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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형의 시네마 크리티크] 인생이란 한 바탕의 꿈이라는 자각 : 장이모우 감독 <인생>
[정재형의 시네마 크리티크] 인생이란 한 바탕의 꿈이라는 자각 : 장이모우 감독 <인생>
  • 정재형(영화평론가)
  • 승인 2019.04.15 09: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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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에 지배된 인간의 고통

젊어서 도박에 빠진 남자는 하인의 등에 업혀 올 정도로 귀하게만 살아온 사람이다. 그는 아내의 내조도, 부모의 은공도 모른 채 배은망덕하게 살아왔다. 그가 속해 있던 부귀영화는 한바탕 꿈이었다. 부귀가 하루 아침에 무너졌을 때 비로소 그것이 꿈이었음을 깨닫는다. 그걸 깨닫는 순간 그는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벅차다고 느낀다. 손수 고생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던 그였다.

그에게 즐거움을 준 것도 환경이었고, 고통을 선사한 것도 환경이었다. 그는 잘 사는 집안에서 태어나 걱정 없이 살다가, 집안이 몰락해서 끼니를 연명할 걱정을 하게 되었다. 천성이 악하거나 게을러서가 아니라, 환경이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이다. 그를 불행하게 만든 것은 환경이 주 원인이다.

뒤늦게 정신 차린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림자 인형극을 해서 돈을 버는 일이다. 그는 그림자 인형극 상자 하나만을 갖고 생계를 연명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림자 놀이란 투사되어진 환영(Illusion), 바로 영화를 말한다. 그 상자에서 꺼내진 도구는 먹고 살길 없는 주인공의 생계유지를 하는 도구가 되며, 죽음의 전쟁터에서 살아남는 도구이며, 혁명을 수행하는 진지에서 병사들에게 꿈과 위안을 주고, 공장 노동자에게 삶의 희망을 주는 도구이다.

 

그림자놀이란 인생의 희노애락과 생계를 책임진 도구, 즉 인생 전반에 대해 비유인 셈이다. 인생은 꿈과 같고, 꿈은 영화 같다. 이 영화 속에는 남자 주인공의 인생에서 중요한 기능을 하는 상자가 하나 나온다. 중국의 전통연희인 그림자 놀이 도구를 넣은 상자이다.

마지막에 그 도구는 불살라지는데 그 안에는 어린 외손자의 놀이감인 병아리가 들어가 노는 장소가 된다. 병아리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유토피아 관념이다. “병아리는 닭이 되고, 닭은 거위가 되고, 거위는 양이 되고, 양은 소가 되고, 소는 커서 공산주의가 된다.” 당시 중국 공산주의가 대중들을 계몽시킨 장밋빛 유토피아 선전 이야기다. 물론 이 말은 60년대의 문화혁명의 격동기가 지난 후 다시 반복되지만, 현실적으로 소는 커서 더이상 공산주의가 되지 않는다. 공산주의 체제는 실패한다.

소는 커서 그저 먹고사는 일이 되며, 잘 사는 일이 된다. 체제의 선전은 껍데기가 되고 그저 성실하게 살고자 하는 인민의 서민적인 삶만이 소금처럼 남아 중국을 지켜낸다. 영화를 담은 상자는 중국 근대사의 희망과 좌절을, 또 다른 세대의 희망을 담아내는 상자로 의미화된다. 그러한 은유는 이 영화 및 장예모 감독의 깊이요, 오래도록 여운을 주는 장치에 속한다.

인형극의 세계는 의미심장하다. 인형들의 그림자가 만들어내는 어둠속의 이야기는 영화를 암시한다. 영화는 실제가 아니라, 현실과 똑 같이 생긴 가짜들의 세계다. 인형들이 빚어내는 세계가 진실이 아니듯이 그렇다. 인형들이 암시하는 가짜의 이야기는 노자나 석가가 말한 세상은 꿈이고 거품이고 번개불의 번개처럼 번쩍하는 일순간 일 수 있다. 그만큼 반영된 현실은 현실이 아닌 허상이고 그림자다. 허상을 통해 실상에 다가가고자 하는 노력. 그 교훈성이 꼭두각시 인형극에 남아있다.

