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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시네마 크리티크] 길을 나서 자신 내면의 목소리에서 신을 찾다 ‘신과 함께 가라(Vaya Con Dios)’
[안치용의 시네마 크리티크] 길을 나서 자신 내면의 목소리에서 신을 찾다 ‘신과 함께 가라(Vaya Con Dios)’
  • 안치용(영화평론가)
  • 승인 2019.05.14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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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신과 함께 가라(Vaya Con Dios)’는 얘깃거리가 많은 영화다. 일단 영화에 붙일 수식어가 많다. 비슷한 제목의 한국영화 ‘신과 함께’와 달리 이 영화는 명백한 종교영화이다. 말 그대로 길에서 길을 묻는 구도의 형식을 취하기에 로드 무비로도 분류된다. 또한 그레고리오 성가 등 장엄하고 감동적인 음악이 전편에 흐르는 음악영화이다.

2002년에 발표돼 국내에는 이듬해 개봉된 ‘신과 함께 가라’는 독일 영화인데, 원제 ‘Vaya Con Dios’는 스페인어로 ‘Go with God’ 정도의 의미를 지닌 작별인사이다. 그러나 ‘Adios’정도의 단순 작별인사는 아니며, 분명한 종교적 전언을 포함한 제목으로 보아야 한다.

 

수도원 밖으로

일각에서는 이 영화를 코미디로 분류한다. 맞는 분류는 아니지만 틀린 분류도 아닌 게, 영화를 끌어가는 내내 위트와 유머가 적당하게 버무려져 재미있다. 그러나 포복절도할 일이 없는데다 묵직한 주제를 진지하게 전개하고 있어 코미디만으로 설명하기엔 한계가 있다.

독일 브란덴부르크의 한 수도원에서 이야기가 시작한다. 영화 속에서 이 수도원은 가톨릭으로부터 파문당한 칸토리안 교단으로 설정된다. 가톨릭 입장에서는 ‘이단’인 셈인데, 1693년 교황에게 파문당한 이후 교세가 영락하여 현재 독일 브란덴부르크와 이탈리아 몬테체르볼리 두 곳에만 수도원이 존재한다.

세상과 담을 쌓고 사는 수도원에서 아침 미사를 드리면서 다해 4명에 불과한 수도사가 찬양한다. 찬양 도중에 들이닥친 빚쟁이가 3주 안에 빚을 갚으라고 통보하고 떠나자 늙은 수도원장은 충격을 받아 쓰러지고 남은 세 명의 수도사에게 이탈리아의 칸토리안 수도원으로 가라고 유언하며 숨을 거둔다. 이렇게 세 명의 수도사 벤노(마이클 귀스덱 분), 타실로(매티아스 브레너 분), 아르보(다니엘 브륄 분)의 이탈리아 여행이 시작된다.

이 영화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세 수도사의 개성을 반영한 함께이자 따로 인 구도의 길이라고 할 수 있다. 고지식하고 지적 욕구가 강한 벤노, 우직하고 직관적인 믿음을 보이는 타실로, 아기 때 수도원에 들어와 세상을 모르는 미소년 아르보. 이 영화에서는 줄거리를 채우는 세 인물이 너무 전형적이어서 자칫 상투성에 빠질 위험이 즉각적으로 감지된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드러난 것과 같은 주제의식을 붙들고 가려면 전형성은 불가피하다고 할 수 있어, 결국 다른 방식의 전형성을 추구하기보다는 누구나 상상할 수 있고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전형을 그려내면서 상투성의 위험을 회피하는 연출 말고는 다른 길은 없는 셈이다. 개인적으로 졸탄 스피란델리 감독이 그런 연출에 성공했다고 판단한다.

세 수도사를 살펴보자. 먼저 지적인 신앙으로 무장한 벤노. 지적 호기심과 인정욕구가 강한 벤노는 성속(聖俗)을 불문하고 확고하게 목격되는 하나의 인간형이다. 브란덴부르크 수도원에 있을 땐 느끼지 못한 결핍을 우연찮게 길에서 만난 옛 친구 클라우디우스가 교장으로 있는 예수회 신학교에서 느끼게 되고, 마음껏 연구하고 지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다는 유혹에 벤노는 쉽사리 넘어가고 만다. 길을 나섰다가 목적지에 도달하기 전에 주저앉고 만 것이다.

