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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희의 시네마 크리티크] ‘밤쉘’(Bombshell) : 과학자와 섹시한 여성 사이
[서성희의 시네마 크리티크] ‘밤쉘’(Bombshell) : 과학자와 섹시한 여성 사이
  • 서성희 | 영화평론가
  • 승인 2018.06.11 11: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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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젊은 여성도 매혹적으로 보일 수 있다.
가만히 서서 바보처럼 보이기만 하면 된다.” – 헤디 라머(Hedy Lamarr, 1913-2000)
 
그녀는 대단한 일을 해내고 싶었지만, 언제나 얼굴로만 평가받았다. 헤디는 백설 공주의 모델이자, 캣우먼에 영감을 준 여성이다, 그러나 헤디는 보안 통신 체계를 발명했다, 그래서 우리가 와이파이와 브루투스를 쓰는 거죠. 그녀는 평생 얼굴로 주목받았지만, 정작 그녀가 누구인지를 보려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는 누구일까요? 

“최소한 다른 시기에 태어났으면 뛰어난 과학자 되었을 거예요. 
최소한 외모에서 벗어날 기회가 있었겠죠” -제닌 베이싱어(영화사학자)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그녀는 1933년 <엑스터시>라는 영화로 확실하게 대중의 주목을 받았다. 나체로 등장하는 이 영화로 헤디는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여성이 오르가슴을 느끼는 장면이 나오는 세계 최초의 영화가 되었다. 교황은 영화를 비난했고, 히틀러는 상영을 금지했고,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다. 당시 19살이었던 헤디는 연이어 만든 뮤지컬이 성공하고 그 후 바로 결혼한다. 상대는 오스트리아 군수업계 거물 33살의 프리츠 맨들이었다. 헤디보다 14살 많고 나치에게 무기를 팔아 돕고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돈이 많은 남자는 아름다운 여자라는 장식품을 갖고 싶어 한다. 잠시지만 헤디 역시 프리츠에게 매료되었다. 25개의 게스트룸이 딸린 슈바르차우 성에서 사냥하고, 파티에 다녀야 했다. 그러나 그는 질투심도 강했고, 의처증도 있었다. 한 에피소드로 프리츠는 영화<엑스터시>의 포스터를 몽땅 사들인다. 그런데 영화사가 사들이면 사들일수록 계속 찍어내니까 결국 포기하고 만다. 그리고 전화를 엿듣는 하인도 고용되어 있었다. 모든 걸 다 가질 수 있었지만, 진짜 원하는 한 가지가 없었다. 자유를 잃었다. 1937년 전쟁이 시작되고 헤디 역시 절망에 빠진다. 결정적으로 아버지가 돌아가신다. 

 
“너 자신의 삶을 살아라, 원하는 삶을 택하고 누려라” -헤디 라머의 아버지 

1937년 결심을 한 헤디는 파티가 있던 날 밤 자신과 닮은 하녀를 자신 대신 재우고 보석을 챙겨 자전거를 타고 도망치듯 집을 나온다. 아버지의 친구가 있던 영국으로 간다. 전쟁 전 영국은 헤디에게 안전한 피난처였다. 그곳에서 MGM 회사의 영화를 보고 미국 에이전트를 찾아간 헤디는 MGM 스튜디오 설립자인 루이 B. 메이어를 처음 만나게 된다. 당시 루이는 나치 독일에서 도망친 배우들을 고용하러 유럽에 와 있었다. 그들을 할리우드로 데려가 헐값에 MGM 제국의 노예로 만들려는 계획이었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루이는 헤디에게 주당 125달러를 제안한다. 거절한 후 루이가 미국으로 돌아가는 배였던 노르망디 호에 같이 승선해 헤디는 자신의 매력을 배 안에서 보여준다. 그리고 자신을 고용하도록 확신을 주기 위해 영어 몇 마디를 배 안에서 익혔다. 루이는 그곳에서 헤디에게 주당 500달러를 제안하고 헤디는 MGM 소속 배우가 되었다. 자신의 현실을 스스로 만드는 매력이 있는 여성이었다. 미국에 와서 다이아몬드 사기꾼 역으로 나온 영화 <알제>의 성공으로 헤디는 이후 검은 머리에 5:5 가르마 와 헤디처럼 보이려는 화장법을 따라 하는 유행을 주도한다. 

