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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혜의 시네마 크리티크] 소셜리스트의 시야에 들어온 일본이라는 한 가족 - <어느 가족>
[정지혜의 시네마 크리티크] 소셜리스트의 시야에 들어온 일본이라는 한 가족 - <어느 가족>
  • 정지혜(영화평론가)
  • 승인 2019.05.28 11: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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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감독의 신작 <기생충>이 칸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2년 연속 아시아 영화의 수상이다. 작년에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어느 가족>이 수상했다.

봉준호 감독과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닮은 점이 많다.

봉준호 감독은 사회학을 전공했고 그의 작품에도 이러한 그의 배경이 일관성 있게 전개되고 있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에서 사회성 짙은 주제는 그 만의 미적 태도를 통과해 나온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역시 마찬가지다. 그의 영화에는 소셜리스트적인 주제가 반복되어 진화하며 다뤄지고 있다.

<어느 가족>은 인위적으로 구성된 한 가족의 이야기다. 여기에서 인위적이라는 말이 부정적인 뉘앙스인지 아닌지는 전적으로 관객에게 달려 있다. 오사무와 노부요는 하층 노동자로 이 가족의 근간이다. 이 둘은 부부로 큰 연고 없이 하츠에 할머니의 집에서 그녀를 돌본다는 명목으로 함께 살아가고 있다. 영화의 초반에 이 인물들은 전통적인 3대의 가족으로 보인다. 아버지인 오사무와 아들 쇼타, 할머니 하츠에 어머니 노부요, 여기에 노부요의 여동생 아키가 할머니의 오래된 일본식 주택에서 식구로 살고 있다. 여기에 5살 꼬마 유리가 끼어든다. 오사무와 쇼타는 좀 도둑질 쇼핑을 마치고 군것질거리를 사 먹으며 집으로 돌아가던 중 베란다에 방치되어 떨고 있던 유리를 만난다. 이들은 이 다섯 살짜리 여자아이를 집으로 데리고 가 새로운 식구로 맞는다. 사실 이 가족은 어느 하나 혈연으로 연결되어있지 않았다. 이들은 납치와 유인 혹은 애정과 선택으로 구성된 가족이다. 허술한 인연으로 모였지만 각자 식구의 생존을 위해서 최선의 생활력을 더한다. 노부요가 일하는 세탁공장에서 경제적인 이유로 ‘워크셰어’가 시작된다. 직원 수를 줄이는 대신 몇 명의 직원들이 좀 더 적은 돈을 받고 오후 출근을 하기로 한 것이다. 몇 가지 이유로 워크셰어는 하츠에의 집에서도 시작된다. 이 가족은 가까스로의 경제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유리와 함께하자니 워크셰어가 필요했던 것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사회를 꼼꼼히 들여다보고, 그 들여다본 사회를 영화적으로, 미학적으로 구조화한다. 영화는 가슴이 따뜻해지는 가족영화에 머물러 있지 않다. 감독은 일본 사회와 일본인의 의식을 영화 안에서 재구성한다.

