이라든지 애틋한 감성이 동하지 않음에도 심지어는 동일한 종류의 결함을 공통분모로 분유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와 거짓된 연인관계로 발전하려는 시도를 주저 없이 감행하기도 한다. 관계맺음이 거짓으로 밝혀질 경우 심각한 처벌을 받을 수밖엔 없음에도 말이다. 사실상 수용소에서의 사귐이란 대개 호텔로부터의 낙인을 피하기 위해 조작된 관계맺음에 불과했다. 더 멀리 나아가지 않고 단지 이 사실 하나만 붙들고 보더라도, 관계라는 것이 단순히 개인들만의 사적영역에 속하진 않는다는 진실을 감지해내는 건 전혀 어렵지 않은 일이다. 낱낱 존재자들의 욕망은 많은 부분 강제된 욕망에 불과하다.
 
판단의 가늠자를 거머쥔 호텔 입장에선 숲이란 대단히 불쾌한 공간일 따름이다. 정상도 아니면서 그렇다고 비정상의 판결을 언도받기조차 거부하는, 소위 예외상태에 놓인 존재자들로 그득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숲의 외톨이들이 그들의 손에 의해 사냥의 대상으로 전락해버린 것 역시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호텔의 그리고 도시의 문법질서를 훼방하고 교란하며, 나아가 불안정의 감각을 그 지형 속에 기입하려는 이물질들을 속히 제거해버려야 할 당위란 충분했던 까닭이다. 요컨대 정상/비정상으로 단순화되는 구조 바깥의 존재란 건 불필요했다. 그러니 간단히 포섭해 들이고, 빠르게 낙인을 찍으며, 확실히 제거해버리는 작업이 요청됐던 셈이다.
 
대단히 슬프게도 호텔을 떠나 마침내 숲으로 도망친 이들이 발견하게 된 세계 역시 거의 동일한 문법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다. 유비컨대 단지 ‘곰’과 ‘문’ 두 단어 사이에서 찾아볼 수 있음직한 거울 관계랄까? 꼭 같은 폭력이 전도된 형태로 현상되고 있음은 더할 나위 없이 분명했다. 달리 번역하자면 ‘개별성을 허락하지 않는 집단성’을 거부한 끝에 도달하게 된 장소로부터 그들이 마주할 수 있었던 건, 오로지 ‘개별성만을 허락하겠다는 집단성’이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준칙을 어기는 이들에게 허용된 건 여전히 가열한 폭력의 세례일 따름이었다. 만일 호텔과 숲이 유일하게 다른 점을 꼽는다면 그건 강제력을 행사하는 방향의 차이일 뿐이다. 호텔이 '욕망을 강제하는' 방향으로 힘을 행사하는 반면, 숲은 '욕망을 억제하는' 방향으로 존재자들을 내어몬다.
 
그렇기에 외톨이들의 문법은 새롭다. 그들에게선 혼자인 게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것이며, 짝지어 살아가는 모습이야말로 지극히 부자연스럽고 비정상적인 삶 양식이 된다. 그런 이유로 이들은 위험을 무릅쓰고서 (호텔의 사냥에 상응할 법한) '작전'을 행한다. 야음을 틈타 호텔에 잠입하여 소위 정상화의 경로를 성공리에 밟아간다고 간주되었던 관계들 사이에 불신의 씨앗을 심는다거나, 또는 은밀히 감추어 놓았던 연인의 거짓과 기만을 상대에게 폭로하는 행동에 매진한다. 허나 설령 애당초 두려움에서 탈피하기 위한 목적에서 시작된 사귐이라 할지라도, 관계를 켜켜이 쌓아가는 여로에서 생성된 감정과 욕망들을 완전히 그릇되다고 부인할 순 없을 테다. 딱 잘라 어디까지가 진실하다고 말하는 게 좀처럼 가능하지 않단 뜻이다. 욕망과 감정을 강제하는 것이 문제라면, 그것을 허구로 진단하며 박멸하려는 시도 역시 문제적이다. 확실히 호텔과 숲 양측 모두는 (어느 쪽으로든) 개별자들의 욕망을, 그러한 욕망을 머금은 존재자들의 사귐을 집단적 억압에 의해 간단히 통제하고 관리할 수 있으리라는 비현실적 원리에 기대고 있다. 그렇담 일단의 폭력들로부터 온전히 벗어나, 혹 자유로이 도피할 수만 있다면, 정말로 모든 문제가 간단히 해결될 수 있는 것일까?        
 
