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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숭범의 시네마 크리티크] 사랑은 거기서 아프다- <비포 선라이즈>
[안숭범의 시네마 크리티크] 사랑은 거기서 아프다- <비포 선라이즈>
  • 안숭범(영화평론가)
  • 승인 2019.07.19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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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푸스의 바위

있는 힘을 다해 밀어 올려보지만, 바위는 이내 굴러 떨어진다. 시지푸스를 옭아맨 건 영원한 고역으로서 반복의 덫이다. 금방이라도 닿을 듯한 산 정상은, 상상적 환희가 현실적 비탄으로 전환되는 순간을 내려다볼 뿐이다. 언젠가 시지푸스 신화의 한 대목을 사랑에 관한 명징한 잠언으로 받아들인 적 있다. 거기서 사랑의 운명, 혹은 사랑과 더불어 살아가는 자의 운명을 목격한 적 있다. 곧 죽을 것 같은 사랑에 무너졌음에도 닥쳐 온 사랑에 다시 무방비인 청춘 남녀를 흔하게 본다. 그들의 내면엔 시지푸스가 품은 감정과 의지의 구조가 유사하게 작동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생을 망원경으로 보면, 사랑의 환희와 이별의 슬픔이 순환하는 반복의 굴레일 수도 있다.

이즈음에서 곰곰이 생각해보려 한다. 시지푸스에게 진짜 고통이란 무엇일까. 가닿을 수 있을 것만 같은 매혹의 산 정상이 가까이에 있다는 것일까. 바위를 밀어 올리는 과정에서의 미숙함이 절망의 기원일까. 가장 확실한 답안을 찾는다면, 산 정상과 바위에 대한 내면의 강박을 빼놓고 이야기할 순 없을 것이다. 이 ‘강박’은 사랑과 더불어 살아가는 자의 근원적 아픔을 환기시킨다. 우리는 일상적 세계 내에서 타인과의 황홀한 합일의 순간을 열망하곤 한다. 우리 대부분에게 로맨스 이야기 속 낭만적 신화의 결말이 매력적인 이유다. 누군가는 현실에서 자신을 주인공으로 이상적 사랑이 삶에 얹히는 장면을 꿈꿨을 것이다. 한편, 우리 중 누군가는 멜로드라마를 보며 다른 결의 통속적 감상에 젖기도 했을 것이다. 사회문화적 긴장과 모순이 부딪치는 자리에서 비일상적 격정에 휩싸인 적 있을 것이다. 어쩌면 두 장르의 문법화 과정을 보면서 사랑에의 ‘강박’을 안고 살아가는 인류의 초월적 욕망을 읽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비포 선라이즈>가 기존의 로맨스, 멜로드라마 영화와 유다른 차이로 다가왔던 이유를 이제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비포 선라이즈>는 양자의 장르 관습이 교차하는 경계를 자기반영적으로 되묻는 특기할 만한 영화다. 두 주인공의 수다한 말들 사이에서, 그들이 함께 보낸 마법 같은 일상의 시간 안에서 우리는 자기 행위에 자의식적인 시지푸스를 만나게 된다. 그들은 함께 바라보게 된 산 정상을 이야기한다. 그곳을 향한다면 필연적으로 감당해야 할 바위에 대해 조심스럽게 사색한다. 바위를 계속 밀어 올리는 일, 곧 환상과 낭만으로 닦인 이성애적 사랑을 연장하는 일을 두고 서로의 열정을 가늠한다.

