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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안 해도 되는 한국의 진보
공부 안 해도 되는 한국의 진보
  • 홍세화 편집인
  • 승인 2011.01.07 17:20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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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의 '르 디플로' 읽기]

홍성준 국제투기자본감시센터 사무국장의 글(27면)을 읽고 무척 반가웠다. 평소 내가 하고 싶던 말이 담겨 있었다. 그의 글 중에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라도 보며”라는 내용이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가 제기한 문제는 국제연대에 한정된 게 아니다.

한국의 진보세력은 대체로 공부를 하지 않는다. 더 정확히 말하면, 공부를 하지 않아도 진보세력의 일원으로 행세할 수 있다. ‘공부하지 않는 진보’는 ‘진보하지 않는 진보’처럼 형용모순에 가깝다. 더욱이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세계화된 시대에서 ‘공부하지 않는 진보’가 가능한지 의문인데, 한국에선 그게 가능하다. 왜 그럴까? 어떤 논리도 ‘정파의 울타리’를 넘지 못하는 구조 때문이다. 오늘날 프랑스 지식인 중 대학 울타리에 갇혀 사회비판과 멀어지는 경향이 있다면(1, 6∼7면), 한국에선 정파의 울타리라는 강고한 벽이 있다. 표현의 자유가 ‘미국의 국익’이라는 울타리를 넘을 수 없다면(5면), 한국 진보세력에게 정파의 울타리를 넘는 것은 주로 인신공격이다.

극우세력은 어디서나 사회적 위기 상황을 조성하고 활용한다. 또한 자기가 속한 민족·종교·국가의 우월성을 강조하면서(1, 8∼9면), 자기우월성을 확인하고 자기만족에 빠져 자기성숙을 모색하지 않는다. 그래도 유럽 국가들에선 중·고등학교 과정에서 자본주의를 개괄적으로라도 배울 기회가 있다. 그건 당연하다.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처럼 우리도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 그렇다면 중·고등학교 시절에 다른 과목은 몰라도 ‘사회’ 과목에서 가장 중요하게 가르치고 배워야 할 게 자본주의다. ‘역사’ 과목도 자본주의와 노동운동의 역사가 가장 중요하게 담겨야 한다. 왜? 우리 모두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런데 우리는 사회 과목에서든 역사 과목에서든 자본주의와 노동운동의 역사에 관해 가르치지도 배우지도 않는다. 사회를 보는 안목이 갖춰질 리 없다. 가령 ‘(18)16-14-12-10-8’이라는 숫자 나열에서 짝수 순열만 읽을 줄 아는 구성원과, 자본주의 사회 아래 노동자에게 요구된 노동시간을 읽어내는 구성원의 사회는 다른 층위에 있을 수밖에 없다. 사회에 대한 구성원의 무지는 죄악은 아니지만, 지금 우리가 이명박 정권 아래 처절하게 경험하듯이 극우세력과 뻔뻔한 자들이 설치도록 만든다.

그렇게 우리 대부분은 ‘세상 읽는 눈’을 갖지 못한 채 일터나 대학에 나가는데, 소수의 사람들이 선배를 ‘잘못’ 만나 토론의 기회가 생기거나 책을 ‘잘못’ 소개받으면 그때까지 형성한 의식세계에 의문을 던지면서 세상을 보는 눈을 얼핏 뜬다. 그들 중 일부가 노동운동가·사회활동가가 되고 진보정치 세력을 형성한다. 문제는 거기서 멈춘다는 데 있다. 선배의 영향력, 선배와 맺은 인간관계가 강하게 작용하고, 싸우면서 배운다고 우익세력에게서 “논리로 안 되면 인신을 공격하라”는 키케로의 반어법을 배웠다.

논리가 정파의 울타리를 넘지 못하므로 정파가 요구하는 공부만 하면 되고 그것으로 끝이다. 그런데도 정파가 제공하는 알량한 권력을 즐기면서 진보세력의 일원으로 남을 수 있다. 물론 진보정당, 노동조합,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이 항상 급박한 현장 상황에 있기 때문에 사회비판서나 진보적 잡지를 읽을 시간을 내기 어렵다는 점을 이해한다. 하지만 정파 구조를 깨지 않는 한, 앞으로 설령 시간이 나더라도 공부하는 활동가의 모습을 보기 어려우리라는 점도 분명한 사실 아닐까.

글•홍세화 편집인  editor@ilemond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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