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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섭의 시네마 크리티크] 또 다른 스타를 보내며 ― <스타 이즈 본>
[정동섭의 시네마 크리티크] 또 다른 스타를 보내며 ― <스타 이즈 본>
  • 정동섭(영화평론가)
  • 승인 2019.01.14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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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 세 번째 리메이크. 그러나 관객은 감동할 권리가 있다.

이미 잘 알려져 있듯이, <스타 이즈 본>(브래들리 쿠퍼, 2018)은 같은 줄거리를 다룬 네 번째 작품이다. 오리지널 작품인 윌리엄 웰먼 감독의 1937년 작 <스타탄생>과 조지 쿠커 감독의 1954년 작, 그리고 우리에게 잘 알려진 프랭크 피어슨 감독의 1976년 작이 그 전에 있었다. 이 작품들의 원제는 늘 ‘A Star Is Born’이었고 우리나라에서의 제목은 언제나 ‘스타탄생’이었다. 그런데 2018년에 개봉된 이 작품의 국내 타이틀은 ‘스타 이즈 본’이었다 (‘에이 스타 이즈 본’이 아니다). 반복 속에서의 구별 혹은 차별을 위해 이렇게라도 변화를 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스타 이즈 본>은 선배작품들처럼 ‘두 주인공의 우연한 만남-재능의 발견-스타탄생-시상식에서의 난동-드라마틱한 엔딩’이라는 정형화된 기존 스토리 라인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래도 관객들은 <A Star Is Born>이라는 타이틀을 들고 출현했던 모든 작품에서처럼 영화를 외면하지 않았다. 음악영화라는 장르의 성패는 결국 ‘영화’보다는 ‘음악’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타 이즈 본>처럼 뻔한 스토리의 작품도 세 번씩이나 리메이크될 수 있다. 음악에 미덕이 있다면 말이다.

 

한편으로는 조금 다르게 접근할 수도 있다. 이미 언급했듯, <스타 이즈 본> 이전의 <스타탄생>들은 세 번에 걸쳐 제작되었다. 나를 기준으로 말하면, 앞의 두 작품은 태어나기 이전의 작품들이었고, 1976년의 작품이 개봉됐을 당시 나는 미성년자였다. 한 인간의 라이프 사이클을 생각하면, 거의 20년 간격으로 출현한 이 작품들을 다 보았을 관객은 별로 없을 것이다. 더욱이, 요즘처럼 영화에 대한 접근이 쉽지 않던 시절에는 한번 스크린에서 놓친 작품들을 다시 보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래서 각각의 <A Star Is Born> 시리즈는 오리지널처럼 탄생해도 된다. 게다가, 최근의 두 작품은 40년 이상의 거리를 두고 있기도 하다.

 

결국 관객은 감동할 권리가 있다. 평론가들은 두꺼운 영화목록을 꿰차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보통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그들은 ‘흐트러진 낭만주의’에 마음을 열 수도 있는 것이다. 또한, 보르헤스가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에서 주장한 바에 의하면, 같은 작품이라도 시대와 독자에 따라 전혀 다른 작품으로 해석되고 수용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럴진대, 전혀 다른 음악을 사용하고, 전혀 다른 감독이 새로운 배우들을 캐스팅해 제작한 이 작품을 이전과 같은 작품이라고 느끼기는 어렵다.

 

 

2. 음악이 이끄는 영화

‘음악영화’에 사용되는 음악은 ‘영화음악’과는 차별되어야 한다. 음악영화의 음악은 플롯을 외면하지 않아야 할 뿐 아니라, 영화음악보다는 한 발자국 더 캐릭터의 내면에 다가가야 한다. <스타 이즈 본>은 그랬다. 감독은 꼼꼼히 음악을 챙겼다. 잭이 처음 약을 먹고 무대에 설 때, 그가 부르던 노랫말 중 인상적인 것은 “거짓은 안 돼.”라는 것과 “버려져 홀로 남은 외톨이”였다. 그를 이끌고 전개되는 두 개의 키워드 ‘진실’과 ‘외로움’이 노랫말 속에 일찌감치 드러난 것이다. 앨리가 골치 아픈 변호사 애인과 헤어지고 잭슨을 만나기 직전 흐르던 음악에는 “천국이 마법의 길을 열어주네. 구름이 하늘길을 뒤덮을 땐 무지개 길이 나타나지요.”라는 자구(字句)가 스토리 전개를 암시한다.

