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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시내의 시네마 크리티크] 시간과 이야기 혹은 영화와 총, 데이빗 로워리의 <미스터 스마일>
[손시내의 시네마 크리티크] 시간과 이야기 혹은 영화와 총, 데이빗 로워리의 <미스터 스마일>
  • 손시내(영화평론가)
  • 승인 2019.01.21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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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스마일’은 데이빗 로워리의 신작 <The Old Man and the Gun>의 한국 개봉명이다. 원제는 ‘나이 든 남자와 총’, 혹은 ‘노인과 총’정도로 풀어 쓸 수 있을 것이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미스터 스마일’이란 이 영화의 주인공 포레스트 터커(로버트 레드포드)의 어떤 특징을 이르는 꽤 근사한 제목임을 알게 되지만, 별다른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 원래의 제목에 생각이 계속 머물게 된다. 이는 투박하지만 영화가 다루고 있는 소재에 대해 꽤 훌륭한 길잡이가 되는 제목이다.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배경은 1981년의 미국 텍사스와 그 일대. 포레스트 터커는 고령의 은행 강도다. 그는 양복을 차려입고 은행에 들어가 총을 슬쩍 보여주며 아주 정중하게 말한다. “여기 이 가방에 돈을 좀 채워주시겠소?” 그는 때로 혼자 행동하지만 3인조 강도단의 멤버이기도 하며 나머지 멤버도 대체로 그와 비슷한 나이다.(대니 글로버와 톰 웨이츠가 연기했다.) 이들은 보통 작은 은행을 상대하기 때문에 이 강도 행위가 사소한 사건 이상으로 번진 적은 없다. 그러다 이 사건을 주목하게 된 지역 형사 존 헌트(케이시 에플렉)가 그들의 행적을 추적하게 된다. 한편, 포레스트는 우연히 만난 쥬얼(씨씨 스페이식)에게 호감을 느끼고 만남을 지속하는 이들의 분위기는 퍽 로맨틱하다. 경험과 연륜이 풍부한 범죄자와 그를 뒤쫓는 형사, 적절히 배분된 범행과 로맨스가 이 영화를 이루는 요소들이다.

 

이쯤에서 나이 든 남자와 총에 대해 생각해보자. 전자는 물론 이젠 ‘은퇴’할 때가 된 듯한 포레스트의 나이 든 육체, 그 조건을 이르는 표현일 것이다. 총은 그가 지니고 다닌다고 소문처럼 알려진 것인데, 한때 그를 변호했던 변호사의 말에 따르면 포레스트는 총을 가끔씩 가지고 다니기만 할 뿐 한 번도 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대신 영화에서 총소리를 대신하는 것은 그가 몰고 다니는 자동차의 총소리 같은 배기음이다. 포레스트의 나이 든 육체와 총, 이것들은 <미스터 스마일>을 ‘시간과 이야기’에 대한 영화로 보게 만든다.

포레스트가 쥬얼과 처음 만나 카페테리아에 앉아있는 장면은 여러모로 흥미롭다. 그들은 서로를 조심스럽게 탐색하고 있는 듯 보이는데, 포레스트는 자신의 직업이 무엇인지 알려줄 듯 말 듯 하다. 그러다 아마도 은행 강도라고 썼을 메모를 쥬얼에게 보여주면 그녀는 어디 한 번 증명해보라고 한다. 포레스트는 벌떡 일어나 카페테리아를 터는 대신, 여기가 은행이라고 상상해보라며 강탈의 과정을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어 들려준다. 또 하나 흥미로운 순간은, 말 세 마리를 데리고 있다는 쥬얼에게 포레스트가 말 타는 것이 자신의 리스트에 들어있는 항목이라고 말할 때다. ‘하고 싶지만 아직 하지는 못한 것’이라는 이름이 붙은 그 리스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쥬얼이 서둘러야겠다는 말을 건네는데 포레스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어째서 그렇냐는 반응을 보인다. 쥬얼의 말은 아마 이런 뜻을 담고 있을 테다. ‘우리에게는 남은 시간이 별로 없잖아요.’

