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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섭의 시네마 크리티크]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 청춘은 노년을 지켜낼 수 있는가?
[정동섭의 시네마 크리티크]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 청춘은 노년을 지켜낼 수 있는가?
  • 정동섭 | 영화평론가
  • 승인 2018.06.11 10: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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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미지가 내러티브를 지배하는 영화가 있는 반면, 그 반대의 경우들을 보는 것도 어렵지 않다. 영국의 국민작가 줄리언 반스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The Sense of an Ending>(리테쉬 바트라, 2017)는 분명 후자의 경우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적지 않은 영화들의 숙명이리라. 

‘특별한 순서 없이, 기억이 떠오른다.’는 어구로 시작되는 반스의 원작을 바트라 감독은 “난 내 학창시절에 대해 그다지 관심이 없는데다 특별한 향수도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6학년은 기억한다.”는 고백으로 대체했다. 둘 다 주인공 토니 웹스터의 회고로 시작된다는 공통점 이외에, 반스나 바트라 모두 유사 연역법적인 내러티브를 구사했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첫 부분에 작품 전체를 포괄하는 매우 중요한 문장 또는 장면이 선언처럼 전시된 것이다. 이렇게 소설과 영화는 각각 기억의 무질서함 또는 불완전함과 에이드리언 핀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주인공 다음으로 화면에 포착되는 이는 에이드리언 핀. 에이드리언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역사 수업 장면은 두 번에 걸쳐 묘사된다. 첫 번째 수업에서 헨리 8세 시대의 특징에 대해 묻는 선생님의 질문에 그는 뭔가가 발생했다는 것 이외에는 알 수 없다는 철학적인 답변을 한다. 왕비와의 이혼을 위해 영국 국교회를 탄생시켰으며 여성편력으로 유명했던 헨리8세의 시대를 인식론적 무지로 해석하는 에이드리언의 행위는 훗날 그 자신과 베로니카, 포드 부인 간의 예상 가능한 삼각관계 등에 대한 미스터리와 연결된다. 

한편, 또 다른 수업에서 그가 인용하는 라그랑주는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명제가 된다.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다.’ (더욱이 그는 이 명제를 여자 친구의 임신으로 자살한 돕슨에게 적용시키며 자신의 미래를 예언하기까지 하였다.) 개인의 기억은 사적 역사이며, 거대담론으로서의 역사는 객관화된 기억들의 일반화된 총체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카메라는 과거와 시간을 좇아가는 토니를 취재하며 기억과 역사의 문제에 봉착한다. 그러나 그의 기억은 부정확하고, 문서(에이드리언의 일기)는 도무지 주어지지 않는다. 결국 영화의 전체 내러티브는 시작과 함께 나타난 에이드리언과 그의 견해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다. 

토니 웹스터의 노년은 다른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한때 결혼을 했었고, 지금은 홀로 지낸다. 사별이나 이혼의 과정을 거친다는 약간의 다양성이 존재하지만, 결국 노인은 혼자되는 것이 동서고금의 진리. 원작자인 반스가 옥스퍼드 영어사전 작업에 오랫동안 참여했었다는 것을 떠올리면, 또 다른 유명 사전인 웹스터를 추억하게 만드는 주인공의 이름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결국 그의 인생은 남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사전적인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그런 그에게 첫사랑이었던 여인의 어머니로부터 우편물이 하나 도착한다. 그래서 그는 굳이 잊고 싶었던 사건과 기억을 끄집어내지 않을 수 없다. 이후 사라 포드 여사가 언급하는 ‘약간의 돈’과 부재하는 ‘첨부물’은 스토리를 끌어가는 맥거핀이 되고 주인공은 그것을 따라 과거의 시간으로 진입한다. 

소설에서 역사학도였던 토니는 영화에서는 딜런 토마스를 좋아하는 영문학도이자 시인을 꿈꿨던 청년이었다. 그리고 은퇴한 지금은 동네 병원 도서관의 자원봉사자가 아니라, 중고카메라 판매 및 수리점을 운영하고 있다. (토니가 취급하는 중고 카메라 상점은 라이카 전문점이다. 그것은 베로니카가 그에게 선물했던, 그래서 그의 첫 카메라가 되었던 브랜드였다.) 토니는 자신이 상식을 적용하는 지점에서 논리를 적용했던 친구 에이드리언을 숭배했고, 사랑했고, 우정을 쌓아갔다. 자신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명석했던 친구의 영향을 받은 그는 결국 고교시절의 그 친구가 좋아했던 시인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시인을 소망했다. 원작에서 스페인어를 전공했던 베로니카는 영화에서 프랑스어 전공으로 변신해 있다. 베로니카 역시 스페인어를 전공하기 보다는 고교 역사시간에 에이드리언이 인용했고, 이 작품 전체를 압박하는 명제가 된 프랑스인 라그랑주의 언어를 전공하는 것이 보다 조화로워 보인다. 