 

 

자신이 꾸미지 않은 운명이라는 굴레

영화속의 주인공 부부가 겪은 고통은 환경만이 아니라, 역사의 수레바퀴, 즉 운명의 굴레였다. 개인이 열심히 살아도 여전히 그를 힘들게 하는 것은 운명이란 존재다. 그는 개인의 노력과는 상관없이 국가의 운명, 사회의 운명에 의해 자신의 삶이 비극적으로 점철되는 것을 보면서 조심스럽게 인생의 발길을 딛어야 했다.

이 영화는 3대에 걸친 가족사를 다루면서 동시에 1940년대 일제시대의 중국 혁명, 모택동의 문화혁명, 그리고 개방화 이후 현대 중국이 나아가는 삶에 대한 역사적 성찰을 담고 있다. 개인적으로 부부의 삶은 비극으로 점철된다.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두는데 종국엔 둘을 다 잃게 된다. 아들은 당관료의 차에 치여 죽게 되고, 딸은 출산하다가 출혈이 심해 죽게 된다. 문화혁명 당시 의사들은 부르조아로 숙청당하고 대신 의학지식이 부족한 홍위병들이 대신 맡아 하다가 비극을 초래한 것이다. 처음처럼 부부만 남는다. 부부에게 인생은 공수래 공수거다.

영화속에 그려진 병원의 장면은 아이러니하다. 지식과 경험이 부족한 젊은 홍위병 의사가 딸의 출산을 원활히 돕지 못하자, 지식인 반동분자로 몰린 베테랑 의사를 기다리는 장면이다. 반동분자를 절대 빼올수 없는 상황이지만 몰래 데려온 주인공은 그가 굶었다는 것을 알고 빵을 사다 준다. 꾸역꾸역 빵을 먹은 결과 반동분자 의사는 배가 터져 죽을 지경에 이른다. 가난한 사람이 갑자기 들어간 음식에 배가 터져 죽는 웃지 못할 상황이다.

이 장면은 아이러니한 상황을 묘사한다. 꽉 막힌 사회주의 체제에선 하나가 막히면 엉뚱한 다른 게 막힌다. 사회 체제 자체가 경직되고, 부패했기 때문이다. 과연 이러한 숨막히는 체제에서 개인이 자유롭게 살아간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인가를 영화는 질문한다. 과거 중국에서의 삶은 질식할 것 같은 답답한 상황이다. 자신이 꾸미지 않은 운명이라는 굴레가 너무나 엄격하여 개인의 쉴 여유공간이 없어져 버린 무인도와 같은 사회다.

이러한 비극은 단순한 개인적 비극이라기 보다 역사의 흐름을 감당해내지 못하는 당시 중국인들의 대중심리를 반영한다. 역사의 흐름은 일개인적인 삶을 결코 자유롭게 허용하지 못한다. 역사와 사회를 벗어나려는 개인의 의식은 자유의지라기 보다 방관에 가까운 이기주의다. 장이모우는 서구인이 생각하는 낭만적 개인주의를 찬양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역사와 제도가 인간을 억압하고 부자연스럽게 하는 측면을 고발하는 것이다. 제도화된 권력 속에서 많은 비인간적인 부작용이 초래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또한 사회주의 체제와는 상관없이 대다수 중국인민들의 의지가 얼마나 진실한가를 또한 말하고 있다. 이 영화는 첸 카이거의 <패왕별희>와 더불어 중국인의 시각에서 읽혀져야 하는 완성도 높은 중국 근대사 보고서라 할 수 있다. 동시에 개인 고통이 그의 잘잘못에서가 아니라, 국가나 이데올로기의 권력때문에 생뚱맞게 발생할 수도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역사의 질곡속에서도 개인이 웃음을 잃지 않고 살아야 하는 지혜를 보여주는 영화가 바로 <인생>이다.

 

 

글·정재형
동국대 연극영화과교수이며 한국영화평론가협회회장을 역임했다. 『영화이해의 길잡이』, 『영화영상스토리텔링100』 등의 역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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