 

이러한 전개는 작품의 모든 시퀀스에 적용된다. 사랑에 빠졌을 때는 사랑을 노래하고, 그 사랑이 삐걱 거릴 때는 이별 앞의 갈등과 주저함을 노래한다. 이렇게 등장하는 꽤 많은 곡 중 두 번 이상 나온 곡이 두 곡 있다. ‘Shallow’와 ‘Maybe It’s Time’. ‘Shallow’에서는 두 주인공의 아픔과 전망이 동시에 투영되고, ‘Maybe It’s Time’은 두 주인공의 명암이 엇갈림을 암시한다. ‘옛 방식들이 사라질 때인가 봐.’로 시작하는 ‘Maybe It’s Time’의 노래 가사는 옛 스타일인 잭슨의 시대가 가고, 새로운 스타일의 음악을 추구하는 앨리의 시대가 도래함을 의미한다. 또한 ‘아무리 노력해도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아’ 또는 ‘죽은 뒤에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몰라’라는 가사는 남자 주인공의 고통과 비극을 암시하는 데 사용되었다.

 

 

3. 스타의 탄생

앨리는 처음부터 주관이 뚜렷한 여성으로 묘사된다. 변호사 애인을 거부하는 태도나 잭슨을 몰래 촬영하는 계산원에게 보내는 직설화법에서 그녀의 캐릭터는 꿋꿋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그녀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재능과 자질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검열하는 여인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자기가 쓴 곡은 부르지 않았고, 여장(女裝) 남성들이 공연하는 드래그 바(Drag Bar)의 유일한 여성이 되었다. 그녀는 가짜 가슴을 달고 노래하는 동료들 사이에서 가짜 눈썹을 붙이고, 아무래도 숨길 수 없는 코를 부끄러워했다. 그러나 그 코를 사랑하는 잭슨으로 인해 그녀는 도약의 기회를 얻었고, ‘스타’를 만들어주는 매니저(레즈 개브론)를 만나게 된다. 레즈는 앨리에게 ‘이미지’를 부여하려 하지만, 그녀는 “나다운 걸 잃을까 걱정이에요.”라며 자기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병행한다. 아마도 이때 그녀는 진짜 혹은 진실을 고집했던 잭슨을 기억했을 것이다. 이후에도 그녀는 매니저와의 대화에서도 노래 가사에서도 ‘자기다움’을 고수한다.

 

과연 앨리를 ‘스타’로 만들어 준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녀가 레즈라는 매니저를 만나지 못했다면, 그녀는 알려진 뮤지션이 됐을지언정 ‘스타’가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녀가 잭슨에게 빚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과연 그렇다. 앨리는 자기다움을 잃지 않았기에 별처럼 빛날 수 있었다. 그것이 넘치는 재능과 열정을 갖고도 무명인 사람들과 프랭크 시내트라의 차이이기도 하다. 

 

한편, 아버지가 63세에 사고를 쳐서 태어난 아들, 엄마의 품에 안겨본 적이 없고, 어려서 그 누구의 보살핌도 받아본 적이 없는, 외로웠던 소년 잭은 어른이 되어서도 내면의 상처로 고통받는다. 열세 살에 자살을 시도했던 그는 지옥 같은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냈을 것이다. 인간에 대한 가장 잔인한 형벌인 ‘무관심’의 심연. 그 결핍의 골은 깊게 마련이다. 잭슨의 마음에는 그렇게 ‘무시당하고 상처받은 내면 아이(Neglected, Wounded Inner Child)’가 자리 잡았다. 그리고 결핍은 중독으로 이어졌다. 칼 융(Carl Gustav Jung)은 중독을 “정당한 고통을 회피한 결과”라고 말했지만, 소년에게 세상은 부당하게 버거웠다. 그래서 세상의 소리를 외면하기 위해 음악의 세계에 들어갔는데, 결국 청력에도 이상이 생겨버렸다. 그리고 그의 상처받은 내면 아이는 여전히 슬퍼하고 있었다. 잭의 과거를 알게 된 앨리가 즉석에서 부르는 노래는 그의 내면을 요약하는 것이었다. 그의 ‘내면 아이’에게 말을 걸고 위로하는 것이었다.

