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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시내의 시네마 크리티크] 모순과 화합의 음악, <다니엘 바렌보임과 서동시집 오케스트라>
[손시내의 시네마 크리티크] 모순과 화합의 음악, <다니엘 바렌보임과 서동시집 오케스트라>
  • 손시내(영화평론가)
  • 승인 2019.07.15 09: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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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독일 바이마르, 세계적인 음악가이자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난 유대인 다니엘 바렌보임과 팔레스타인 출신 영문학자이자 문학비평가인 에드워드 사이드가 결성한 ‘서동시집 오케스트라’의 워크숍이 열린다. 괴테 탄생 250주년에 열린 이 워크숍은 아랍과 이스라엘 출신의 젊은 음악가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장이었다. 소수의 유럽인들도 있었지만 참가자들은 대개 중동지역 출신이었는데, 팔레스타인, 시리아, 요르단, 이스라엘, 이집트, 레바논과 같이 종교와 정치, 영토분쟁 등으로 서로를 적대시하는 국가에서 온 것이었다. 당시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평화협상이 난조를 보이던 시기였고, 참가자들이 모이는 데에는 안전 문제뿐 아니라 그들 사이의 편견과 선입견 역시 걸림돌로 작용했다. 그러나 바렌보임과 사이드는 괴테의 열정과 정신을 떠올리며 토론과 합주로 이루어진 워크숍을 열정적으로 이끈다. 19세기 초 코란을 접한 뒤 페르시아어로 쓰인 시를 통해 이슬람 문화를 발견하고, “다른 존재”에 대한 특별한 시집, 즉 ‘서동시집’West-östlicher Divan을 집필한 괴테로부터, 바이마르에 모인 서로 다른 중동 지역 출신 단원들이 만드는 오케스트라 연주를 상상해낸 것이다. (<평행과 역설>, 2011, 마티)

 

파울 슈마츠니 감독의 <다니엘 바렌보임과 서동시집 오케스트라>(Knowledge Is the Beginning, 2006)는 1999년 오케스트라의 결성과 워크숍을, 그리고 2005년에 이르러 서동시집 오케스트라가 팔레스타인의 행정수도 라말라에서 공연을 하기까지의 과정을 담는 다큐멘터리다. 서로가 인접한 지역에 살고 있지만 이동을 위해서는 수백 개의 검문소를 지나야 하고, 건물은 무너지고 대신 장벽이 세워지고 있는 중동 지역의 삼엄한 풍경 위로 흐르는 “아는 게 시작일 텐데 말이죠”(Knowledge Is the Beginning)라는 안타까운 대화가 이 여정을 간략하게 요약하는 듯하다. 국적만 다른 것이 아니라 경제적 처지나 사용하는 언어, 종교도 모두 다르고 심지어 지역 간 전화도 금지되어 있어 서로의 사정에 대해 알기 어려운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여러 번의 토론과 리허설과 무대 위에서의 연주를 통해 서로를 알아가고 음악을 통해 타인을 만나는 경험을 한다.

물론 그 과정이 덜컹거리고 삐걱대는 건 당연하다. 누군가는 정치적인 견해를 밝히고 싶지 않다며 음악만을 하러 여기에 왔다고 말하고, 또 누군가는 팔레스타인인에 대해서 또 누군가는 이스라엘인에 대해서 가졌던 편견을 털어놓는다. 워크숍의 취지는, 그것들을 없는 셈 치거나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만들자는 게, 그래서 그 위에 평화를 세우자는 게 아니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끊임없이 민족 정체성이나 이민자 문제 등을 두고 견해를 밝히며 토론을 이끌고, 단원들과 함께 바이마르 근처 나치 시대의 악명 높았던 강제 수용소 부켄발트에 함께 견학을 가기도 한다. 이를테면 각자의 다름, 각자가 가진 나름대로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것, 증오와 적개심과 슬픔의 흔적을 그대로 마주하며 현재의 시공간을 들여다보고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이들이 꿈꾸었던 오케스트라의 모습이었을 테다. 영화는 그러한 과정을 건너뛰어 무턱대고 조합이나 평화를 말하기보다 종종 이질적이고 끝내 섞이지 않는 단원들의 표정과 말들에 머물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다. 바렌보임과 사이드가 용기 있게 세계의 모순을 바라보고 문제를 제기하며 저항했던 것처럼 말이다.

 

영화의 후반부, 중동의 상황은 오케스트라가 만들어지던 1999년보다 더 악화되어있고 에드워드 사이드는 백혈병으로 투병생활을 하다 세상을 떠난 이후다(2003년). 그처럼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마침내 라말라에서 공연을 이루어내는 과정이 여기 담긴다.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위협 속에서 단원들이 마음을 모아 공연을 결심하고, 그것이 마침내 실현되며 공연을 끝낸 후 단원들이 벅찬 얼굴로 공연장을 나와 서로 부둥켜안는 일련의 장면들은 분명히 감동적이지만, 거기엔 또한 모든 갈등이 해소된 것처럼 보이는 착시의 위험 또한 있을 것이다. 그것을 끊임없이 지적하는 이는 다름 아닌 다니엘 바렌보임이다. 그는 음악이 주는 자유로움과 평화가 지속되는 건 찰나의 순간뿐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오케스트라가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이 평화 그 자체가 아니라 이해와 인내, 용기와 호기심임을 힘주어 말하는 이다. 종종 뚱한 표정으로 칭찬을 비껴가고, 이스라엘에서 수여하는 상을 받는 연단에 올라 이스라엘의 침략을 비판하는 그는 모순을 해결하려는 게 아니라 응시하려는 사람이기에 위대하다. 괴테로부터 서동시집 오케스트라에게로 흐르는 정신이란, 모순 위에 서서 타인을 바라보려는 의지일 것이다. 그것이 문제를 해결하고 분쟁을 종식시키지는 못할지라도, 우리에게 있어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시작이 되리라는 건 분명해 보인다.

 

 

글·손시내

2016년 영평상 신인평론상 수상. 한국독립영화협회 비평분과에서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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