기억을 따라가던 토니는 자신의 기억이 사실과 충돌하는 지점에서 당황한다. 에이드리언과 베로니카가 알게 된 것은 케임브리지에 다니는 잭(베로니카의 오빠)의 주선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또 에이드리언이 베로니카와의 교제 사실을 토니에게 알리며 양해를 구했을 때, 토니가 에이드리언에게 보냈던 것은 그가 기억하는 쿨한 내용의 엽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온갖 욕설과 저주로 가득 찬 장문의 편지였다. 울분의 재활용이었다. 청춘의 분노는 노년의 노여움과 비교될 수 없을 만큼 격정적이었다. 

과연 젊은 날의 에이드리언이 예언하듯 말했던 것처럼, 그의 기억은 부정확했다. 그리고 이 모든 진실을 밝혀줄 에이드리언의 일기는 불충분한 문서가 되어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소설에서는 마지막 부분의 반전을 위해, 독자들의 감탄을 자아내는 일기의 일부가 공개되지만 영화에서는 그렇지 않다. 이러한 차이는, 반스의 재치 있는 유머와 매력적인 표현에 대한 요령부득에도 불구하고, 리테쉬 바트라의 영화가 지니는 미덕 중 하나이다.)  

모든 청춘은 순수하고, 그래서 민감하다. 상처투성이다. 토니는 탄생과 섹스, 그리고 죽음이 인생의 총체라는 T.S. 엘리엇의 말에 이의가 없던 청년이었다. 여자 친구와의 사랑 또는 육체관계가 초미의 관심사였던 청년시절의 그에게 우상과도 같던 절친 에이드리언과 첫사랑인 베로니카의 데이트는 감당할 수 없는 배신이었다. 패배이자 굴욕이었다. 그것은 그를 이성의 영역에서 끄집어내 야만과 파토스의 시궁창에 오롯이 빠뜨렸다. 그리고 이제 노인이 된 그는 예측할 수 없었던 현실에 직면해 있다. 

청춘은 노년을 지켜낼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 청년이 노인이 되는 길목에는 무수한 망각의 늪과 왜곡의 덫과 주관성 혹은 이기주의의 올가미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은 시간이 많지 않을 때 느끼는 인생의 가혹함과 인간의 가련함이, 작품의 제목과도 같은, 마지막 느낌(The Sense of an Ending)이 아닐까? 

에이드리언의 분신(分身)은 예전에 자신이 토해냈던 저주의 결과물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 현실을 바라보는 토니에게 주어진 선택은 많지 않아 보인다. 후회하고, 뉘우치고, 사과하고, 그나마 남아있는 시간들이 역사와 기억이 되기 전에 붙들어 보는 것. 그래서 영화 속 토니는 소설 속 토니와는 다른 길을 선택한다. 아니, 조금 더 진보한다. 거만하고 냉정했던 그는 자신이 저지른 과거의 실수를 깨달은 후, 새로운 변화의 가능성에 매달린다. 이미 늦었지만, 이제 남은 시간과 기억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무시하며 냉대했던 우편배달부를 집안으로 초대해 커피를 대접하고, 자신의 무감함과 따분함 등에 대해 전처에게도 뒤늦은 사과를 한다. 마가렛은 그에게 입을 맞춰주고 미소 짓는다. 그러자 그의 시계는 멈춰버린다. 이제 너무 늙거나 늦었을지 모르지만, 그가 시간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시계를 거꾸로 찼던 청년이었다. 그는 이미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오를 준비가 돼 있었다. 더욱이 이제 그는 카메라를 수리하는 사람이다. 카메라가 기억과 고정된 시간을 통해 추억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면, 그는 그 기억과 시간의 오류에 맞서 스스로를 바라볼 줄 아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과거(베로니카)에 사과하고, 현재(마가렛)에 집중한다. 

나는 이 결말이 반스의 원작에 대해 바트라의 영화가 지니는 또 다른 미덕이자 진일보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원제는 ‘어떻게 결말을 맞이할 것인가?’라는 의미로도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화는 소설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약간의 해답을 제시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 이 모든 발버둥에도 불구하고 ..... 결국 거시적 역사의 흐름에서 본다면, 뭔가가 일어났는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전혀 알 수가 없다는 것. 그것은 철학적으로 자명하다. 

* 사진 출처: 네이버 - 영화 -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 포토


글: 정동섭
영화평론가이자 영화연구자. 현 전북대 스페인중남미학과 교수. 서울대 교류교수,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학 초빙교수, 전북대 인문학연구소장 역임. 『돈 후안: 치명적인 유혹의 대명사』, 『20세기 스페인 시의 이해』등의 저서와 『바람의 그림자』, 『돈 후안 테노리오』, 『스페인 영화사』등의 번역서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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