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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노동가치론의 종말
마르크스-노동가치론의 종말
  • 김준희 | ‘마르크스' 이달의 에세이 가작
  • 승인 2018.04.30 17: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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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보자 3억이라… 아!”

탄성도 잠시, 어느새 다시 미간에 주름을 잔뜩 일으키며 입을 연다.
“이걸 어쩌나 총각. 하나 있었는데 그저께 가계약해버린 거 깜박했네. 한 일이천 더 쓰면 비슷한 집도 꽤 많은데 어때, 보여드릴까?” 

순간의 아쉬움 따위 떨쳐낼 수밖에 없기에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의 동행을 약속한 여자친구의 손을 꼭 붙든다. 뭔가 익숙하지 않은 길을 걷는 듯 보이는 공인중개사의 발걸음을 따라 5분여, 목적지에 들어선다. 알고는 있었지만 우리에게 허락되는 공간은 생각보다 좁고, 생각보다 낡았고, 생각보다 어두웠다. 단위가 올라가며 현실감이라고는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 숫자 덩어리가 돼버린 금액으로도, 이와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고 평가되는 집의 실체가 이정도인가 하는 생각에 나는 약간 아찔해졌다. 역시 부동산은 숭배의 대상인가. 그 찰나의 불안감이 내 머릿속을 헤집어놓는 걸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가상의 가구 배치도를 구현해가며 앞날의 기대감을 생성해가는 여자친구의 이야기들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지만 그것도 잠시. 이 발걸음에 소득이 있음을 확인하는 순간부터 이제는 대출 걱정을 해야 하는 것이다.

밝지 않은 미래를 극복하기 위해 학교를 오래 다녔고, 그로 인해 일자리는 얻었지만 그만큼의 학자금 대출도 가득이다. 쌓여있는 대출금만큼 나의 사회적 가치가 상승했으리라는 믿음으로 매달 계좌를 이탈해가는 학자금의 흔적을 애써 긍정하고 있지만, 이로 인해 이따금씩 ‘쉬고 싶다’는 생각이 스미는 걸 떨쳐내야 하는 건 슬픈 일이다. 이제는 억대의 주택대출이 그 위에 쌓이게 되고, 그런 생각이 들 수 있다는 자신의 나약함마저 부정해야 하는 건 더 슬픈 일인데… 하는 생각 중 혹시나 싶어 부동산 애플리케이션을 켰더니 맙소사. 

방금 봤던 그 집, 1억이 오르는데 걸린 시간이 정확히 내가 남들보다 학교에 더 머물렀던 기간과 같았던 것이다. 내 노동의 가치를 끌어올리기 위해 소비됐던 시간동안 그 집은 더 낡고 세련됨을 점점 잃어갔겠지만, 그조차 무색하게 그 시간 내내 끌어올린 가치로 따라잡기 힘들만큼 저 높은 곳에 위치해있다. 그걸 깨닫고 나니 어째선지 예전에 읽었던 논문집 한 구석을 떠올리며 마르크스를 마주하게 된다.

마르크스의 물신숭배 비판은 노동가치론, 즉 모든 상품의 가치를 평가하는 근간에는 노동이 존재한다는 이론에 기인한다. 물론 이를 ‘모든 가치는 노동에 의해 생성된다’는 식으로 받아들이는 건 꽤나 순진한 발상이긴 하지만, 노동이 투여되지 않은 재화의 가치가 상승한다는 것은 노동가치론에 위배되는 현상이 분명하니까. 그렇다면 방금 전의 그 집은 그 1억이 오르는 동안 어떤 노동이 투여된 것일까. 살기 좋은 공간을 만들기 위한 주민들의 노력? 복리시설 유치를 위한 주민들의 집단행위? 여러 가지를 떠올려볼 순 있지만 어느 것 하나 시원한 답안이 되진 않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본은 인간의 욕망을 매개로 자본 사이에서 성장하며 자체 증식한다”는 명제가 가장 높은 설득력을 지니는 건, 비단 내 뒤틀린 심성 탓은 아니리라.

