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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숭범의 시네마 크리티크] 이 허무맹랑한 슬픈 판타지, <천상의 피조물>
[안숭범의 시네마 크리티크] 이 허무맹랑한 슬픈 판타지, <천상의 피조물>
  • 안숭범(영화평론가)
  • 승인 2019.02.25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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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통념에 개의치 않고 극단적으로 엇나가버린 작품을 ‘괴작’이라고 한다. 평균적인 기대치에서 심하게 망가진 작품을 ‘망작’이라고 한다. 일각에서는 이 영화를 괴작이라고 했고 소수의 사람들은 망작이라 평했다. 그러나 족보에 없는 방식으로 판타지 영화의 관습을 가지고 노는 경지를 언술하자면, 이 작품은 ‘걸작’이거나 최소한 ‘수작’이다. 논쟁 아래 묻어두기에는 아까운 영화, 지금부터 나는 <천상의 피조물>에 대해 이야기할 참이다.

<반지의 제왕> 시리즈로 피터 잭슨을 처음 만난 사람은 동시대 그 누구보다 숙련된 판타지 영화감독으로 그를 기억할지 모른다. 그러나 피터 잭슨은 해괴망측한 B급 영화들로 자신만의 컬트 왕국을 구축하며 출발한 감독이다. 데뷔작 <고무 인간의 최후>는 형언하기 힘들 정도로 뻔뻔한 스플래터 무비였다. 온갖 장르의 클리셰가 재기발랄하게 뒤섞인 SF이기도 했다. <천상의 피조물>의 직전 작품인 <데드 얼라이브>는 컬트 취향의 극점을 보여준 하드고어한 좀비 호러다. 비위 좋은 사람들도 식사 시간 전에 보면 결국 밥을 먹기 어렵다는 그 영화가 이 영화다. 그러나 피터 잭슨은 살점이 튀는 상황에서도 슬랩스틱 코미디를 구사하는 넉살을 가진 괴짜였다.

여기서 우리는 영화가 본래 리얼리즘의 예술이란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굳이 앙드레 바쟁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영화가 탄생함으로써 사진적 객관성이 현실의 시간을 따라 동태적으로 재현되기 시작한다. 영화의 아버지가 되는 그 어떤 예술 장르도 영화보다 ‘현실적 실감’을 뿜어내기 어렵다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의 심미적 욕망은, 때때로 자연세계를 모방하는 선에서 다스려지지 않는다. 하고많은 제약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은 초현실적 배경, 비현실적 캐릭터, 탈일상적 사건들로 점철되는 상상적 무대를 강력하게 요청한다.

 

그 때문에 SF, 호러, 판타지 장르에 속하는 이야기들은 쉬이 죽지 않는다. 죽을 수 없다. 비록 일시적 쾌감이지만, 정신적·물리적 구속을 초월하는 일탈감을 얻기 위해 판타지 영화를 찾는 사람이 있다. 시공간적 제약을 무시해도 좋은 세계에서 비약적인 자유감 혹은 해방감을 누리기 위해 판타지 영화를 보는 사람도 있다. 문제는 카메라에 의한 현실의 모방과 재현을 뼈대로 하는 영화가 세련된 판타지 장면을 주물해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SF, 호러, 판타지 장르가 B급 영화의 주력이었던 이유도 그와 관련된다.

<천상의 피조물>은 피터 잭슨의 필모그래피에서 유의미한 시발점에 놓인다. 자신만의 컬트적 취향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평균적인 대중의 감수성에 호소할 수 있는 길을 찾은 첫 작품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이 영화는 1954년 뉴질랜드에서 실제 벌어진 존속 살해사건을 배경으로 제작되었다. 그 때문에 <천상의 피조물>은 현실의 지명과 역사, 인물들에 대한 정보가 어느 정도 반영되어 있는 로우 판타지에 해당한다. 그러나 교환 일기를 쓰면서 둘만의 판타지 스토리를 구축해가던 그녀들은 현실 세계에서의 균형감각을 점차 놓아 버린다.