“사람들이 사랑하는 게 자신인지 자신에 대한 환상인지 알 수 없게 됐죠”

두 번째 결혼은 시나리오 작가이자 프로듀서인 진 마케와 결혼한다. 23살이었다. 그녀와 함께 시나리오를 쓰겠다고 약속하며 결혼하고 아들을 입양했지만, 곧 다른 여배우들과 만났다. 

영화사가 원하면 배우들이 따라야 했던 시절, 소속 계약서에 서명하면 7년간 영화사의 소유물이 되는 현대판 노예제도였다. 정말 빨리 일해야 했고, 경주마처럼 일했다. 영화사가 각성제를 먹으라면 각성제를, 수면제를 먹으라면 수면제를 먹으면서 촬영에 밤새 임해야 했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집에 와서도 쉽게 잠들지 않았다. 집에서 발명했다. 발명이 취미였다. 헤디는 1940년에서 46년까지 살았던 집에 완벽한 발명 테이블을 갖추었다.  

1940년 영국 배가 독일의 어뢰 공격을 받아, 83명 어린이 포함해서 293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헤디는 영국군이 대등하게 싸울 방법을 고민하다가 무선으로 조종되는 어뢰가 있다면 가능할 거라는 아이디어를 생각해 낸다. 어뢰를 발사한 후 경로를 바꾸거나 재설정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배나 잠수함이 어뢰와 교신한다면 가능하다. 문제는 무선통신을 제어할 수 없다는 거다. 안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리한 적이라면 어뢰와 교신하는 주파수를 찾아내 교란해버리면 되기 때문이다. 바로 ‘전파방해’였다. 독일군이 무선을 교란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헤디는 간섭이나 교란, 방해 없이 목표물을 어뢰로 인도할 은밀한 방법을 생각해낸다. 바로 ‘보안’이다. 하나의 주파수로 교신하는 방법 대신 “서로 호응하며 주파수를 바꾸면 어때”하며 헤디는 ‘주파수 도약’이라고 하는 아이디어를 생각해낸다. 주파수는 계속 변하며 이리저리 옮겨 다닌다. 전파방해를 하더라도 하나의 주파수에 잠시만 간섭할 수 있어서 교란하기 힘들다. 그의 보안 무선통신의 개념은 훌륭했다. 

당시로는 이 심오하고 독창적인 아이디어에 대한 여러 가지 설이 있었다. 하나의 가설은 도용이었다. 오스트리아 제일의 군수업자였던 헤디의 첫 번째 남편의 생각을 표절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독일은 당시 ‘주파수 도약’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니 헤디는 마타하리 같은 스파이는 아니었다.  

두 번째는 1939년 필코 라디오의 최신 원격 조정 장치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다이얼을 이용해 주파수를 바꾼 것처럼, 어뢰에 정보를 전송할 때 완벽한 보안 유지도 가능했다. 에디슨이 공학자가 아니었듯이 새로운 것을 만들기 위해 모두가 공학자일 필요는 없다. 아이디어는 헤디가 내고 실행은 조지 앤타일이 했다. 비범한 미국 작곡가였던 조지는 ‘자동 피아노 원리’를 활용해 발명에 성공한다. 둘은 독일군과 싸우는 연합군을 위한 발명을 3개 했다. 헤디는 집에서 발명만 하고 싶어 한다. ‘아이 같은 무지와 천재의 번뜩임이 놀랍게도 공존해’ 가장 성공적인 발명은 역시 ‘주파수 도약’에 관한 비밀 통신 체계였다. 