▲ [정상적인 것과 비정상적인 것의 가름]
 
▲ [정반대로 전도된 형태인 숲의 문법]
 
“증상적인 실재의 귀환”
 
숲의 관리자에 의해서 데이비드의 연인은 눈을 잃는다. 기회를 따라 그녀에게 복수를 감행한 후 그는 연인과 함께 사실상 호텔의 그림자 영역과도 같았던 숲을 떠나가고자 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마침내 도시로 향하게 된다. 모든 일들의 최종적 흑막이라 말할 수 있을 법한 도시를 도리어 안전하리라고 여긴 건, 아마도 짝만 곁에 있다면 어렵지 않게 몸을 숨길 수 있으리란 판단 때문일 테다. 말하자면 어두운 등잔 밑을 파고들 심산이었던 셈이다. 혹 선글라스만 벗지 않는다면 번거로운 일도 생기지 않을 터였다.
 
그러나 도시에 들어와 처음으로 몸을 숨겨든 식당에서부터 이들의 행복한 미래는 끝끝내 그 향방을 찾을 수 없는 것으로 종결되고야 만다. 어째서일까? 만일 그가 구태여 그녀를 따라서 제 눈을 멀게 하겠다는 강박적 판단 앞에 스스로를 내몰지만 않았더라도, 둘 사이에 특별한 문제란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며, 나름대로 괜찮은 삶을 이어갈 수 있었을 테다. 그러나 그녀와의 차이가 빚어내는 간극과 현저한 거리감을 도저히 견뎌내지 못하였기에, 데이비드는 마침내 내면의 충동에 오롯이 사로잡힌 채 나이프를 들고서 화장실로 향한다. 물론 그렇다 해서 자신의 눈을 찌르는 일이란 게 결코 쉬운 일만은 아니었으리라. 
 
충분한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는 좀처럼 돌아오지 않는다. 식당 종업원이 그녀의 말라버린 잔에 다시금 물을 가득 채워줄 때까지도 그의 소식은 묘연하다. 어쩌면 중압감에 도망을 간 것인지, 혹은 거울 앞에서 영구히 망설이고 있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결국 그녀 곁으로 되돌아온다고 한들 더 이상 기대처럼 행복할 수만은 없을 테다. 만일 두 사람 모두가 눈이 멀어버린다면 아무래도 향유할만한 미래를 연상하긴 어려울 것이며, 반대로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은 간극이 끝내 메워지지 않는다면 그건 그 나름으로 두 사람에게 견디기 까다로운 고통의 감각을 지속적으로 안겨다 줄 테니까 말이다. 설령 몸이 늘 항상 함께 할지라도 행복이란 요원한 일이 되고야 만다. 허나, 어째서 이런 비극에 가닿지 않으면 안 된단 말인가?
 
▲ [자신의 눈가에 칼을 겨누고 있는 장면]
 
▲ [기다림에 텅 빈 물 잔을 채워주는 종업원]
 
