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09월호 구매하기
[남유랑의 시네마 크리티크] “모순과 방향상실의 바다에서 길어 올린, 영화적 이정표” ― <행복한 라짜로>
[남유랑의 시네마 크리티크] “모순과 방향상실의 바다에서 길어 올린, 영화적 이정표” ― <행복한 라짜로>
  • 남유랑(영화평론가)
  • 승인 2019.06.28 11:5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스포일러가 다소 포함돼 있음을 밝힙니다.

 

“헤어날 수 없는 소용돌이, 또는 교착상태”

서로 충돌하는 가치들을 동시에 다뤄낸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등을 지고서 대척점에 돌아앉은 것들을 어떻게든 돌이켜 마주보게 만든다는 건, 정말이지 까다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단 뜻이다. 뿐만 아니다. 자칫하면 그 과정 속에서 스리슬쩍 어느 한 쪽을 편들도록 경도돼버린다거나, 한 발 더 나아가선 아예 섣부른 봉합을 꾀하는 우를 범하게 될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가 없다. 설령 그렇진 않다 하더라도, 대개의 경우 시소의 한 가운데 걸터앉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에 내몰리게 되는 게 일반적이다. 허나, 눈앞에서 부대끼며 경합하는 대상들이 그저 무형의 가치들인 경우라면, 그나마 사정은 나은 법이다. 우리네 실존의 무대 내지는 현사실적 세계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존재자들 간의 모순과 길항 국면이란 건, 실로 차원을 달리할 만큼이나 복잡하고 고차적이니 말이다.

단지 듣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아득해지곤 하는, 반인륜적 수용소의 생존자(1919~1987)가 남긴 기록(『이것이 인간인가』) 속의 ‘어떤 기현상’은 엄밀하게 따지고 보자면 특이성을 갖는다고 말하기엔 다소 민망하리만치 ―물론 그 정도는 판이하게 다르겠지만― 흔한 것이다. 외려 도처에서 쉬이 찾아볼 수가 있으니, 전 인류적이고 보편적인 것이라는 술어를 슬쩍 접붙이는 편이 퍽 옳을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담 그 현상이란 건 대체 무엇을 말함인가? 아마도 이렇게 간추려볼 수가 있을 테다. 중심부 또는 지배소적 위치를 점한 존재들이 주변부/종속소적 위치를 자리한 자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일은, 비록 동의할 수는 없을지언정 ―딴은― 그럭저럭 수긍이 가는 일이기도 하다. 허나, 어째서 상대적으로 변두리에 위치한 존재자들이, 저들보다 끄트머리로 밀려난 자들에게 그와도 같은 일을 고스란히 되풀이 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이는 꽤나 곤혹스러움을 촉발시키는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세계를 지배와 피지배의 구도로 환원하여 헤아리려는 입장과, 모든 존재는 ―어느 누구 하나도 기대할만하지 않다는 점에서― 다를 게 없다는 입장의 만남. 다시 말해 격렬히 맞부딪는 상이한 견해들의 병존을 선언할 수밖에 없도록, 우리를 사고의 벼랑에까지 몰아세우기 때문이다. 환언하자면 이들 두 명제는 반발작용을 일으키는 물과 기름 같아서, 배중률을 위반하지 않고서는 양자를 동시에 만족시킬 수 없다. 적어도 논리적으로라면 말이다. 논증의 영역을 가로질러 직각(直覺)의 묘에 가닿는 것이 더욱이나 버거운 일이라는 점엔 한 점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어느 한쪽 눈을 기어코 감아버리는 편의주의의 자세를 취하게 된다면, 결코 세계의 진상을 온전히 그려내고 있노라 말할 수 없을 게다. 만만치 않은 교착상태인 셈이다.

사변의 사고실험이 차마 제 손아귀에 움켜쥘 수 없는 난해한 문제에 맞닥뜨린 경우, 우리는 다른 우회로를 모색해야 할 필요에 허덕이게 된다. 현학적인 용어들 대신 눅진한 체험의 현상학을 통해 문제적 상황 속으로 바투 직핍해 들어가는 영화라면, 혹 그럴싸한 대안이 되어줄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행복한 라짜로』의 경우처럼 말이다. 허면 그것이 어떤 돌파구를 마련해줄 수 있다는 말일까? 까닥하면 거칠고 추상적인 말들에 매몰돼 방향상실에 이를 수도 있으니, 이제는 영화의 살점을 이루는 낱낱의 쇼트들로 돌아가 논의를 시작해봄이 합당할 성싶다-.