이를테면 포레스트에게 삶은 에피소드의 계속되는 연쇄로 이루어지는 것 같다. 그와 그 동료들의 강도사건은 여기저기에서 그저 꽤 재미있고 어이없는 이야기 정도로 회자된다. 나이 든 세 명의 남자가 은행에서 돈을 훔쳐 유유히 사라진다더라, 하는 것이다. 포레스트는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처럼 산재한 에피소드들의 형태로 존재해왔다. 후반부에 이르러 그의 범죄자로서의 삶이 13세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 밝혀진다. 자전거를 훔친 것으로 시작되는 그의 화려한 이력에는 16번의 기록적인 탈옥이 포함되어있다.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이 16번의 탈옥 일화는 플래시백의 형태로 삽입된다. 이는 웃기는 이야기들이자 굉장한 이야기들, 그야말로 이야기(story)들이다. 많은 이들이 보거나 들었다고 믿는 그의 총(소리)를 이와 함께 생각해보고 싶은 충동이 인다. 영화의 촬영 혹은 장면을 이루는 단위로서의 쇼트(shot)와의 말장난과 같은 연관성을 떠올리면서, 매번의 에피소드가 종료될 때 듣게 되는 가상의, 혹은 자동차 배기음이 대신하는 총소리(shot)가 그야말로 매 에피소드를 종결한다고 생각해보는 것이다. 물론 실제로 총은 한 번도 발사되지 않았기에 한 편의 영화 안에서 에피소드는 끊임없이 이어진다. 포레스트에게 삶의 시간은 결코 흐르는 것이 아니다. 그의 삶은 파편적인 이야기들로써만 이루어진다.

 

그러나 덧없고 지루하게도 시간은 흐른다. 포레스트는 나이를 먹어가며 일당은 미래를 걱정해야 하고, 아무도 대놓고 말하진 않았지만 그 끝에는 죽음이 있을 것이다. 삶도 사건도 지나가고 나면 드러나게 되는, 혹은 그것과는 무관하게 존재하는 시간이 있다. 데이빗 로워리의 전작 <고스트 스토리>에서도 그 비슷한 감각을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형식화조차 되지 않는 텅 빈 시간. 그에 대한 이야기가 전면화되는 것은 아니지만, 쥬얼의 집 벽에 100년 전 주인이 남긴 낙서가 남아있는 것처럼 <미스터 스마일>에서도 이야기들이 벗겨진 자리에 드러나는 텅 빈 시간이 있다. 포레스트는 그것을 그 자체로 견딜 수 없는 사람이다. 마치 지금까지 무수히 많은 영화들이 시간을 잡아채고 찍어서(shot) 자기 자신을 완성해왔듯이 그도 그렇게 이야기를 만들어 삶을 지탱해왔다고 말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다시 한 번 감옥에 들어갔다가 나온 포레스트에게, 쥬얼과 함께하는 일상은 너무나 지루해 보인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아무런 이야기도 없는 시간. 은행을 터는 것이 생존보다는 삶의 방식과 더 관련이 있다는 이 캐릭터에게 이를테면 범죄-사회적인 분석 같은 것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그보다는 그가 은행 수송차를 털기 위해 계획을 세우던 어느 장면에서 스쳐 지나가는 젊은 여자의 상담 내용을 돌이켜보며, 은행이란 안정적인 미래를 약속하는 곳이 아니었던가를 떠올려보게 된다. 포레스트에게는 과거나 미래가 흘러가는 시간의 일부로 감각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재빨리 발생하고 종결되기를 반복하는 에피소드로서의 삶을 통해 시간의 흐름을 망각하지만 그 자신의 몸은 매일 조금씩 늙어간다. <미스터 스마일>은 일면, 그 비슷한 욕망으로 지탱되어 온 ‘영화’가 가진 속성을 드러내는 것 같다. 그러니 포레스트의 육체, 여기선 더 정확히 말해 로버트 레드포드의 육체가 놓인 조건처럼 영화에게도 해소되지 않는 모순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건 시간과 사건에 대한 면밀한 탐구를 통해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미스터 스마일>을 보고 The old man and the Gun이라는 원제목을 떠올리며 그런 생각을 했다.

 

글·손시내                                                                                                                                                                                                        2016년 영평상 신인평론상 수상. 한국독립영화협회 비평분과에서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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