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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성적 혁명론자에서 극단적 자유주의 선동가로-소설가 바르가스 요사의 편력
열성적 혁명론자에서 극단적 자유주의 선동가로-소설가 바르가스 요사의 편력
  • 이냐시오 라모네
  • 승인 2010.11.05 16: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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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유머·에로티시즘·잔혹함 뒤섞은 글 전개 탁월
열성적 혁명론자에서 극단적 자유주의 선동가로 변신

2010년 노벨문학상(1) 수상자인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신간 소설이 때마침 스페인어권 국가에서 11월 3일 발간됐다. <켈트의 꿈>이라는 제목의 최신작은 ‘로저 케이스먼트’라는 실존 인물을 바탕으로 했다. 케이스먼트는 아프리카 내 영국영사를 지냈고, 레오폴드 2세 치하 국왕의 사유재산이나 다름없던 벨기에령 식민지 콩고에서 자행된 잔혹한 학살(사망자가 1천만 명에 이름)을 1908년 처음으로 고발한 비범한 인물이다. 또한 케이스먼트는 다른 보고서를 통해 페루 아마존 지역 원주민의 고뇌와 비판을 널리 알렸다. <<원문 보기>>

인권보호의 선구자인 케이스먼트는 더블린 근처에서 태어났고, 성인이 되어 아일랜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전쟁이 한창일 때, 그는 “영국의 곤란은 곧 아일랜드에 호재”라며 독일과 동맹을 맺어 영국에 대항하려 했고, 국가반역죄로 체포됐다. 영국 정부는 진위가 불분명한 일기의 내용을 바탕으로 케이스먼트에게 ‘동성애 행각’을 벌였다는 혐의를 씌웠고, 1916년 8월 3일 그를 처형했다.

바르가스 요사가 이야기를 어떻게 끌어나가는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그의 소설은 충분히 신뢰할 수 있다. 스페인어권 작가 중 그만큼 첫 페이지부터 독자를 사로잡으면서 열정과 유머, 에로티시즘과 잔혹함이 뒤섞인 이야기의 실타래를 흥미진진하게 풀어가, 독자가 책을 내려놓지 못하게 하는 작가는 없다.

당대 스페인어 작가 중 최고

물론, 그의 소설은 “식민주의의 악행을 처음 꿰뚫어본 유럽인 중 한 명”이었지만(2) 역사에서 잊혀진 로저 케이스먼트를 조망했다는 점에서 이미 가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식민주의에 대한 케이스먼트의 시각은 바르가스 요사도 동의하는 부분이다. 바르가스 요사는 “식민주의만큼 야만적인 것은 없다”며 이른바 ‘식민주의의 기여’에 대한 논의를 일축했다. 그는 “아프리카는 식민주의 지배가 낳은 부작용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식민주의의 긍정적 영향이라는 것은 없다”(3)고 잘라 말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바르가스 요사는 라틴아메리카 원주민의 권익보호운동에는 적대적이다.
 

▲ 그래피티 작가 뱅크시의 벽화. 출처: www.banksy.co.uk

바르가스 요사가 역사적 인물을 통해 사회의 불의를 고발하려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또한 사실주의 소설과 사회소설의 기법, 심지어 추리소설 기법을 역사소설 기법과 적절히 배합하는 데는 그를 따를 사람이 없다. 19세기 말 유토피아를 찾아나선 계몽 기독교인들이 브라질 북동부 지역에서 일으킨 봉기를 그린 <세계 종말 전쟁>이 대표적인 예다. 도미니카공화국의 트루히요 장군의 독재 치하이던 1930~61년 사회의 피폐한 모습을 풍부한 배합으로 그려낸 <염소의 축제>(4)도 빼놓을 수 없다.