 

“설마하니, 반복과 재연에서 그칠까?”

주민들의 시선은 오롯이 외화면의 한 점을 향해 가닿는다. 프레임 경계 너머로까지 밀려나 시야에서 가리어진 만큼 의구심에 물든 갈증을 적잖이 불러일으키는 바로 그 지점에, 대관절 무엇이 자리하고 있을는지 예견해보는 건 사실 그리 어려운 작업이 아니다. 낱낱의 눈동자에 깃든 감정의 격한 꿈틀거림을 어렴풋이나마 들여다볼 수만 있다면 말이다. 잠시간 논의를 멈추고 서서, 조금 더 생각을 확장해볼 여지도 있다. 무슨 말을 동원해보는 것이 좋을까. 모두가 하나같이 일점소실의 투시도법에 심취해 있다고 표현한다거나, 돋보기로 잔뜩 모아들인 뜨거운 안광이 피 오르고 있다는 유비 정도라면 이해를 돕는 데 충분할 터이다. 이처럼 예외 없는 질서정연함이 빚어내는 서늘함의 감각은, 주민들의 시선이 머금은 이글거리는 분노의 정서를 되레 배가시키는 데 복무한다. 격한 온도차에 의해서 지각이 한층 더 예민해지는 변증법적 상황을 떠올려본다면 좋을 터이다. 물론 여기에서 정서란, 저들 인비올라타 농민들의 고혈을 빠는 지배세력에 대한 사무치는 미움으로 적절히 번역될 수가 있다.

 

<과연 눈길이 가닿는 자리엔>

 

<배경이 된 전경, 전시돼버린 신체>

 타작마당 또한 불합리한 위계구조를 밝히 현상해내는 지정학적 공간이 된다. 탈곡기로 곡식을 떠는 건, 원래대로라면 주민의-주민을 위한-주민에 의한 사건이다. 아니, 본시 그래야만 옳은 것이다. 허나 뙤약볕에 스미어 나온 땀으로 시나브로 젖어가는 농민들의 역동적 신체는, 사뿐히 들쳐 올린 양산 아래 앉은 이들의 정적인 몸에 주도권을 빼앗기고야 만다. 스크린의 급소를 움킨 이들에 의해, 전면(前面)에 놓여-거의 전면(全面)을 장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경으로서의 권위를 망실해버린 채 끝끝내 후경화된다고 말해본다면 그런대로 옳은 해석일 테다. 아울러 그들에게 철저하게 투시당하는 ―정확하겐 그들의 눈앞에 ‘완전히 헐벗은 상태로 전시된다는’ 표현이 옳을 터이다― 위치에 놓임으로써, 주체로서의 자율성을 거세당한 채 대상적 존재로 사물화 돼버리는 수치를 겪음은 물론이다. 일련의 시각적 형상화 기법들이 존재자들 사이에 개재된 위상 차이를 이처럼 선연하게 재현해낸다. 별안간 스며오는 외화면의 잡음(곤충소리) 따위에 신경이 온통 이끌리도록 것 장치한 것 또한, ‘인간’을 잃고 진지한 관심으로부터 멀어져버린 자들의 소외를 현상해내는 썩 괜찮은 기술법이라 말해볼 수 있을 테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영화가 주민들을 마냥 긍휼히 여기는 것만은 아니다. 예민하게 벼려진 렌즈는 사태의 면면을 어느 하나 놓치지 않고 감식해낸다. 피지배적 주체에서 지배적 주체로 은근슬쩍 자리-옮김을 감행하고 있는, 이른바 급격한 존재론적 전화의 국면들까지도 말이다. 개중에서도 압권은 담뱃잎을 추수하는 장면 속에 농밀하게 가시화된다. 이리저리 분주하게 내달리며 몸이 부서져라 부름에 응답하는 라짜로와는 달리, 이곳저곳에서 무람없이 그를 불러 세우기 바쁜 자들은, 오로지 목소리만으로 제 존재감을 드러낼 따름이다. 심드렁하게도 말이다. 화면 바깥에서 산발-단속적으로 들려오는 목소리들 앞에 어찌할 줄을 모르게 된 그이의 처지란 건, 마치 보이지 않는 적들로부터 사위를 둘러싸인 채 심연의 늪지바닥으로 가라앉아버린 형국과도 같다. 극한의 분주함과 무력감 그리고 혼란스러움 따위의 결합어라면, 꽤 적절한 번역어가 되어줄 수 있을 테다.