그건 단지 눈앞에 밝히 드러내어 두 사람의 목을 옥죄어오는 호텔이나 숲의 존부와 관련된 문제가 아니었다. 가시권에 현전하는 집단적 폭력보단 한층 더 깊숙이, 이를테면 그들의 내면성 깊이에까지 각인된 현실원리가 문제를 촉발하는 근본동력으로 작용했단 뜻이다. 환언하자면 호텔로의 격리가 있기 훨씬 이전부터 저들의 삶의 기원이자 토대였던 도시가 그들의 존재영역에 기입해놓았던 정치적인 것이, 두 사람에게 여전히 영향력을 선연하게 행사하고 있었던 셈이다. 추적해본다면 그 정황은 꽤나 분명하다. 이들이 연인으로 발전하게 된 계기란 확실히 서로가 근시라는 동일성에 기댄 까닭이었다. 안경을 낀 그를 처음 본 순간부터 내밀한 욕망의 솟구침에 사로잡혔다는 그녀의 술회를 떠올려 볼 수가 있을 테다. 데이비드 역시 그녀가 근시임을 확인한 시점에서 연애감정을 급속도로 발전시켜 나간다. 근시가 아닌 남자라면 결코 그를 가로막는 장애요인이 될 수 없으리라고 굳게 믿은 지점에서, 이미 그의 욕망의 심부에 기식하면서 그를 사로잡아 추동하고 있던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는 작업이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더 나아가, 둘 사이에 균열이 생긴 것 역시도 그녀가 아주 시력을 잃게 된 순간 곧 더 이상 근시가 아니게 돼버린 바로 그 시점에서부터였다. 
 
사실인즉 두 사람을 긴밀히 결속해주던 동일성의 문법에 금이 간 까닭이랄까. 그럼에도 이들은 서로의 서로를 향한 사랑에 기대어 문제를 극복할 수 있으리라는 천진난만한 믿음을 가지고서 함께 도시로 옮아왔다. 하지만 좀처럼 막아설 수 없는 한계란 건 너무나도 분명했다. 이는 두 사람의 사귐이란 게, 처음부터가 온전히 그네들의 손에 달린 건 아닌 까닭이었다. 그들을 연인의 관계로 묶어주었던, 무엇보다도 뜨겁고 순수하다고 믿었던 자신들의 욕망부터가 이미 상당부분 외부의 개입에 의해 채색된 것으로 드러난 이상, 아물지 않는 상처를 완전하게 봉합할 여지란 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고 보는 편이 옳다.
 
“과장된 영화, 현실의 교차, 그리고 말 걸기”
 
확실히 <더 랍스터>의 영화적 표현은 꽤나 과장되었다. 그럼에도 전혀 사실무근의 망념이라고 보기도 좀 어렵다. 이는 우리네의 삶과 그리 멀지만 않은 이야기인 까닭이다. 굳이 연인이란 맥락에만 국한시키지 않는다고 해도 삶의 실제 현실 속에서 우리가 맺는 여러 가지 관계들은, 그리고 그 관계의 근거가 되는 존재자들의 욕망은, 객관세계의 현사실적인 조건 속에서 상당부분 이미-항상 결정지어져 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예민하게 지각하고, 잘 벼려진 비평적 감식안의 날을 세워 경계하는 일이란 게 그리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그렇담 아마도 영화가 동원하는 과장의 전략이란 요컨대 가능한 한 충분한 정동을 이끌어내기 위한 영화적 장치일 테다. (6) 철학의 거대서사와는 달리, 예술로서의 영화는 ‘관념적 명제’를 뱉어내는 직설화법이 아니라 ‘체험적 논리’를 경유한 간접화법을 통해 말을 걸어오는 방식을 취하는 까닭이다. 눅진한 추체험의 자리로 관객들을 초청하고 맞아들임으로써, 쉽게 관념화되지 않기에 살아 역사하는 역동적 진리인식에 발 딛게 하고, 마침내 그것을 돌파력을 갖춘 무기로 삼아, 삶의 영역에 실질적 변화를 요청하는 자리에 가닿기까지, 끈덕지게 몸부림치며 추동해나갈 수 있도록 말이다.
 
작금의 우리네 상황을 살펴보라. 가임기여성지도라든지 또는 싱글세라든지, 뻔히 보이는 수작질에 결국 다중의 뭇매를 맞고선 다소간의 해프닝을 남긴 채 수그러지고야 말았지만, 존재자들의 실존적 삶을 억압하며 일정한 틀거지 속에 구획하려는 부정의 원리가 지금도 현격히 도처에서 촉수를 드리우고 있단 사실만은 아무래도 명석판명하다. 혹 반대로 돌이켜 생각해본다고 한들 여전히 결론은 동일하다고 하겠다. 동시대 사람들이 (천박한 폭력의 기술들이 부리나케 동원될 만큼이나) 과거에 비해 사귐을 또한 긴밀한 관계맺음을 거부하고 있다는 건, 의심할 바 없이 상황적 맥락의 영향력 때문일 테다. 달리 번역하면 개인의 욕망과 정서가 아무렴 정치적인 것의 영향 속에서 어느 정도 특정지어진단 사실을 좀체 부정할 수 없단 뜻이다.
 