벤노에 앞서 유혹에 굴복한 이는 타실로이다. 14살에 수도원 들어온 그는 우연찮은 계기로 나선 길에서 떠나온 어머니를 떠올린다. 30년만의 귀향에서 대면한 혈육의 정 앞에 타실로는 흔들리고 노모와 함께 울타리를 고치고 돼지를 키우는 평범한 삶과 비교해 다른 일은 덧없게 느껴진다. 남들처럼 사는 평범한 삶이 타실로에게 ‘신과 함께 가는’ 길이란 생각이 들었을 법하다. 그리하여 그는 남고 남은 두 수도사는 떠난다.

독일에서 길을 나서 이탈리아에서 길을 접을 때까지 비록 유혹에 흔들리긴 했지만 길을 벗어나지 않고 다른 두 수도사에게 버팀목 구실을 한 인물은 아르보이다. 어리고 무지한 꽃미남 아르보에게 부여된 조건상 그에게 유일한 유혹은 이성의 사랑일 수밖에 없을 테고, 아니나 다를까 영화에서도 키아라(키에라 스콜라스 분)라는 여성이 등장한다. 극중에서 수도사인 아르보와 무신론자를 자처하는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지지만, 사랑은 단번에 성취되지 않고 지연된다.

같이 떠난 세 수도사는 중간에 잠깐씩 헤어지지만 결국 함께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엑서더스

길 위의 세 수도사에게 주어진 유혹은 뚜렷한 상징이다. 영화 제목에 있는 ‘신과 함께 가라’는 말은, 사실상 클라이맥스라고 할 그레고리오 성가 ‘주의 손길 받아들이는 자’를 세 사람이 부르는 장면에서 반복된다. 개신교 찬송가(312장)에도 포함된 된 성가는 “노래하고 기도하며 신과 함께 가라. 그리고 선을 행하라.”고 말한다.

영화제목과 배치된 음악, 그리고 줄거리 등을 통해 성서적인 구성을 엿볼 수 있었다. 브란덴부르크를 떠나 독일을 헤매다가 몬테체르볼리에 도달한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출애굽을 연상하였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우상을 숭배한 모습과 브란덴부르크를 떠난 수도사들이 유혹에 빠져든 모습이 전형적이라고 할 만큼 닮지 않았나. 광야의 우상숭배 이야기는 기독교에서 핵심적인 신앙의 위기를 의미한다. 인간은 해방되기 위하여 광야로 나가야 하고 가나안 복지로 비유되는 은총의 복원을 위해선 우상을 넘어서야 한다는 논리이다. 우상을 넘어서기가 성서에서나 현실에서나, 또한 (비기독교적인) 보편적 의미에서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하여 마르틴 루터는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받은 십계명 중 첫 계명(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에 대해 “그로부터 네 삶을 기대하는 것, 네가 신뢰하는 것이 바로 네 하나님이자 우상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나. 수도사들에게 주어진 유혹은 곧 그들의 우상이다.

이러한 해방의 방정식이 꼭 기독교에만 적용된다고 할 수는 없다. 모든 해방의 기획은 탈출과 복원으로 구성될 수밖에 없는데 거의 대부분의 탈출은 탈출이 이루어지자마자 탈출의 목표가 ‘복원’이었음을 망각하기 마련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이 영화 속 수도사들의 이탈리아 행, 우리네 인생사 등 역사와 세상살이는 이러한 방정식이 크고 작게 적용되며 구불구불 이어져간다.

엑서더스를 염두에 둔 재기발랄한 상상은 초반부의 기차 장면으로, 양쪽으로 기차가 지나가는 가운데 수도사들이 기도하는 모습에서 난 성서 출애굽기의 홍해 이야기를 떠올렸다. 갈라져 양쪽으로 벽을 만든 홍해바다 장면이 기차장면으로 위트를 가미하여 표현되었다면 상상이 과하다고 할까. 성서 자체보다는 성서의 엑서더스를 영화화한 장면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기차장면에서 끌고 온 염소가 죽고 염소 시체로 무덤을 만들어 기도하는 모습에서는 희생제의를 떠올렸다. 할 것은 다 하며 길을 떠난 셈이다.