<비포 선라이즈>는 셀린의 거처가 있는 파리와 제시의 일상이 있는 미국을 상정하고 시작된다. 그들은 각자의 현실로 돌아가기 위한 목적에서 지금 유럽 횡단열차에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셀린은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파리로 돌아가는 중이었고, 불만족스러운 유럽 여행을 끝내려는 제시는 미국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이동 중이었다. 그들이 서로를 향한 충동적인 감흥에 이끌리기 전까지 비엔나는 예정에 없던 공간이거나, 잠시 스쳐지나가게 될 무의미한 공간에 불과했다. 그러나 제시와 셀린이 마법 같은 낭만적 정서에 휩싸여 비엔나에 발을 들인 순간, 그곳은 둘만의 비의적인 장소감으로 충만해진다. 그들의 비엔나 여정은 특별한 감정으로 다가온 상대를 두고, 현실과 환상, 일상과 비일상, 정주와 이주의 접합점을 탐색하는 실험으로 나아간다.

영화는 그들이 보낸 단 하루의 시간이 지나간 다음의 비엔나를, 그 ‘텅 빔’의 느낌을 포착하며 끝난다. 그런데 함께 밀어 올리던 바위가 예정된 수순으로 굴러 떨어지고 있음에도, 그들은 산 정상에 이를 수 있다는 기대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때 비엔나에 남겨진 그들의 흔적을 더듬는 카메라의 시선은 ‘연민’에 가깝다. 이 글은 시지푸스의 덫에 갇힌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과 그 예정된 비극을 이기기 위해 흩뿌린 말들에 주목하고자 한다. 리처드 링클레이터가 두 명의 시지푸스를 바라보는 태도를 음미하고자 한다.

 

닿을 수 없는 말들

<비포 선라이즈>는 낯선 여행지에서 느끼는 들뜬 감흥을 배경으로 예기치 않게 찾아온 사랑에 대해 성찰한다. 제시와 셀린은 유럽횡단열차에서 우연히 만나 휴게실 식당 칸에서 잠깐의 대화를 나눈 사이일 뿐이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에 대한 호기심과 미묘한 기대감에 이끌린다. 열차가 비엔나에 멈추자 다음날 아침 그곳에서 미국행 비행기를 타야하는 제시가 셀린에게 유럽에서의 마지막 하루를 함께 보내달라고 제안한다. 그때부터 그들은 그들만의 마법 같은 시간으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그들은 아마추어 연극인을 만나고, 손금으로 점을 보는 할머니를 마주친다. 영어로 시를 써주겠다는 거리의 시인에게 시를 한 수 받고, 골목에서 출산 춤을 추는 무용수를 구경한다. 선상 카페에서 악사들의 공연을 즐기고, 지불할 돈이 없음에도 선뜻 적포도주를 내어 주는 펍 주인을 만난다. 비의적인 우연으로 가득 찬 하룻밤이 지나간 아침에는 선명한 음정의 하프시코드 연주를 함께 듣는다. 제시와 셀린이 만난 사람들과 그들의 행위는 사랑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은유하는 낭만적 장치들이다. 사랑이란 감정도 상대에 대한 비의적이거나 심미적인 감상의 결과이지 않는가.

<비포 선라이즈>에서 더욱 흥미로운 건, 서로를 향해 그들이 산란한 언어다. 먼저 링클레이터는 날이 어두워지고 다시 밝아지는 과정을 정직하게 활용한다. 자연의 리듬을 타고 일상적인 시간이 지나가는 느낌을 평범하게 살린다. 정해진 이별의 순간이 뒤에 있다는 것, 예정된 비극적 상황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차분히 묘사해간다. 이로써 작별의 순간을 더 선명하게 예감하게 되는 영화 바깥의 우리는, 그들의 서로를 향한 말을 좀 더 고온으로 받아들인다. 현실의 시지푸스가 영화 속 시지푸스의 바위를 심정적으로 더 열심히 밀어 올리게 되는 셈이다.