 

줄거리를 좀 더 소상히 복기해보자. 영화 속 배경은 1950년대 뉴질랜드의 평화로운 소도시 크라이스트처치다. 그곳의 엄격한 여중에 다니는 폴린은 외골수처럼 보이는 촌뜨기 소녀다. 이야기의 시작은 그녀 곁으로 당돌한 소녀 줄리엣이 전학을 오면서 부터다. 성격은 정반대였지만 그녀들은 판타지 소설을 함께 쓰면서 급격하게 가까워진다. 둘만의 친밀한 우정은 동성애적 관계로까지 발전한다. 그 과정에서 그녀들은 문학적으로 구축한 도피적 상상의 세계에 기거하며, 판타지로 현실을 대체해 버린다. 갑갑한 경험세계의 압박을 벗어날 수 있는 이야기의 조물주이면서, 그 기이한 이야기 안에 머물며 맹랑한 피조물로 사는 삶을 택한 것이다.

<천상의 피조물>을 괴작이나 망작으로 보는 사람들은, 이 영화가 위험한 동성애에 투신한 소녀들의 일탈을 옹호한다고 말한다. 발랑 까진 소녀들의 망측한 상상을 지지한다며 비판한다. 결말을 두고서도 허무맹랑한 살인을 합리화하려 한다고 공격한다. 그러나 피터 잭슨은 영화 초반부터 기이한 상상과 섬뜩한 폭력에 의미심장한 수사적 논리를 부여해 왔다. 폴린은 자유분방한 줄리엣에 호감을 느꼈을 뿐만 아니라 안정적인 부르주아 계급을 표상하는 줄리엣의 부모에게도 호감을 느낀다. 그러나 영국 귀족을 연상시키는 줄리엣의 부모는 자녀에 대한 책임을 방기하고 있으며, 외도(엄마)와 자기 입지 마련(아빠)에 더 큰 관심이 있다. 학교는 폭력적 규율 기관에 가깝고, 의사는 두 소녀의 선을 넘나드는 우정을 ‘정신장애(mental disorder)’로 규정한 후, 그녀들의 행위를 ‘불건전한(unhealthy)’ 것으로 단정해버린다.

결국 그녀들이 함께 써내려간 판타지 세계는 현실의 결핍과 구속이 상상적으로 해소되는 슬픈 천국이다. 그녀들에 의해 ‘the fourth world’로 명명된 그 판타지 왕국의 시민들은 점토인형들이다. 그 판타지 안에서 당대의 테너 마리오 란자는 로맨틱한 남자로, 영화감독 오손 웰즈는 위협적인 반동 캐릭터로 출몰한다. 거기서 공주로 살아가는 그녀들은 문제를 야기하는 자들에게 무자비한 복수를 가한다. 살인이 놀이로 승화된 장면들은 매우 과장적이다. 그러나 유별난 상상력을 소거해야 ‘성장’을 인준해주는 사회에 대한 위반의 수사가 거기에 있다.

판타지 세계에 함몰된 두 소녀는 결국 폴린의 엄마를 살해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서로를 떨어뜨려 놓으려는 세계에 끝까지 저항한 결과다. 피터 잭슨은 이 비극의 기원을 사춘기 소녀들의 동성애 기질에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두 소녀의 현실에 대한 충격적 일갈을 재평가 해달라고 요구할 뿐이다. 빼어난 판타지 영화는 상상적 세계의 논리로 사회의 어두운 구석을 긁고 베고 찌른다. 오늘은 날카롭게 벼려진 피터 잭슨의 판타지 영화를 경유해 우리 각자의 ‘the fourth world’가 밟고 선 현실을 더듬어 봐도 좋겠다.

 

 

 

※ 이 글은 월간 『쿨투라』 2019년 1월호에 실은 동명의 글을 부분 수정하여 게재했음을 밝힙니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글: 안숭범

영화평론가. 시인.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EBS <시네마천국>을 진행했으며 지금은 문화콘텐츠 기획 및 비평에 매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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