 

수미상관의 음악

이 영화에 등장한 칸토리안 교단은 일부 역사적 배경을 갖는 것으로 전해지지만 영화에서 적시된 두 수도원 등은 가상의 이야기이다. 다만 ‘칸토리안’이란 명칭에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앞서 인용한 성가에서 “노래하고 기도하며 신과 함께 가라”란 구절이 있었는데, ‘칸토리안’의 성격이 바로 노래와 기도의 결합이다. ‘Cantus(노래·선율)’, ‘Cantor(성가대의 선창자)’라는 용어와 ‘칸토리안’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신과 함께 가라’에서 수도사들이 부르는 성가는 영화에 녹아들어가 있어서 완성도를 높이는 동시에 음악 자체로도 감동을 준다. ‘주의 손길 받아들이는 자’가 울려 퍼지는 대목이 가장 감동적이긴 하지만 줄거리를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한 건 ‘Tu solus(주님만이 홀로)’이다.

영화 첫 장면 독일에서 수도사들은 이 노래를 부른다. 중간에 누군가 수도원 문을 두드려 찬송을 방해하고, 아르보가 방문객을 맞으러 간다. 대문에 달린 작은 창을 들어 올리자 풍만한 여자의 가슴이 보이고, 아르보는 돌아가서 아직 죽기 전인 수도원장에게 여자가 왔다고 말한다.

영화 끝 무렵 이탈리아에서 수도사들이 이 노래를 부른다. 마찬가지로 찬송 도중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이번엔 아르보 대신 다른 수도사가 방문객을 확인하러 가고, 돌아와 아르보에게 소리굽쇠를 내민다. 같은 노래를 부르지만 끼어든 것이 여성의 풍만한 가슴에서 소리굽쇠로 바뀌었다.

소리굽쇠는 숨진 수도원장의 유품으로 그가 임종하는 아르보에게 물려준 것이다. 아르보가 길에 있을 때 사랑한 여인 키아라에게 우연히 넘어가 있다가, 이제 지연된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 키아라에게서 이탈리아 몬테체르볼리 수도원의 아르보에게로 전해졌다. 아르보를 사랑하지만 아르보가 있을 곳이 자신의 옆이 아니라 수도원이란 생각에 그를 떠난 키아라. 그는 예기치 않게 발견한 소리굽쇠를 통해 마음의 소리를 듣고 아르보를 찾은 것이다. 아르보는 소리굽쇠를 수도원에 남기고 키아라를 만나기 위해 수도원을 떠나면서 영화는 끝난다.

로드 무비의 종착점에서, 주연인 세 명의 수도사 중에서 재차 주연을 한 명을 고르라면 해당될 아르보가 다시 떠난다. 그렇다면 독일에서 이탈리아로 이어진 그의 여행은 실패한 것인가. ‘탈출과 복원’이 해방되고자 하는 인간의 숙명이라고 할 때, 아르보에게 주어지지 않은 복원을 향해 다시 길을 떠남을 실패라고 부를 수는 없지 싶다.

극중에서 누군가 “성령은 소리”라고 말한다. 소리굽쇠를 보고 키아라가 아르보를 떠올린 건 마음의 목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극중에서 반복되듯이 마음의 목소리를 들으며 진정으로 자신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찾아내어 결행하는 것이 신과 함께 가는 길이라고 영화는 말한다. 마음의 목소리를 듣는 사람에게 수도원이 꼭 수도원에 국한되지 않고 세상의 모든 길이 수도원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같은 맥락에서 이 영화를 꼭 종교영화라고 부를 필요는 없겠다.

 

 

 

글·안치용

지속가능저널 발행인 겸 한국CSR연구소장으로 영화평론가로도 활동한다. 지속가능성과 CSR을 주제로 사회활동을 병행하며 같은 주제로 청소년·대학생들과 소통·협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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