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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한기의 시네마 크리티크] <한강에게> - 슬픔의 일상성에 대한 시적 고백
[조한기의 시네마 크리티크] <한강에게> - 슬픔의 일상성에 대한 시적 고백
  • 조한기(영화평론가)
  • 승인 2019.04.04 09: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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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식은 때론 지나친 비약을 통해 개인의 내면을 파고든다. 케고르의 전언처럼, 인생의 불가해한 비극을 둘러싼 여러 ‘가능성’들에 관한 상념은 개인의 마음을 좀먹기도 한다. 영화 <한강에게>는 예기치 못한 연인의 죽음과 그로 인해 죄책감에 시달리는 시인 진아의 일상을 탐색한다. 여기서 진아가 체험하는 시간은 행복했던 과거와 당면한 현실을 오가며 이중적으로 기입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진아의 평범한 일상은 연인이었던 길우의 부재를 비추는 텅 빈 공간이 된다. 연인이 떠난 자리를 메우는 건 아주 길고 끈덕진 아픔과 죄 없는 죄책감이다.

영화에서 한순간의 엇갈림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로 나타난다. 평범한 아침, 오래된 연인인 진아와 길우는 사소한 일로 언쟁을 벌인다. 냉전은 저녁까지 계속되고 두 사람은 각자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두 사람의 마지막 만남이 되었다. 이미 내뱉은 말은 돌이킬 수 없고, 그날에 연인의 마음은 대답을 구할 수 없는 영원한 물음의 대상이 된다. 그때 함께 길을 나섰다면 무언가 바뀌었을까. 정답 없는 회한은 진아의 죄책감의 원인이 된다. 부조리해 보이기까지 하는 이들의 이별은 멜로드라마의 관습처럼 파국으로 전시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이별 이후 밀려드는 이슥한 사랑의 감정이 반추된다.

<한강에게>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그러한 감각을 추수하기 위한 독특한 영화 미학적인 시도이다. 영화에서는 여러 차례 극적인 순간과 현실의 순간이 교차한다. 예컨대, 진아가 광화문 광장에서 세월호 희생자를 기리는 시를 읊는 씬은 현실과 극적인 순간이 교차하는 장면이다. 두 차례의 시 낭독회 또한 그러한 형식의 연장선상에 있다. 현실을 담은 장면들은 영화의 극적인 사건과 결부되어 일상을 사실적으로 재현한다.

 

여기서 박근영 감독은 비극적인 이별 그 자체 보다 그러한 단절을 받아들이는 인물의 내면 심리를 재현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그렇게 카메라의 시선은 고요하지만 집요하게 진아의 일상을 좇는다. 영화에서 진아의 모습은 단 한순간도 프레임 밖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녀를 중심으로 누군가의 든 자리와 난 자리만이 존재할 뿐이다. 팍팍한 생활 속 곳곳에 남은 연인의 흔적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선명해져만 간다. 정적인 호흡과 고정된 쇼트 안에서 진아의 과거와 현재는 선명하게 대비되며 부재로 인한 비애의 감정을 전달한다. 웃음과 생동감이 넘치던 삶은 이제 고요하고 단조롭기만 하다.

한강은 연인의 사소한 삶이 녹아든 장소이다. 그곳은 즐거운 추억이 깃든 장소이며 동시에 이별이 시작된 장소이기도 하다. 한강은 두 사람의 관계를 증언하는 표지이자 영화 안에 흐르는 일상성을 대변하는 공간이다. 영화가 진아의 일상을 추적하며 과거와 현재의 동선을 좇을수록 한강과 길우의 이미지는 미묘하게 중첩된다. 일상적 공간은 상실의 아픔을 반복적으로 확인하는 경로가 되는 것이다. 진아가 누구에게도 위로의 말을 듣고 싶지 않은 이유는 이처럼 그녀의 상처가 일상에서 끊임없이 재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일상의 경험에서 진실한 감정을 예리하게 포착해 언어로 표현하곤 한다. 영화의 말미에서 진아는 길우에게 보내는 시 ‘한강에게’를 쓴다. “돌아가는 길이 아득해/더 멀리 가고만 싶었던 날들에게/꿈이라고/꿈처럼 말해야 했지만.” 진아는 죄책감과 방황의 끝에서 시를 통해 윤색 없이 연인의 상실을 마주한다. 망각보다 상처를 끌어안는 있는 그대로의 삶을 선택한 것이다. 이는 진아가 시작(時作)을 강독할 때 역설했던 것처럼 자신의 감정을 향한 거듭된 질문과 탐색의 결과이다. 그렇기에 영화 속에서 재구되는 그녀의 여정은 단순히 점착된 과거의 아픔을 응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자기 해명의 고뇌 끝에 연인에 대한 진정한 애도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글: 조한기

건국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박사수료. 2018 영평상 신인평론상과 한국콘텐츠진흥원 주관 2018 만화비평 공모전 대상을 수상하였다. 현재 문화와 스토리텔링 연구에 주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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