그렇담, 구태여 존재자들의 욕망과 그 표현으로서의 관계맺음까지도 오롯이 통제하려 드는 이유란 건 과연 어디에 있을까? 결국엔 질적인 그리고 양적인 측면에서 일정한 수준과 고르기를 갖춘 사회를 운영하기 위함일 테다. 적어도 안전하게, 그리고 빠르진 않을지언정 지속적인 속력으로나마 다람쥐 쳇바퀴를 계속해서 돌릴 수 있도록 말이다. 더 쉽게 번역한다면 교환 가능한 부품들을 쉴 새 없이 생산하라는 요구라고 할 터이다. 허나, 그렇게까지 해서 규모와 수준을 일정하게 유지해야만 할 당위가 있는가? (7) 전혀 없다. 그건 오로지 안팎으로 난 경계들이 여지없이 허물어지는 작금의 시점에서도, 여전히 사회(국가)라는 아버지-대타자 내지는 다분히 상상적인 공동체를 견고하게 붙들어내기 위함인 것이다. 이 도착증적이고 강박증적인 믿음 외에 혹 다른 근거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결코 아나키즘 따위로 경사하잔 말이 아님을 먼저 확실히 해두고자 한다. 다만 본질이 무엇인지 차근차근 되짚어봐야만 하리란 뜻이다. 재론의 여지없이 처음부터 사회는 시민적 합의의 산물이다. 가령 국가의 (권력의 표상으로 오롯이 국가만을 지목하는 일이 알튀세르 이후로, 좀 더 소급하자면 그람시 이후로 전혀 무효한 일이 되었음은 분명하지만) 구성요건은 영토 그리고 국민과 주권이다. 기중에서 오직 첫 번째 것만이 구성원에 앞서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물질적 토대가 된다. 그리고 이 일정한 영역 위에서 일정한 수의 존재자들이 스스로의 시민다움(주권)을 밝히 선포할 때에야, 그제서 비로소 산출되는 것이 이른바 ‘효과’로서의 사회(국가)라고 할 수 있다. 
 
곧 사회가 존재에 우선하는 게 아니라 도리어 존재가 사회에 우선한단 뜻이다. 사실이 그렇다면 존재자들의 욕망에 과도히 개입할뿐더러, 그네들 사이에서의 낱낱 관계맺음을 위시한 삶 영역 일반을 제 손아귀에 넣고서 쥐락펴락하겠다는 사회의 의지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문제적이다. 더 나아가서 만일 그러한 억압의 근거가 순전히 병리적인 망상에 뿌리내리고 있는 것이라면, 마땅히 신뢰로운 눈과 팔의 실천력을 경유하여, 그 메커니즘을 면밀히 해부하고 또 남김없이 갈파해 낼 수 있어야만 할 테다. 겉으로 밝히 현상되지 않는 사회의 무의식까지 들여다보는 작업은 분명 까다로운 일일 테지만, 이것 없이는 충분한 변화란 없다. 그렇담 특별히 논리의 영역과 감각의 영역을 아울러 가로지르는 예술의 역동적인 실행체계에 기댈 때 비로소 보편과 특수 내지는 집단과 개인 사이의 불유쾌한 갈등을 어느 정도나마 경감시킬, 더 나아가선 하나-다수적인 공동체로의 길을 조금이나마 더 선명하게 열어 보일 혁명의 잠정적인 가능조건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고 말할 수 있을 터이다.
 