 

<이중으로 침체된 인간>

 

<존재감마저 삼켜져버리다>

게다가 잠시잠깐 후면, 스크린 속에선 그러한 라짜로의 모습마저도 아주 사라져버리고야 만다. 그이를 호출하는 음성들은 여전히 그득한 가운데, 한 인간의 자기표현 내지는 존재증명은 얄궂게 움직이는 ‘수풀의 들썩임’ 따위로 갈음돼버린다. 파견기자의 위치에 서서 잠잠히 사태를 조망하듯 수풀의 움찔거림을 내려다보는 카메라의 눈길은, 인격을 잃어버린 채 처참하게 물화되고 만 그이의 처지를 가감 없이 여실하게 현출해낸다.

만약 ‘여기까지’만이었더라면, 구태여 시간을 들여 이 영화를 관람할 필요는 없을 성싶다. 아무런 문제도 해결되지 않은 채,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않은 채, 그저 기존의 문제를 답습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 터이니 말이다. 분명 쉬이 화해되지 않는 입장들, 그래서 좀체 소화하기 어려운 골칫거리들은 여전히 도사리고 있다. 머잖아 이변이 발생하기 전까진, 그러니까, 영화의 이야기 흐름에 전연 도움을 주지 않는 ‘기괴한 요소들의 난입’을 통해 텍스트의 지형이 와해되고 재구축되는 경험에 맞닥뜨리기 이전까진 말이다.

 

“성스러운 존재의 현현, 시공간의 지층을 뒤틀고 가로지르다”

즈음해서 한 가질 강조해야 하겠다. 성급한 재단은 지양돼야만 한다고 말이다. 혹은, 흔히 범하기 쉬운 오류를 주의해야 한다는 말로써 갈음해볼 수도 있을 터이다. 시간-장소의 ‘건너뛰기’ 그 자체가 모종의 특별함을 겨냥하고 있다고 말하기엔 조금 어렵다는, 한결 구체적인 표현으로 바꾸어보는 것 역시도 그리 나쁘진 않을 테고 말이다. 거칠게 갈무리해 들이자면, 텍스트가 자아내는 시공간의 전이 사태는 일견 돌발적인 계기에 의해 추동되는 듯 보이지만, 세밀하게 따지자면 사건성의 순차적인/조직적인 흐름 속으로 무리 없이 함입됨을 확인해볼 수가 있다. 이를테면 어느덧 격지 근방에까지 확대된 통신시설(야간의 붉은 빛으로 표상)의 등장에서부터, 앞뒤 돌볼 줄 모르는 미련한 소녀의 신고전화, 관계당국의 개입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궤적은 이 흐름을 체계적으로 구현해내는 경로인 셈. 요컨대 과거와 미래를 아우르는 기나긴 점선들은 ―기본적으론― 어긋나지 않고 선형적으로 긴밀히 연결돼 있다. 설령 한가운데 부분을 예리한 칼로 도려내버렸다고 한들, 본디 연속성을 머금은 시공간의 변화가 ‘어떤 새로운 것’의 호명과 특별히 관계 맺지 않는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여전히 되풀이되는 억압구조>

 

<있어서는 안 될 착취의 재연>

 

   경험의 동질성은 상황의 동질성을 훌륭히 예증한다. 먼저 훌쩍 흘러가버린 시간 속에서도, 그러니까 외부로부터 차폐된 산골오지마을을 떠나 도시로 옮아간 가운데에서도, 그 형태는 다를지언정 여전히 하층민들과 그 하층민들의 골수를 뽑아먹으려는 ―하수인을 통해 대리되고 있지만― 지배력 사이의 위계가 현저해 보인다는 점을 어렵지 않게 확인해볼 수가 있다. 단지 외피만을 갈아입은 꼴이라 하겠다. 아울러, 이미 유통기한이 지나버린 과자 쪼가리 따윌 얻고자 저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처지의 존재를 겁박하는 행태와도 같은 모습들 또한, 그리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가 있다. 곧 다를 게 없단 뜻이다. 허면 차이내기란 대체 어디서 발생하는가?

