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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아름의 시네마 크리티크] 섹시해‘보이는’ 소재의 함정–질문과 답이 부재한 영화들
[송아름의 시네마 크리티크] 섹시해‘보이는’ 소재의 함정–질문과 답이 부재한 영화들
  • 송아름(영화평론가)
  • 승인 2019.01.22 09: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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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발 선 눈, 더 이상 크게 벌릴 수 없을 만큼 열린 입을 뚫고 나오는 기괴한 외침과 울부짖음, 미처 여미지도 못한 옷깃과 휘청거리는 걸음. 누군가가 이렇게 변하기까지를 우리가 알고 있다면, 이 광기어린 모습은 분명 슬픔이나 분노, 증오나 안타까움이라는 감정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적어도 그의 삶을 이해할 수 있었다면 그에 대한 긍정이든 부정이든 그 인물에 대한 여운이 남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 이처럼 나락까지 떨어지며 피폐해진, 그러니까 극단의 상황으로 몰려 포효하는 인물들이 상당 수 한국영화의 말미를 장식하고 있음에도 관객들에게 어떠한 호응도 얻어내지 못했다. ‘기대작’이라는 이름으로 홍보되었던 숱한 영화들이 빠른 속도로 극장에서 사라진 것은 이를 잘 보여주었다.

아직 공개되지 않은 영화를 ‘기대작’으로 격상시키는 데에는 생각보다 많은 요소가 필요하지는 않다. 감독의 이름이나 그의 전작 혹은 배우는 한 영화의 성격을 추측할 때 가장 용이한 측정값으로 작용하며 기대 ‘이상’, ‘이하’ 혹은 ‘그저 그렇다’를 가르는 기준이 된다. 작년 말부터 개봉된 많은 영화들은 바로 이 기대를 상승시키는 데에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감독과 배우들이 대거 스크린의 등장을 예고했고, 관객들은 전쟁터와 1970년대, 조선시대의 괴물과 역병, 그리고 초능력을 지닌 이의 등장과 미래의 사회, 벙커 속의 생존논리 등등을 기대했다. 그러나 이 영화들은 관객들의 외면 속에 빠르게 스크린에서 사라졌고, 이에 대한 무수한 기사들을 쏟아냈다.

 

이 영화들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 최근 몇 년간 하나의 경향을 만들어낸 한국영화의 특징을 먼저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요즘 한국영화제목 옆에 붙는 연관검색어 ‘원작, 실화’ 등이 그것이다. 이 검색어들은 원작을 정확하게 명시하지 않는 관행뿐만 아니라 현재 한국영화의 ‘창작’이 사라졌으며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가’에 대해 누구도 깊은 고민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앞으로도 인기가 있던 웹툰, 웹소설이나 드라마틱한 실화와 폭로를 필요로 하는 사회문제 등은 이미 상당부분 스크린에 당도할 것을 예약해 두었다. 중요한 것은 여기에 있다. 현재 한국영화들은 ‘있었던 무엇’, 그것만을 믿은 채 그 안에서 발생할 무수한 질문들에 대한 대답들을 미뤄두고 아무도 내 이야기를 듣지 않는다며 억울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위에서 언급한 영화의 소재들은 분명 호기심을 끌기에 충분한 장면들을 상상하게 한다. 1970년대라는 그 경직된 시대에 마약이 유통된다니, 정적(靜的)인 과거의 어느 곳에 괴물과 역병이 등장한다니, 밀폐된 곳에서의 액션이라니, 하늘을 나는 이의 초능력이라니 등등의 호기심은 스크린을 화려하게 꾸밀 수 있는 충분한 장면들을 담보한 것이었을 테다. 마약으로 갑작스레 돈을 번 이가 즐길 방탕함과 화려함, 괴물등장 자체와 역병으로 인한 인간의 변화, 초능력의 가시화, 액션의 시원함 등등. 그러나 이 장면들은 상상한 그 이상을 벗어나지 않았고, 과도할 정도로 등장하면서 러닝타임을 늘려놓았음에도 그 장면들에 대해 이야기할 만큼의 의미를 얻어내지 못했다. 즉, 이 장면들은 소재가 가질 수 있는 흥미 이상, 이미 상상했던 선 이상을 넘어가지 못한 채 영화에서 어떠한 기능도 발휘하지 못했고, 나열 이상의 의미도 확보하지 못했던 것이다.

 

가령, “내가 이 나라를 먹여 살렸는데!”라는 <마약왕> 속 이두삼(송강호)의 외침은 그래서 공허하다. 이 영화는 ‘1970년대’, ‘마약’, ‘남성’, ‘권력’으로 버무릴 수 있는 수많은 장면들을 깔아두었지만, 왜 스스로가 이 나라를 먹여 살렸다고 생각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는다. 이두삼은 마약을 접하며 나락으로 빠져가는 인물로 치장되어 있었을 뿐, 그가 번 돈을 어떤 식으로 국가가 이용하려 했는지, 혹은 돈만은 자를 어떻게 취하고 버렸는지 등에 대해서 이 영화는 아무런 답변도 내놓지 않는다. 즉 그저 ‘작은’ 불법으로 잘 먹고 잘 살겠다고 생각했던 그가 ‘돈’과 ‘1970년대’ 의 무엇 혹은 누구 때문에 ‘나라를 먹여 살리는 이’로 스스로를 인식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고민과 그에 대한 답이 삭제되어 있는 것이다. 그가 갑작스레 새마을 운동 지도자 대회의 단상에 오르고 유명인들 사이에 놓이지만, 이 역시 시대상의 일부일 뿐, 그것이 ‘왜’, ‘어떻게’ 그를 단상으로, 유명인들의 틈으로 불러내었고,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가 이 나라를 먹어 살렸다고 생각했는지에 대해서는 답해주지 않는다.  

 

이 영화들이 선택한 방식은 대체로 여기에 있었다. 그렇기에 인물의 고뇌도, 고통도, 포효도 관객들에게 어떠한 감정도 불러일으키지 못한 채 대체로 아쉬운 배우의 열연으로 그쳤고, 관객들이 이야기할 거리 자체를 남기지 못했다. 영화가 선택한 그 시대가, 혹은 실존의 인물이, 혹은 원작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라는 안일한 믿음의 결과로 생산된 소재주의 영화들은 결국 그 시대와 그 인물과 그 원작에 대한 어떠한 해석도 내리지 않았다는 데에서 허무하게 떠다니는 무음과 다르지 않다. 최근의 관객들, 그러니까 각종 극(Drama)과 내러티브를 무수히 소비하고 있는 관객들이 현재 어떤 방식으로 극을 소비하고 극에 대한 재생산을 해나가는지를 생각한다면, 궁금할 듯 보이지만 결국 소재만으로 치장한 영화가 관객들과 아무런 소통도 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은 너무도 자명하다.

논쟁은 해석에 대한 대결의 가능성에서 비롯된다. 최근의 한국영화 사이에서 한 시대, 혹은 인물, 혹은 사건에 대한 논쟁 자체가 사라져버렸다는 것은 무수한 영화들이 해석에서 멀어져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의 호오(好惡)가 아닌 영화의 시각에 대한 대화의 요청은 영화가 이루어낼 수 있는 가장 충실한 소통의 방식일 것이다. 예상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것, 그에 대한 담론의 생산은 늘 수용자가 바라는 관람의 방식이지 않을까.

기대작의 ‘기대’를 만족시키지 못했던 다수의 영화들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글·송아름                                                                                                                                                                                                           영화평론가. 한국 현대문학의 극(Drama)을 전공하며, 연극·영화·TV드라마에 대한 논문과 관련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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