유사한 맥락에서 상당히 낯선 지각경험을 촉발시키는 영화의 인트로 장면이 다분히 시의적으로 다가온다는 점을 눈여겨볼 수 있겠다. 좌측면을 향해 달리는 자동차의 내부를 롱테이크로 근사하게 잡아낸 이 쇼트는 빈번히 채택되곤 하는 단순한 촬영기법을 따른 게 아니다. 더군다나 도로의 방향을 지시하기 위함은 더더욱 아닌 것이다. 물이 아래에서 위로 흐르기라도 하듯, 마치 장면은 사건들 사이를 역주행하며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오르는 듯한 독특한 감각을 환기시킨다. 이윽고 차가 멈추자 운전석에서 내린 여성은 성큼성큼 걸어가 총으로 짐승을 쏘아 죽인다. 누차 살핀 바와도 같이 영화 속에서 동물은 정상에서 벗어난 자, 좀 더 정확하게는 이미 죽어버린 자(인간이 아닌 자)로 선언된 이의 표식이다. 그것을 쏜다는 게 가지는 의미가 무엇이겠는가? 가능한 한 가지 해답을 제시해본다면, 혹 ‘그 죽음 자체에게 가해진 죽음’이라는 설명을 더해볼 수가 있으리라. 쉽게 번역하자면 죽음과 삶을 또 정상과 비정상을 가름하는 문법 그 자체에 사형을 언도하겠다는 뜻일 테다. 그렇담 이러한 종류의 실천은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가? 그건 낙인의 의미를 읽어낼 수 있는 이에게만 허용되는 힘이다. 인간의 욕망이 외부적 조건에 의해 어떻게 채색되어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채색하고자 하는 주장이 얼마나 허망하고 궁색한 것인지를 읽어낼 수 있는 존재에게만 주어질 수 있는 그런 실천력이다.
 
영화 <더 랍스터>는 그 처음과 마지막을 포함하여, 쉽사리 해독의 여지를 허락해주지 않는 장면들로 충만하다. 과연 이 점을 어떻게 소명할 수 있을까? 혹 다음과 같은 유비를 떠올려봄직도 하다. 가령, 먹어도 쉽사리 소화되지 않은 채 남아서 위벽을 간질이는 잔여물의 존재가 아니라면, 우리에겐 위장의 위치와 모양을 가늠하는 일조차도 좀처럼 쉽지가 않다. 생체 메커니즘이란 적어도 평상시만큼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지는 까닭이다. 이처럼 당연함을 내세우는 정합한 서사도식에 한 점 균열이 틈입한 다음에야, 비로소 그것이 작용하는 과정을 읽어내는 일이 가능해진다. 본 영화가 관객들에게 요구하는 것 역시 정확히 이와 동형의 원리를 취한다. 자연성을 표방하는 삶의 흐름 속에서 한 발 물러서서, 그 속에 감추인 진실을 간파하란 것이다. 나의 욕망, 그 욕망의 가장 기본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음직한 대상에 대한 갈증, 또 그것에 단초를 둔 타자와의 사귐과 관계맺음마저도 오롯이 내게 속한 것이 아닐 수 있음을 기억하라는 뜻이다. 영화의 추체험이 공급해주는 생생한 감각적 인식에 기대어 더 나은 삶으로의 걸음을 한 발 떼어놓을 수 있도록 말이다-.
 
 
[주 – 글 읽기를 위한 참조]
 
(1) 본문에서 사용된 ‘수동적’이란 표현은 그저 ‘행위를 당함’이라는 뜻을 갖기보다는 존재의 본질(conatus)과 그 역량(puissance)이 약화되는 소극적 국면으로 접어든다는 의미를 지시하고 있는, 소위 스피노자적인 맥락에서 사용되었다. 자세한 건 『에티카』 3부를 참조하라.
 
(2) 사실 이런 해설을 더해보는 것도 가능할 텐데 알고 보면 이분법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다. 경계하여야 할 건 이분법이 세계의 모든 문제를 해명하기엔 다소간 무리가 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반증가능성의 여지들을 도외시한 채 이분법을 진리형식의 가능조건으로 정초해버릴 경우, 예상함직한 문제들에 직면케 된다. 본시 이분법은 구조주의의 토대 원리였다.
 