그의 대표적 명작으로 꼽히는 소설들은 ‘현대사’를 주제로 했다. <카테드랄 주점에서의 대화>는 1948년에서 56년까지 오드리아 장군 독재기의 페루와 1950년대 남미의 현실, 그 속에서 인간이 처한 운명의 난해함을 다뤘다. 노벨문학상 심사위원들이 바르가스 요사의 수상을 결정한 이유이기도 하다. “권력구조에 대한 면밀한 묘사와 이에 대한 개인의 저항, 항거, 좌절을 신랄하게 그려냈다”는 것이다.

 

반식민·반독재의 사회주의자에서

이 소설을 집필할 때, 바르가스 요사는 파리에서 살고 있었고, 향후 남미 문학의 꽃을 피울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훌리오 코르타사르, 카를로스 푸엔테스 등 젊고 유망한 작가 세대에 속해 있었다. 이들은 모두 좌파 성향을 띠었고, 게릴라들을 지지했다. 페루 게릴라들을 지지하는 글에서 바르가스 요사는 당시 “오직 무력만이 세상을 바꾸는 힘이다”라고 썼다.

그는 쿠바혁명에도 절대적인 지지를 보냈다. 바르가스 요사는 1967년 8월 4일 베네수엘라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앞으로 10년, 20년, 50년 후 라틴아메리카에는 지금 쿠바에서처럼 사회정의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다. 그때야말로 라틴아메리카 전체가 그들을 수탈한 제국주의와 착취를 일삼은 사회계급, 그들을 억압한 세력에게서 자유를 되찾을 것이다. 나는 이 시기가 하루빨리 오기를 바란다. 그때야말로 라틴아메리카가 진정으로 인간의 존엄성과 현대적인 삶의 혜택을 누릴 것이며, 사회주의가 시대착오적인 삶과 공포에서 우리를 해방시킬 것이다.”

1970년대 초반 열성적인 혁명론자인 바르가스 요사에게 지적 충격을 준 책이 있었다. 바로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예속으로의 길>과 칼 포퍼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이었다. 특히 칼 포퍼는 바르가스 요사를 변모시켰다. 그는 “나는 동시대의 가장 중요한 철학자로 칼 포퍼를 꼽는다. 지난 20여 년간 내 인생의 상당 시간을 칼 포퍼의 책을 읽는 데 보냈고, 만약 누가 ‘동시대 가장 위대한 철학서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이라고 한 치의 주저 없이 대답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그는 쿠바혁명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고, 좌파 지식인이던 과거와 단절했다. 대신, 전향자다운 열정으로 신자유주의의 편에서 적극적인 정치운동을 벌였다. 바르가스 요사는 새로운 영웅으로 로널드 레이건과 마거릿 대처를 꼽았다. 특히 ‘보수주의 혁명’의 상징인 대처 총리를 향해 “살아 있는 그 어떤 정치인에게도 보이지 않은 절대적인 존경과 경외”를 표했다.(5) 그는 대처주의에 열광해 런던으로 이사했고, 1990년 ‘철의 여인’의 은퇴 당시 다음과 같은 전언을 담은 꽃다발을 보냈다. “자유 수호를 위해 당신이 일궈낸 성과에 대한 감사는 사전에 나와 있는 어떤 단어로도 충분치 않습니다.”(6)

페루 대선 나섰다 낙선… 영구 이주

1990년 바르가스 요사는 ‘대처주의’를 공약으로 내걸고 페루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지만, 알베르토 후지모리 대통령에게 참패했다. 페루 국민의 배은망덕함에 배신감을 느낀 그는 국외로 영구이주하고, 페루는 자신을 국민으로 가질 자격이 없다며 급기야 국적도 포기했다.