주목해야 할 지점은 시공간의 순적한 전개를 ‘비집고서’ 고개를 들이미는 마술적-동화적 존재의 출현이다. 내레이션과 독특한 오브제(늑대)의 등장이라는 두 날개는, 바로 이 존재에게 신비감을 불어넣는 성례의 장치로 미덥게 봉사한다. 내레이션은 부활한 라짜로를 ‘직접’ 성자로 지칭한다. 늑대는 성스러움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상징물 ―영화작가의 본향 이탈리아에서, 늑대는 성자(국조) 곁에 머무는 자(젖어미)를 암시한다― 이다. 또한 혹자는 부활이란 용어선택에 거리감을 느낄는지 모르겠지만, 실은 전혀 무리한 표현이 아니다. 강력한 죽음의 이미지가 이미 명백히 선행하고 있음을 떠올려본다면 말이다. 죽음을 선언하기 위함이 아니었더라면, 구태여 그가 절벽에서 떨어져 내리는 순간순간을 마치 면면의 연속사진으로 찍듯 끈덕진 호흡으로 늘어지게 포착해낼 이유란 없었을 테다. 아울러 정말로 사실이 그러하다면 머리맡에 늑대가 나타나자 별안간 호흡을 되찾은 그이는 확실히 물리법칙을 초월한 신성의 존재가 된다. 불연즉, 음악이 그를 따라 옮겨 다닐 이유를 설명할 방도란 것도 달리 존재치 않을 테고 말이다.

 

<스틸이미지의 연쇄처럼 번역된 죽음>

 

<성자를 따라온 ‘음악에’ 놀라다>

 

   신비로운 후광에 젖은 존재, 그러니까 시간의 흐름을 이질화하고 이야기의 전개를 굴절시키면서 나타난 이 성자의 출현의도란 건 명확하다. 쉽게 말해서 신성한 존재치곤 뭔가 어설퍼 보이는 그가 매달린 일은, 우선 과거 자신을 홀대했던 하층민들을 도우려한 것이고, 더불어 자신을 비롯해 숱한 사람들을 오랫동안 어둠 속에 묶어두었던 이들마저도 도우려한 것이다. 베풂에 기대 궁극적으론 ―그이의 눈물로부터 유추해볼 수 있듯 자못 불가능해 보이기만 한― 모순의 중재와 불화의 해소를 꾀했으리라고 보는 게 옳을 게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가 가닿게 된 결과는 자기망실, 다시 한 번 머리맡에 나타난 늑대의 존재로 말미암아 확증된 스스로의 죽음이다. 과거와는 질적으로 달라진 자, 죽을 수 없는 자, 간단히 죽어버려선 안 될, 바로 그런 자의 종말 말이다.

 

<작물 캐기/대상을 가리지 않는 도움>

 

<은행방문/대상을 가리지 않는 도움>

“죽어선 안 될 자의 죽음, 그리고 일종의 빅뱅효과”

돌아온 라짜로의 죽음이 과연 무슨 의미를 가질까. 그리 간단치는 않다. 허나 일러두건대 희생양을 바침으로써 종내 불화하는 것들 사이의 화목을 이룬다는 그리스도교적 제의로 귀착해버리지는 않는다는 사실, 그 하나만은 유념해 두어야 할 것이다. 그의 죽음 이후에도 혼돈의 정세란 여전하니 말이다. 외려 ‘배가되었다는’ 말을 사용해보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일 테고 말이다. 그렇담 어째서 그가 죽어야만 했는가? 일견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한 듯 여겨지는 그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의심의 여지없이 확실한 건 어느 무엇 하나 확실한 것이 없다는 사실 단 하나뿐이다. 보다 정교하게 말하자면, 성자의 죽음은 일체의 확실성을 미궁 속으로 과감히 내던져버린다.

마주한 불확실성의 수렁 한가운데에서야 비로소 선명해지는 것이 하나 있다. 어느 입장에도 끝내 동화할 수 없으리라는 자각, 깊숙이 들여다보면 현실이란 것이 결코 간단히 봉합 가능하리만치 단순하지가 않다는 바로 그런 자각 말이다. 이 자각의 자리는 그동안 각자가 주장해왔던/믿어왔던 기만된 서사가 사실이 아니라는 진실이 밝히 드러나는 자리이기도 하다. 말쑥하게 포장된 안정감 아래 똬리를 틀고 있던 불협화음의 혓바닥이 드러나는 자리 말이다.