(3) 코나투스를 존재의 (현행적인) 본질, 근본동력, 또는 주체를 견인하는 욕망의 중추 정도로 번역해보는 것이 가능할 테다. 반면 아비투스란 (선험적인 것이 아니며) 개인에게 기입되고 내면화된 여러 요소가 촘촘히 어우러져 빚어낸 산물로서, 한 존재가 품은 ‘취향의 총체’와 같은 것이다. 부르디외에 따르면 여러 장들의 (이를테면 정치의 장, 경제의 장, 문화의 장, 교육의 장 등속의 것들의) 경합과 상호작용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 현실세계의 복잡한 지형도이다. 이 점을 고려할 때 낱낱 존재들을 가령 3차원 분면 위의 고유위치를 점유하는 개개의 작은 점들로 환원가능하며, 이 점들 사이의 위치와 거리 문제를 아비투스의 차이로 바꾸어 사유해보는 것 역시 가능한 일이다. 만일 어느 두 사람이 동일 수준의 문화적 장의 영향을 받은 반면, 경제적 장의 영향 면에선 꽤나 크기 차이를 보인다면, 설령 문화생활의 빈도는 유사한 경향을 보일지라도 과연 어떤 것을 주로 향유하는지가 확연히 달라질 테다. 조금 더 상세한 도움을 얻고 싶다면 『구별짓기』를 참조한다거나, 혹은 그의 사유를 개괄적으로 잘 정돈해서 보여주고 있는 『실천이성』을 살펴보는 편이 도움이 될 터이다.
 
(4) 혹 프로이트의 용어를 빌려온다면 자폐된 가름막을 나르시시즘으로 번역해보는 일도 가능할 것이다.
 
(5) 이러한 질문에 대한 동시대 정신분석진영의 반응은 명확할 테다. 자기동일성 내지는 자기 관계적인 동일성이란 것을 도착증적인 상상의 문제로 진단하고, 그 허위의 장막을 찢고 틈 입하는 비정형의 경험을 (증상적인) 실재로 해설하고 있는 입장에서, 한 인간과 다른 인간의 온전한 일치를 가정한다는 건 처음부터 불가능한 기획에 매달리는 형국이라 할 것이다.
 
(6) 지면 관계상 정동의 까다로운 개념을 온전히 다루어내기란 어렵다. 허나, 정서(emotion)와 정동(affect)을 가름하는 중요한 차이 중 하나를 서사화가능성 유무를 통해 살필 수 있다. 쉽게 말해 전자가 어떤 체계 속에 안온히 포섭될 수 있는 것인 반면 후자는 고정되지 않은 감정의 형식으로서, 특정한 틀거지가 자신을 온전히 소화하는 것이 불가능하도록 그 내부의 지형을 능히 이리저리 이지러트리는 리듬과 세기를 갖는다.
 
(7) 만일 푸코라면 규율권력을 끌어안은 생명정치의 테크놀로지로 설명할 터이다. 규율권력의 핵심이 효용의 극대화에 있다면, 생명정치의 본령은 그 효용의 질적-양적 수준을 적절하게 유지하는 데 있다고 할 테다. 가령, 전염병백신의 무료화 등 최소한의 의료서비스를 일반에 공급해주는 것은 일정수준 이상으로 생산 가능한 ‘인구’와 그 질을 담보하기 위함이다. 혹시 좀 더 푸코의 논의를 이해하고 싶다면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를 참조하는 편이 상당한 도움을 줄 것이다.
 
 
글 : 남유랑
 
평론가. 201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 부문 당선 및 2017년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에서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일반대학원에서 비교문학을 전공하고 있다. 다른 영역들과는 달리 '과연 비평이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또 무엇을 감당해야만 하는가?'라는 의문에 답하려고 늘 고민하는 중이다. 요컨대 비평의 비평다움 내지는 비평의 고유한 위치에 대한 문제의식이 삶의 중요한 화두다. 더불어 정치철학적 거대담론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연대적 구원과 대안적 혁명의 가능조건으로서의 예술’에 관해 치열히 사유하는 노정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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