‘헤디 라머인 동시에 똑똑하면 안 되는 거죠’

전쟁 기간 해군은 일급비밀로 봉하고, 헤디에게 전쟁을 돕고 싶다면, 발명 같은 거 하지 말고 나가서 돈이나 모아오라고 한다. 헤디 라머인 동시에 똑똑하면 안 되는 거죠. 그래서 정부의 채권 투어에 참여한다. 대중 앞에 얼굴도 비추고, 군인들과 춤도 추었다. ‘돈이나 모으라고 듣는 건 불행한 일이죠, 그녀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이라 단정 짓는 거니까.’ 

1942년에 정부는 헤디가 적국에서 온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특허권을 빼어갔다. 그리고 그녀가 발명하자 루이 B. 메이어는 헤디에게 <화이트 카고>(1942)에서 이민자임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톤들레오 역을 맡겼다. 루이는 군대용 영화를 만들려고 했고, 당시 군인들은 야한 사진에 돈을 냈다. 루이에게 여자는 딱 두 종류뿐이었다, 성녀 아니면 창녀. 사실 루이는 그녀를 창녀 외에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그저 영화<엑시터시>를 찍은 여성일 뿐이었다. 헤디는 군부대용 삼류영화에 등장하는 배우라는 사실, 더 나아가 당시 가르보나 디트리히처럼 존중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더 많은 걸 보여줄 수 있는 연기 변신을 할 수 있는 그런 역할을 원했다. 그게 루이와 갈등이 생기었다. 루이는 수차례 소송을 걸어 그녀를 강하게 속박하려 했지만, 그녀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늘 문제가 생겼고 관리가 안 되는 배우란 평을 받았다. 

 
“더는 참을 수 없는 순간이 오면 자신의 목소리를 스스로 들어야만 한다”

우리를 지배할 수 있는 건 우리 자신, 우리의 사고방식, 우리가 사람을 대하는 자세라고 생각한다. 더는 참을 수 없는 순간이 오면 자신의 목소리를 스스로 들어야만 한다. 헤디는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용감하고 씩씩하게 행동했다. ‘정말로 원하는 내 삶을 살 거야. 내 영화를 만들 거야, 내가 직접 제작할 거야.’ 그렇게 만들어진 영화가 <낯선 여인>(1946)이었다. 당시 헤디를 제외한 누구도 영화사를 뛰쳐나가 영화를 만들진 않았다. 1946년엔 아주 드문 일이었다. 영화사들은 환영하지 않았다. 자신들의 통제를 벗어나 직접 만드는 걸 원치 않았다. 끔찍한 생각이었다, 그것도 여자가. 이후 헤디 라머는 3번째 결혼한 영국인 존 로더와 함께 <불명예 숙녀>(1947)를 공동제작한다. 

독립적이었고 경제력도 있었던 헤디는 두 편의 독립영화와 형편없는 코미디로 찍으며 자신의 경력이 바닥으로 치닫고 있다고 느끼게 된다. 경제적으로 최상의 상태가 아니었지만 여러 면에서 그에겐 새로운 전환이 필요했다. 기회는 위대한 제작자 세실 B 드밀과 함께 하면서 찾아왔다. 성경의 서사화를 영화화하기 시작한 세실과 만든 <삼손과 데릴라>에서 데릴라 역을 맡게 되고 그녀 최고의 흥행작이 된다. 이 영화는 1940년 흥행에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다음인 2위를 한다. 

헤디는 다시 드밀 스타일의 사극 영화를 제작하기로 한다. 이탈리아에서 <세 여왕의 사랑>(1954)을 찍는다. 헤디가 1인 3역을 한다. 많은 제작비가 들었지만, 대규모 프로젝트를 운용하는 법을 몰랐다. 영화는 완성되고도 미국 배급사를 찾지 못했다. 헤디는 수백만 달러를 탕진하고 빈털터리가 되었다. 더는 스타도 아니고 가진 돈도 없었다.  

그러고 나서 다시 헤디는 한 행사에서 석유 부호인 하워드 리를 만나, 다섯 번째 결혼하고 텍사스에 살게 된다. 부유한 중년의 아내 역할을 오랜만에 하게 되지만 결과는 이혼으로 끝났다. 이후 두 번의 결혼을 더 하지만 1년을 넘기지 못하고 이혼한다. 

