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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용의 시네마 크리티크] 박영주 각본・감독의 <선희와 슬기, Second Life, 70분, 2018>- 사유적 공간, 교실의 현실과 이면
[장석용의 시네마 크리티크] 박영주 각본・감독의 <선희와 슬기, Second Life, 70분, 2018>- 사유적 공간, 교실의 현실과 이면
  • 장석용(영화평론가)
  • 승인 2019.04.01 10: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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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장르 중 드라마에 법정이 중심이 된다면 법정드라마라고 칭한다. 교실이 중심 공간으로 설정되고, 동선이 그렇게 움직인다면 <선희와 슬기>는 학교 드라마라고 해도 무난하다. 이 작품은 여고교실, 보육원, 다시 여고교실로 이동한다. 박영주 감독의 영화적 상상은 가정, 학교, 사회에서 벌어질 수 있는 가능성의 문제를 다 같이 생각해보자고 권하면서 성장기 소녀들을 주인공으로 삼아 그들에게 진지하고 중요한 문제점들을 잔잔하게 담백하게 풀어낸다.

이 시대의 잔잔한 이야기꾼 박영주 감독의 영화는 방황의 인생을 상징하는 버스에 타 있는 선희(정다은)를 보여주면서 시작된다. 즐거운 여행 모습이 아니기 때문에 화면은 블루 컬러로 어둡다. 선희의 사연은 서서히 밝혀진다. 영화는 복선을 깔지 않는다. 회사일로 밤늦게 퇴근하는 아버지, 증권투자 등의 돈벌이로 바쁜 어머니 틈에 선희는 사소한 이야기조차 나눌 수 없다. 부모로부터도 대화 상대가 되지 못했던 선희는 무력감에 빠지고, 모든 상황을 체념하게 된다.

 

영화는 영화적 수사나 상징, 철학적 주제나 미학적 장식을 배제한다. 익숙한 풍경의 교실에 들어서면 열여덟 살 여고 2학년 선희는 외톨이가 되기 일쑤이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선희는 급우들의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는 정미(박수연)의 환심을 사기위해 매점에서 군것질을 사가지고 오기도하고 비싼 콘서트 티켓을 자비로 사서 제공하며 아이들의 소소한 즐거움의 원인을 찾아 대응하며 거짓말을 시작한다. 의지할 곳 없는 선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학교는 늘 교우관계, 교내폭력, 이성문제, 동아리, 성적, 여가, 왕따 등의 문제에 직면한다. 영화는 절도를 영화의 핵심으로 부각시킨다. 선희는 거짓말이 들통 나자 의심을 받게 되고 정미와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한다. 앙심을 품고 담임에게 반지를 분실했다고 하면서 정미를 절도자로 몰아넣자 정미는 정학을 당한다. 선희가 정미의 집에 찾아간 직후, 정미는 아파트에서 투신, 자살한다. 선희의 거짓말은 부모와 사회로 대변되는 친구들의 무관심에 기인한다.

 

생생한 정미의 투신 광경을 목격한 선희는 죄책감에 서울에서 무작정 자신을 숨길 수 있는 시골로 도망친다. 강에 들어가 자살을 시도했지만 물은 차고 여의치 않았다. 지나가던 보육원 차에 발견된 물기 가득한 선희는 희망보육원에서 ‘슬기’라는 이름으로 새 삶을 살게 된다. 원장(전국향)의 따스한 보살핌으로 선희는 행복한 가정에 있는 것처럼 하루하루가 즐겁다. 가정과 사회는 이처럼 정감이 있고, 따스해야한다는 것을 감독은 정답으로 제시한다.

 

선희는 보육원의 도움으로 새 학교에서 슬기라는 이름으로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아침점호를 도맡아하고, 수업에도 열심이며, 급우들 사이의 관계도 원만하다. 감독은 영화를 진행시키면서 선희가 겪었던 사회가 이러했으면 좋겠다는 자신의 주장을 계속 피력한다. 선희는 모범상을 받는다는 통보를 받는다. 들뜬 마음에 보육원으로의 휴가를 신청하고, 원생의 생일 파티를 즐기지만 단체사진 찍기를 한사코 거절한다. 자신이 노출되기를 꺼려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비밀은 없다. 그날 보육원 봉사활동을 나온 유앤아이 자원봉사단 단원 하나가 슬기를 보고 “너 선희 맞지?”하고 말을 건네자 “사람 잘못 본건데..”하고 말을 흐리는 선희는 깊은 고민에 빠진다. 곧 이어 사감이 ‘실종 청소년을 찾습니다.’라는 전단지를 보여주면서 원장에게 실토하라고 충고한다. 원장실을 찾은 선희는 아무 것도 모르는 원장에게 그 동안 보살펴 준 것에 대해 고마움을 표한다. 외로움을 달래던 시린 겨울에 자신을 품어준 고마운 분이다.

 

영화의 압권인 장면이 연출된다. 산길에 들어선 선희의 머리 위로 하염없이 눈이 내린다. 선희의 눈물의 상징이다. 원장이 사준 사랑이 듬뿍 담긴 빨간 외투를 입은 선희의 흐느끼는 뒷모습이 보인다. 선희가 없는 모범상 시상식에 난리가 난 교실이 교차된다. 다시 방랑의 길로 들어서서 버스에 탄 선희에게 이름이 무어냐고 묻는 승객에게 대답으로 사진이 취미라고 하던 룸메이트 이방울(정유연)을 떠올리며 이방울이라고 하는 선희의 모습에서 영화는 종료된다.

2018년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선희와 슬기>로 주목을 받았던 박영주 감독은 엄마를 대신해 우유 배달부가 된 14세 소녀 아영의 하루를 그린 <소녀 배달부, A delivery girl, 18분>(2014), 아이 잃은 엄마들의 심정을 담은 <1 킬로그램, 1 Kilogram, 29분>(2015) 두 편의 단편을 발표하면서 한국영화를 이끌 여성감독으로 부각했다. 그녀는 <선희와 슬기>를 통해 서서히 장편영화에 깊숙이 접근하는 신중한 자세를 보이고 있다.

<선희와 슬기>는 논리적으로 있을 수 없는 영화적 허구를 보여준다. 현실적으로 교육청과 경찰의 주민등록번호와 지문 확인 없이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밋밋해 보이면서도 영화문법에 충실한 영화작법, 안정된 카메라 구도, 풋풋한 연기와 인상적인 원장과 담임의 연기가 인상에 남는다. 선희와 슬기를 다 공개해 놓고 영화를 긴장감 있게 끌고 가는 솜씨가 돋보인다. 한정된 영화제작 환경에서 자신의 영화적 기량을 발휘한 점에 존중을 표한다.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글·장석용

영화・무용평론가, 시인, 중앙대・동국대 대학원에서 영화전공,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회장,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국제영화비평가연맹 한국・한국영상작가협회 회장 역임, 르몽드 영화평론상・PAF 영화평론상・한국문화예술상・올해의 최우수예술가상 등 수상, 신일고, 경희대,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서경대 대학원 등에서 후진을 양성했고, 이태리 황금금배상・다카영화제・네팔 인권영화제・부산국제영화제・대종상・청소년영화제・예술실험영화・시나리오작가협회 심사위원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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