한편 바르가스 요사는 마거릿 대처에 이어, 또 다른 존경하는 정치인을 발견했다. 1996년부터 2004년까지 스페인 총리를 지냈고, 이라크 침공 당시 조지 부시 대통령과 동맹을 맺었으며, 현재 루퍼트 머독의 뉴스그룹에 자리를 잡은 호세 마리아 아즈나르였다. 아즈나르 전 총리는 자유주의자의 대표주자로 알려졌다. 미국에서 발행하는 국제정치 전문지 <포린폴리시>는 아즈나르 전 총리를 ‘세계에서 가장 무능한 정치인 5인’으로 선정했지만, 바르가스 요사는 아즈나르 전 총리가 “미래의 사학자들에게 역사상 위대한 정치인 중 한 명으로 꼽힐 것”이라 주장했다.(7)

또한 그는 이탈리아의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를 “탁월한 정치 역량을 지닌 인물”(8)로, 프랑스의 니콜라 사르코지를 “카리스마적인 인물”로 묘사했다. 그가 이런 모습을 보인 것은, 이 문학의 거장이 두 가지 성격을 가진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의 소설이 가진 매력 뒤에 감추어진 인물은 다름 아닌 맹신론자의 얼굴이다. 지난 40여 년 동안 바르가스 요사는 미디어 활동과 포럼 및 세계적인 콘퍼런스에서 연설에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거의 광적이라 할 수 있을 정도의 끈질김으로 자신이 가진 이념의 기본 논리를 반복해 주장했다.

극단적인 자유주의 선동가로서 바르가스 요사는 미국기업연구소가 자유주의자에게 수여하는 어빙크리스톨상 수상자이자, 국제자유재단 회장이며, 전문적인 네오콘으로 알려졌다. 그가 2003년 이라크 침공과 2009년 6월 온두라스 쿠데타를 정당화한 것은 스스로 네오콘임을 보여주는 증거다.

이라크 침공 옹호하는 선동가로

`레이건주의자’인 프랑스 에세이 작가 기 소르망은 지난 10월 7일 자신의 블로그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프랑스였다면 극단적인 자유주의자로 불렸을 마리오가 활동하는 라틴아메리카에서 우리는 자주 같은 장소에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는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전 의장, 모랄레스 볼리비아 대통령,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 키르치네르 전 아르헨티나 대통령을 끊임없이 공격했다. 조금이라도 사회민주주의적 색깔이 있는 정책은 가차 없이 비난했다.”

바르가스 요사는 자신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작가로서의 업적뿐 아니라, 자신의 이념 덕분이라는 점을 재차 강조했다. “제 정치이념이 때마침 좋은 시기를 맞아 받아들여졌다면야 그보다 좋은 일이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루이 페르디낭 셀린의 찬미자인 바르가스 요사는 “루이 페르디낭 셀린이 <밤의 끝으로의 여행>이라는 걸작을 쓴 ‘탁월한 소설가’이기는 하지만, 실제론 혐오스러운 성격의 인물”이라고 말했다. 그는 루이 페르디낭을 빗대어 “걸출한 작가이기는 하지만, 실제론 존중할 가치가 없는 사람이 상당수 있다”고 덧붙였다.(9)

글•이냐시오 라모네 Ignacio Ramonet
파리7대학 명예교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전 발행인

번역•김윤형 hibou98@naver.com
파리3대학 통번역대학원 졸.

<각주>
(1)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는 라틴아메리카 출신으로는 6번째 노벨문학상 수상자다. 첫 수상자는 1945년 칠레 출신의 가브리엘라 미스트랄이고, 그다음으로 미겔 앙헬 아스투리아스(과테말라·1967), 파블로 네루다(칠레·1971),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콜롬비아·1982), 옥타비오 파스(멕시코·1990)가 있다.
(2) <엘파이스>, 마드리드, 2010년 8월 29일.
(3) Ibid.
(4) <갈리마르>, 파리, 2002.
(5) 훌리오 롤단이 인용, ‘바르가스 요사, 현실과 허구 사이’, 텍툼 베르라그, 마르부르크, p.161, 2000.
(6) Ibid.
(7) <베인티미누토스>, 마드리드, 2007년 7월 6일.
(8) <일 코리에레 델라 세라>, 로마, 2009년 3월 9일.
(9) <라나시온>, 부에노스아이레스, 2006년 3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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