“이제는 엄마를 용서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녀 역시 그녀를 유명하게 만든 시스템의 피해자였다.” -헤디 라머의 딸

텍사스를 떠나 1960년대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로 돌아와 살던 헤디는 아이들의 기억에 아주 까다롭고 힘든 시기라는 기억을 남긴다. 약물 탓에 작은 일에도 흥분했고, 변덕스럽고, 점점 더 불안정해졌다. 점점 무너졌고, 점점 자신의 조각들을 잃어갔다. 

할리우드 스타들은 속도 경쟁에 시달리며 각성제 중독을 경험했다. 닥터 필굿과 헤디에 관한 소문이 무성했다. 본명이 막스 제이콤슨은 닥터 필굿은 기분 좋게 해주니까 모두 그를 닥터 필굿이라 불렀다. 헤디는 1950년부터 닥터 필굿이 의사면허를 상실한 1974년까지 고객이었다. 닥터 필굿은 비타민 특효약이라고 소개하면서 약병에 40mg의 필로폰을 넣고 다녔다. 당시 필로폰은 합법이었다. 물론 헤디에게도 주사했다. 필로폰은 몇 번 맞으면 중독된다. 뇌가 점점 더 많은 보상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헤디는 점점 괴물로 변해갔다. 딸은 말한다. 이제는 엄마를 용서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녀 역시 그녀를 유명하게 만든 시스템의 피해자였다.

60~70년대 헤디는 쇼핑하다가 몇 건의 절도사건을 저지른다. 그만의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이었는지 모르지만, 영화 출연의 기회는 잃어버린다. 화려함과 미모로 헤디는 유명해졌다. 나이가 들면서 그것에 부응하기 힘들어진다. 그녀도 알고 있었으리라. 그래서 헤디는 40대부터 성형을 하기 시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헤디는 그때도 아이디어를 냈다, 그는 질문하는 여성이었다. 아름다웠지만 대중이 원한 건 예전의 헤디 라머였다. 유일한 해결 방법은 젊을 때 죽는 거라고 헤디의 친구는 말한다. 영원한 젊음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많은 이들이 배우에게는 항상 같은 질문을 하는 우를 범한다. 우리가 흔히 무심코 배우를 향해서 하는 말 ‘젊었을 때 진짜 예뻤는데’ 그 말을 들은 배우 헤디는 숨어버렸다. 아니 숨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서는 가족과도 함께 하지 않는 은둔의 삶을 살았다.

 
‘노 헤디 라머, 노 구글!’

‘헤디 라머는 또한 훌륭한 발명가였다’라는 헤드 카피로 1990년에 <포브스>에 실리면서, 그리고 인터넷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통신보안에 대한 중대성이 커지면서 기초 연구자였던 그의 삶의 이면이 언론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 영화는 1990년 당시 <포브스> 기자와 인터뷰한 육성 자료를 토대로 다큐멘터리는 만들어졌다. 

이후 1997년 헤디 라머와 조지 앤타일은 전자프런티어재단의 개척자상과 벌비그나스 성공정신상을 수상했다. 2001년 헤디 라머가 세상을 떠난 4년 후, 독일은 그의 생일인 11월 9일을 공식적으로 ‘발명가의 날’로 선포했다. 헤디 라머처럼 역사가 제대로 평가해주지 못했던 이들을 기억해주기 위해서이다. 2015년 헤디 라머 탄생 101주년을 맞아 그녀의 업적에 감사하며 구글이 ‘노 헤디 라머, 노 구글!’이라는 이름의 헌정 영상을 발표했다. 

“사람들이란 비이성적이고 논리도 없고 자기중심적이다. 그럼에도 그들을 사랑하세요. 좋은 일을 하면 이기적인 다른 동기가 있다고 비난할지 모른다. 그럼에도 좋은 일을 하세요.” 인터뷰에서 그녀가 들려주고 싶어 했던 말이다. 바로 자신이 지키려 했던 말이 아닐까. 


글: 서성희
영화평론가. 대구경북영화영상협동조합 이사장으로 독립영화전용관 오오극장 대표이자 대구단편영화제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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