이들이 살고 있는 하츠에의 집은 부동산 업자가 재개발의 군침을 흘리고 있는 옛날식 일본 집이다. 중개사는 하츠에에게 집을 넘기고 아파트로 가 편안한 말년을 보내시라 재차 권유한다. 하지만 하츠에에게 집은 단순한 거주 공간이 아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에서 공간은 단순한 무대가 아니다. 이 하츠에의 집은 이 서사와 갈등을 함축하고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하츠에의 오래된 일본식 집의 마당은 돌보지 않은 잡초들로 무성하다. 우리가 흔히 보는 정갈한 일본식 정원과는 판이하고 정돈되지 않은 천변이나, 숲처럼 유기되어있다. 집안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넓지도 않지만, 실내는 짐들로 빼곡하다. 집의 구조와 오래된 살림살이들이 원래부터 그랬던 것처럼 너저분하다. 이 집을 하나의 메타포라고 생각한다면 이 오랜 세간과 짐들은 이 가족과 닮아있다. 집안을 채우고 있는 것들은 필요에 의해 혹은 인연에 의해서 훔치거나, 얻거나, 구해서 들여온 것들일 것이다. 언젠가 필요가 있었으나 이제는 쓸모를 알 수 없고 혹 쓰레기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이 짐들은 가족들이 포기하기 전까지 이 집의 일상을 유지하는 데에 기여할 것이다. 이 가족 구성도 그렇다. 이를테면 이들은 잉여 인간이다. 일용직 노동자, 세탁 공장의 숙련공, 유기된 꼬마, 학교를 그만둔 젊은이. 사회가 이들을 어떻게 소구하든지 간에 이 ‘어느 가족’은 이 짐들을 최대한 쌓아두면서 함께 살고 있다. 할머니는 이 짐들을 포함한 집을 싹 팔아넘기고 편안한 생활을 하려 하지 않는다. 여기 식구들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가족>의 시바타 가족은 훔쳐 만든 가족이다. 이들은 음식이나 생필품, 심지어 구성원까지 모두 훔치고 있다. 영화는 훔친다는 것이 어떤 것일지 고민하게 만든다. 영화에서 나오는 대사처럼 훔친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 일본 사회의 잉여 군상들의 생존은, 이들의 실존 자체로 사회의 생산력에 손실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오사무가 노동을 하다 다치는 바람에 벌이보다 축내는 쪽으로 기울면 알 수 없는 긴장감이 생긴다. 뒤에 이 긴장은 비 오는 날의 열애로 해소된다. 이 가족이 연대는 생존과 연결된 절박한 것이지만, 이 생존이 경제적 배경만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이런 배경에서 가족들은 자신의 몫을 조금씩 나누어 유리를 먹인다. 물론 유리를 먹이고 입히기 위한 가족 단위의 좀도둑도 이어진다.

이 좀도둑의 행위를 조금 더 적극적으로 방조하는 문방구의 할아버지를 떠올려 보면, 할아버지에게 이 꼬마들의 좀도둑질은 그럴 만도 한 일들이고 방조하는 것은 일종의 공적 부조다. 아이들은 원래 달콤한 것을 보면 먹고 싶고, 알록달록한 것을 보면 갖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가족들은 유리를 납치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들은 유리를 어쨌건 구한 것이라 생각한다. 여기에는 자기연민도 있지만, 이 가족은 유리의 미소를 위해 똘똘 뭉쳐있다.

다큐멘터리언이었던 고레에다 감독은 현실에서 일어난 특수한 사건에 영감을 받아 이야기를 만드는 경우가 많다. 이 영화의 이야기도 일본에서 있었던 사건을 모티브로 삼고 있다. 감독은 네오리얼리즘 영화의 감독처럼 실재하는 사건을 영화 속으로 가지고 들어오며 이 영화를 로셀리니의 방식처럼 모더니즘 영화로 구성한다. 감독의 현실 참여적 시선과 끊임없이 사회의 현상 이면에 있는 진실을 탐구하는 미적 태도는 관객을 사유하게 만든다. 일본의 근현대사나 사회구조, 일본인들의 의식구조 등을 관통하는 이 사유는 종종 어딘가로 튀어 확장되기도 한다.

고레에다 감독은 현재의 사건을 가지고 와 일본 사회의 바닥에 있는 의식의 배경을 찾아낸다. 일본인 가족의 모습을 가지고 와서 일본의 국가주의를 해체하는 식이다. 인간에 대한 연민은 간직한 체로, 일본이라는 국가를 지탱하는 의식을 냉정하게 해부해낸다. 이 자기 해체의 시각은 자연히 우리의 이야기로 연결되고 역시 이 영화가 도달하는 다른 세계로 확장될 것이다.

노령의 할머니 하츠에와 그녀의 오래된 일본식 주택은 일본이라는 사회의 기반이다. 그녀가 죽은 이후 이 집과 그녀의 연금, 그녀의 시체가 어디로 갈 것인지 우리는 궁금하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막 사망 선고가 내려진 한 구의 시체, 그의 연금, 그의 오래된 옛날식 집이 있다. 우리가 이것들을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지 역시 기대된다.

 

 

<어느 가족> 2018.7.26 개봉

사진출처: 네이버 - 영화 - 어느 가족

글ㆍ정지혜

영화평론가. SIDFF 프로그래머. 아티스트그룹 ‘맨션나인’이사로 아티스트와 함께 비즈니스 모델을 개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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