이러한 인식이 불화하는 불쾌한 상황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안아 들이도록 존재자들을 추동한다. 더는 시선을 회피하지 않고서 정면을 고스란히 응시하게 된 순간이야말로, 문제해결의 출발선이 된다고 말해볼 수가 있을 터이다. 직면이야말로 미더운 첫걸음이니 말이다. 치열한 고민 끝에 좀 더 나은 세계를 향한 상상력과 의지를 발양하는 건 우리의 몫으로 남아있다. 중요한 변화는 사태를 사태로서 ‘괄호치고’ 바라볼 수가 있게 됐다는 점이다. 그러니, 결과적으로 ‘영화가 기여한 건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런 형편없고 협애한 말은 영화의 수고로움을 형애화해버리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관념적 이데올로기의 축조가 아니라, 나름의 방식으로 진행되는 지각경험의 구조화를 통해, 추체험의 형태로서 말을 걸어오는 것이 영화가 영화답게 호소해오는 방법이다. 영화의 언어를 구성하는 질료는 사변논리와 형이상학이 아님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사실 텍스트의 유익함을 견주어보기 위해서라면 그리 멀리 갈 것 까지도 없다. 작금의 한국사회야말로 ―진태원이 『을의 민주주의』에서 적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는 바와 같이― 경우에 따라선 ‘을이 또 다른 갑’으로 탈바꿈하기도 하고, 심지어 을에게 당한 병이 다시 갑이 되어 정을 부리기도 하는, 다분히 변태적인 자화상을 여실히 그려대고 있는 꼴이니 말이다. 적어도 우리에게 있어서만큼은 피부로 와 닿는 경험세계의 문제란 뜻이다. 물론 더 큰 문제는 눈이 ‘가려져있단’ 점일 테고 말이다. 영화 텍스트의 미덕은 일상적으로-관습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진실서사의 안온한 자기운동을 중단시키고 뒤흔들어, 심원한 성찰의 자리로 돌이키도록 능히 견인하는 불쾌의 선물을 경험케 하는 것이다. 발 딛고선 지형에 대한 자각 없이는 나은 세계를 향해 비상할 수가 없고, 안이함에 젖은 자기감각을 맹렬히 공격해오는 지진과도 같이 불가해한 대상과의 만남에 힘입지 못한다면, 이 자각이란 것마저도 결코 쉽지 않을 것임을 생각해보라. 영화가 내민 시혜의 손길이 충분히 이이하지 않은가?

그럼 라짜로가 ‘행복하다’는 말은 여전히 현재형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까. 아마도 그러할 게다. 자신의 죽음이 안겨다 준 충격이 막연히 행복하다 여기고 있는 자들의 삶에 도포된 두터운 꺼풀을 걷어내고 울퉁불퉁한 국면들을 직면하게 해줄 것이며, 바로 그 자리로부터 진실 된 행복으로 나아갈 가능조건이 비로소 정초될 수 있으리란 점에서, 그리 말해본다고 해도 큰 문제는 없을 터이다. 제가 오매불망 바라던 길의 ‘이정표’가 마침내 마련되는 셈이니 말이다-.

 

 

글·남유랑

비평가. 1986년 출생. 본명은 남병수, 필명인 유랑은 유목늑대라는 뜻을 가진다. 문자 그대로 사회적 짐승인 늑대의 이미지에서 착안한 이름이다. 늑대는 홀로 쏘다니며 고독한 단독자의 길을 열어가지만, 자유로운 발길이 내딛는 걸음은 언제나 공동체의 생존이라는 목적에 닿아있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비평가의 초상이다. 만일 주된 관심사에 대해 묻는다면, 긴 설명 대신 두어 가지 화두로 갈음해볼 수도 있겠다. 먼저는 비평의 비평다움 곧 에세이도 논문도 아닌 비평이 과연 무얼 할 수 있으며 또 어떤 몫을 감당해야만 하는지에 대한 고민일 테며, 다음은 다분히 관념적인 정치철학의 선언 대신 예술이 제시할 수 있음직한 실존적·연대적 구원의 가능성을 끝끝내 소명해내고야 말겠다는 갈증이라고 할 테다. 201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부문 당선, 또 같은 해 제37회 영평상(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에서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비평가로서의 이력을 시작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일반대학원 비교문학협동과정에 재학 중이며,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총무간사로 사역 중이다.

  • 정기구독을 하시면 온라인에서 서비스하는 기사를 모두 보실 수 있습니다.
이 기사를 후원 합니다.
※ 후원 전 필독사항

비정기구독자님이 비공개기사에 대해 후원(결제)하시더라도 기사 전체를 읽으실 수 없다는 점 양해바랍니다.
* 5000원 이상 기사 후원 시 종이신문 과월호를 발송 드립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