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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시내의 시네마 크리티크] 조너선 드미가 담은 가족의 초상, ‘레이첼, 결혼하다’
[손시내의 시네마 크리티크] 조너선 드미가 담은 가족의 초상, ‘레이첼, 결혼하다’
  • 손시내(영화평론가)
  • 승인 2019.03.18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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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열리는 레이첼(로즈마리 드윗)의 결혼식을 앞두고 사람들이 속속 모여든다. 약물중독으로 재활원에서 생활하는 여동생 킴(앤 해서웨이)도, 이혼 후 자매와는 떨어져 지냈던 엄마 애비(데브라 윙거)도. 지난 2017년 세상을 떠난 조너선 드미의 <레이첼, 결혼하다>(Rachel Getting Married, 2008)는 결혼식을 준비하고 실행하는 동안 가족들이 마주치며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들을 담는다. 어딘지 과하게 자신을 반기는 아빠 폴(빌 어윈)의 차를 타고 집에 도착한 킴으로부터 시작되는 영화는, 사소한 행동과 미묘한 표정들을 통해 이 가족이 과거에 묻어둔 비밀과 각자가 가지고 있는 상처를 어렴풋이 드러낸다. 역시 환하게 웃으며 반겨주는 언니 레이첼이 있는 집이건만, 킴은 어느 방에도 편히 속하지 못하는 것 같다. 아빠는 시종 노심초사하며 킴에게 신경을 쏟고, 레이첼은 이기적이고 철없이 구는 킴이 못마땅하다. 오랜만에 만난 엄마는 가족의 일과 자신 사이에 최대한 선을 그으려는 것 같다.

 

각자의 문제와 불만을 품고 있는 이들은 그래도 결혼식이라는 큰 행사를 잘 치러내기 위해 애쓴다. 집에서의 결혼식인 만큼 신경 써야 할 것들도 많다. 킴은, 당장은 이 활발하고 생기로운 결혼식에 떨어진 시한폭탄같이 보이지만 영화는 그녀의 다양한 순간들을 편견 없이 담는다. 사랑하는 언니의 결혼식에서 별로 할 일이 없어보이자 무기력해하는 것 같다가도, 중독자 모임에 나가 과거를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이기도 한다. 너무나 사랑하다가도 너무나 미워하고, 미안해하면서도 자기 자신을 방어하는데 몰두하는 킴의 모습은 이 영화가 담고자 하는 가족의 모습과 그 구성원의 속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다. 흘러넘치는 애정과 끓어오르는 분노, 서로에 대한 걱정과 짜증,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용기와 주저가 여기 동시에 담긴다. 이 감정들은 그야말로 동시에 발생난다. 전자가 후자를 무마하거나 그 반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감정들이 뒤엉켜 가족 사이에 자리한다. 마치 신부와 신랑의 가족, 친구들이 모두 모인 저녁 식사시간에, 술에 취한 이들이 두서없이 아무런 소리나 늘어놓는 것처럼.

감정들이 그렇듯 사건들도 동시에, 갑작스레, 두서없이 발생한다. 이미 서로를 향해 매몰찬 말을 한 뒤, 킴과 레이첼이 함께 미용실에 간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갑작스럽고 섬뜩한 순간일 것이다. 레이첼과 약간의 거리를 두고 앉아 머리를 염색하는 킴에게 어떤 남자가 다가온다. 그는 언젠가 킴과 함께 재활원에 있던 사람으로, 킴이 썼던 노트를 읽고 치유 받았던 일화를 이야기한다. 그걸 듣는 레이첼의 표정은 일그러지고 그녀는 곧 문을 박차고 나간다. 남자가 말한 이야기들은 모두 킴이 꾸며낸 거짓말이다. 여기선 물론 불안정한 상태에서 자신의 자매에 대한 애정과 집착을 과장하고 왜곡했던 킴의 감정에 대해서 이야기해 볼 수도 있겠지만, 갑작스레 끼어들어 평온한 얼굴로 자매의 관계를 찢어놓는 남자의 이상한 등장 자체에 대해 자꾸 생각하게 된다. 과거와 슬픔 같은 것들은 너무도 갑작스레 찾아오고 별 것 아닌 얼굴로 다시금 사람들에게 상처를 낸다. 유리 접시들 사이에서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는, 오래 전 사망한 남동생의 플라스틱 접시가 그러하듯 말이다.

 

<레이첼, 결혼하다>의 형식적 특징은 무엇보다 홈 비디오처럼 보이는 촬영 방식이다. 여러 사람이 있을 때나, 둘 혹은 셋만 있을 때, 심지어 혼자 남겨졌을 때도 누군가가 캠코더로 찍은 것 같은 밀착되고 흔들리는 촬영 형식을 영화는 끝까지 유지한다. 때로는 실제로 캠코더로 찍은 듯 저화질의 장면들이 끼어들기도 한다. 이러한 형식은 많은 사건과 다양한 감정이 동시에 발생하는 이 가족과 영화의 상태를 포착하기에 적합한 것 같다. 삶의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을 남기기 위해 그걸 영상으로 찍더라도, 결코 우리가 원하는 바로 그 순간만을 찍을 수는 없다는 걸 이 영화는 홈 비디오의 형식을 빌려 말하고 있는 듯하다. 대신 모든 것들이 가감 없이 담기는 홈 비디오의 촬영 형식을 빌린 이 영화는 가족의 기쁨과 슬픔, 사랑과 미움을 어느 하나도 버리지 않고 차곡차곡 쌓는다. 결혼식을 위해 모인 일시적인 공동체의 면모도 인종적, 문화적으로 다양하다. 영화의 카메라는 그처럼 다양하고 복잡한 사람들의 모습과 결혼식의 풍경을 마치 관찰하듯, 때로는 구성원의 일부인 듯 친밀하게 담는다. 과거의 아픔이 갑자기 출몰하고 가족은 여전히 서로를 사랑하는 만큼 미워하지만 어쨌든 여기, 결혼식이 계속되고 있다. 결혼식을 올리는 신랑은 갑작스레 노래를 부르고 사람들은 다함께 춤을 춘다. 기쁘고 슬픈 일,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모두 새긴 것만 같은 상처입고 멍든 얼굴의 킴이 홀가분한 표정으로 집을 나서며 영화는 끝난다. 무엇도 해결되지 않았기에 이대로 끝나지도 않을 어느 가족의 초상이 여기 있다.

 

 

 

글 : 손시내

2016년 영평상 신인평론상 수상. 한국독립영화협회 비평분과에서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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