문득 건설사에 재직 중인 친구에게 “그럼 너희 회사가 세운 아파트 사면 직원할인 받을 수 있니?” 같은 실없는 질문을 던졌던 게 생각났다. 또 고급 아파트 매매가의 기준을 제시한다고 알려진 모 아파트 단지 내를 거닐며, 이곳을 건설한 인부들은 이곳에 살 수 있게 됐을까 하는 의문을 품었던 기억도 떠오른다. 둘 다 터무니없는 상상이겠지. 웃자고 써본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 웃음 뒤에 존재하는 ‘생산주체의 소외’, 즉 노동의 소외는 꽤나 치명적이다. 노동 그 자체가 아파트의 가치 상승에 기여하는 바는 생각보다도 훨씬 얄팍하기 그지없다.

비릿해진 마음을 억지로 숨기며 은행에 들어선다. 길지 않은 상담 끝에 목표금액을 맞출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약간의 안도감에 취할 수 있었지만 그 취기가 그리 오래 허락되진 않는다. 매달 납부해야 하는 이자는 꽤나 위협적이다. 내 집 마련에 대출이 필수라지만, 그게 불가능했더라도 축적해둔 자본이 있었다면 지금보다 더 나았을까. 다들 해오는 과정이고 함께 해결해 나아갈 테니 괜찮을 거라는, 여자친구의 마음을 다한 격려가 아니었다면 밤잠을 꽤나 설쳤을 듯하다. “코인이라도 할 걸 그랬나?”라 말했다가 혼난 건 덤이지만.

실은 2011년의, 이미 비트코인이라는 것의 존재를 알고 있던 내게 시그널이라도 보내고픈 망상에 잠을 이루기 어려웠다. 물신숭배는 사회적 규정에 의해 형성되기에 당시로서는 의미 없었을 테지만, 최근까지 불었던 광풍의 그 무서운 무게감을 떠올려본다면 작금의 빈궁함을 극복하기 위해 필요했던 건 ‘고작' 6년 후를 예측할 수 있는 통찰력에 불과하지 않은가. 6년… 10초에 하나씩 로또 숫자를 맞춰 봐도 모든 경우를 맞춰보는데 3년이 걸린다고 생각해보면 꽤나 보잘 것 없는 시간이다. 명백한 사실이 하나 있다면, 필요량의 자본을 축적하는 방법들 중 임금 노동만큼 효율도 낮고 오랜 시간이 소요되는 선택지는 없으리라는 것.
순간 4차 산업혁명 따위의 단어가 머릿속을 맴돌며, 인공지능의 대약진 같은 키워드가 떠오른다. ‘인공지능으로 인간에게 노동 없는 사회를 제공할 수 있다’라는 체제를 향한 전복적 선언은 이미 여러 차례 논의된 바 있지만, 실은 변화를 전유할 시야와 능력이 없는 개체들에겐 그저 ‘인공지능이 인간에게서 노동을 빼앗는다’로 여겨질 뿐이니까. 그간 소외시켜온 노동에 역으로 소외당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노동으로부터의 독립이 분배주의를 실현하리라는 희망 속에서도 그 너머에 인류의 평등이 있으리란 전망은 들지 않는다. 불과 1킬로미터 남짓 떨어진 강 너머의 집이 4배의 가치를 훌쩍 넘는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인류에 동력을 부여해온 감각은 아무리 생각해도 노동가치론보다는 상품물신주의에 더 가까이 존재함을 확신하게 되니까.

어쨌든 나는, 날이 밝는 대로 대출 심사를 끝내고 부동산에 갈 것이다. 내가 계약할 집은 반드시 오를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그와 동시에 스미는 부끄러움을 애써 억누르면서.  


글·김준희
프로필: 나름 먹고 살 지장없는 보건전문직입니다. 요즘 뜨는 과학분야도 손대고 있습니다. 사실 어느 하나 뛰어나지 못해 생기는 걱정을 이것저것 읽고 쓰며 흘려보내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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