 

“말해 봐, 소년(boy)아. 공허함을 채우려다 지치지 않니. 아니면 더 많은 게 필요하니. 악착같이 버티는 게 힘들진 않니.”

 

잭슨은 음악적 진실을 강조했으나, 그의 삶은 결국 본래의 모습이 아닌 알코올과 마약으로 포장된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연약한 자아는 자기 모순적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스타 이즈 본>은 한 ‘스타’의 공연에서 시작해 그가 사랑한 또 다른 ‘스타’의 공연으로 끝이 난다. 제목이 의미하는 ‘스타’는 분명 앨리이겠지만, 사랑을 위해 생명을 포기했고 외로움과 진실 사이에서 운명처럼 투쟁했던 잭슨 역시 ‘스타’였다. 더욱이 앨리가 부른 마지막 노래는 그의 곡이 아니었던가. 시나리오 작업에까지 참여했던 주연배우이자 감독 브래들리 쿠퍼는 기존의 작품들에 비해 잭슨의 존재감을 최대로 끌어올린 셈이다.  

 

 

 

4. 결말이 신파라고?

언제나 그녀를 지지해 주는 든든한 아버지와 잭슨의 영향으로 인해 앨리의 자아는 스타가 된 이후에도 건강하다. 잭슨을 위해 투어를 포기하고, 걸림돌이 되는 남편이었음에도 그의 사후(死後)에는 관객들에게 그를 위한 박수를 부탁한다. 그리고 예고된 임팩트가 선사된다. 잭슨이 만든 노래는, 앨리의 퍼포먼스를 통해, 작품의 클라이맥스에서 둘의 언어가 된다.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아. 다시는 불태우고 싶지 않아. 다시는 키스하고 싶지 않아. 다른 이름 부르고 싶지 않아. 새로운 사람에게 다시 마음 주고 싶지 않아.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되고 햇살이 비치는 것도 원치 않아. 다시는 사랑하지 않을 거야.”

 

낯간지러운 엔딩 송 ‘다시는 사랑하지 않을 거야(I’ll Never Love Again)’. 아픈 사랑을 보낼 때 누구나 다짐하던 이 절박한 맹세는 결국 통속이 된다. 시간을 이기지 못한다. 그러나 모든 이들에게 그들의 ‘현재 사랑’은 ‘영원한 사랑’이다. 서늘한 이성이 열정을 이길 수 없는 ‘때’가 존재한다. 사랑을 맹세하지 않는 건 연인의 도리가 아니다. 그럴 수 없다. 그래서 그 거짓됨을 알면서도, 관객들은 그 신파에 마음을 맡긴다. 아름다운 선율, 그리고 레이디 가가(Lady GaGa)의 가창력 모두 부족함이 없다.

 

 

 

* 사진 출처: 네이버 - 영화 – 스타 이즈 본 - 포토

 

 

글: 정동섭

영화평론가이자 영화연구자. 현 전북대학교 스페인중남미학과 교수. 『돈 후안: 치명적인 유혹의 대명사』, 『20세기 스페인 시의 이해』, 『영화로 보는 라틴아메리카』등의 저서와 『바람의 그림자 (전2권)』, 『파스쿠알 두아르테 가족』, 『돈 후안 테노리오』, 『스페인 영화사』, 『스페인 문학의 사회사 (전5권)』 등의 번역서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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