그러나 링클레이터는 우리의 열망을 장르적으로 활용하지 않는다. 긴장을 비약시키기 위해 통속적 사건들을 의도하지 않는다. 작위적인 대사, 상징적인 오브제나 셔레이드를 수단으로 영화 속 주인공과 영화 밖 우리의 감정을 흔들어대지 않는다. 그는 비엔나의 숨겨진 뒷골목과 아름다운 명소들을 자연스러운 세트로 배치하는 것으로 ‘여행의 감흥’과 ‘사랑의 긴장’을 교합할 뿐이다. 이때 교합의 과정을 반사하는 진솔한 대사들은, 두 인물의 내면을 간섭하는 충동을 세심하게 드러낸다. 꾸밈없는 말들 속에 언뜻언뜻 내비치는 인물들의 의지와 감정의 구조. 이는 링클레이터가 연출한 거의 모든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해석의 포인트가 된다.

셀린과 제시는 비엔나의 낡은 트램 위에서, 비좁은 레코드 샵 감상실에서,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과 고풍스러운 엔틱 카페에서 부모님과 친구들, 유년 시절의 경험과 죽음에 대한 인상을 이야기한다. 알베르티나 뮤지엄과 고풍스러운 성당에서, 어둑한 클럽과 선상 카페에서 서로를 향한 마음의 행로를 잔잔하게 고백한다. 밤이 깊어지면서 친밀한 농담 사이사이로 관계맺음의 철학과 이별에 대한 통찰이 담긴 인생관이 오간다. 단언컨대 <비포 선라이즈>는 낯선 이방인, 아름다운 비엔나, 설렘을 안기는 상대, 그리고 이들을 직관적으로 연결시키거나 수렴하는 대사들의 영화다.

이제 셀린과 제시가 비엔나의 비밀스러운 하루에 새긴 대사들을 소환해 보자. 셀린의 즉흥적인 비엔나 여행은 “10년, 20년이 지났다고 치자. 넌 결혼을 했고. 그런데 그 결혼 생활이 예전만큼 재미있지는 않은 거지. 그래서 남편을 탓하면서, 옛날에 만난 모든 남자들을 떠올리는 거야. 그때 그 남자를 선택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상상하는 거지. 그 남자들 중 하나가 바로 나야.”라는 제시의 단도직입적인 멘트에서 시작된다. 이후 그들의 대사는 갑자기 출현한 신비로운 산 정상에 이르고 싶은 열망과 그러한 충동이 현실적이지 않다는 우울 사이를 오가며 탄생한 것이다. 제시는 “사랑이란 혼자되기 두려운 사람의 도피처야.”라고 말하다가도 “너랑 같이 있으면 내가 딴 사람처럼 느껴져.”라고 말한다. 첫 번째 문장에 깃든 체념과 불안, 두 번째 문장에 실린 설렘과 기대는 서로를 밀어내면서 지속적으로 자리를 바꾼다. 셀린의 내면에 떠도는 상념들도 제시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녀는 “나에게 인생은 조용히 누워 죽음을 기다리는 어느 할머니의 추억 같은 거야.”라고 말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우리가 살아가면서 하는 모든 일이 좀 더 사랑받기 위한 거 아냐?”라고 물으며 “난 네 꿈속에, 넌 내 꿈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야”라며 낭만에 흔들리는 내면을 숨기지 않는다.

그렇게 그들은 “우주의 주인이 된 것 같은 착각”이란 충동 아래에서 순간의 감정에 충실해진다. 외등 하나만 덩그러니 솟아 있는 공원 잔디밭에서 펍 주인이 배려해 준 적포도주 한 병을 나눠 마시며 마술같은 밤을 보낸다. 이 밤에 대한 해설은 셀린의 대사가 영화 속에서 이미 내린 바 있다. “만약 이 세상에 신이 있다면 그 신은 너나 나, 우리 내부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우리 사이에 존재한다고 믿어. 이 세상에 마술이란 게 존재한다면 그건 상대를 이해하고 함께 하려는 시도 안에 존재할거야.”

제시와 셀린의 신비한 밤은 이내 지나고 작별의 아침이 온다. 이 아침은 그들 ‘사이’에 흥건했던 충동을 서서히 밀어내는 눈부신 햇살과 함께 온다. 정리되지 않은 생각과 감정이 아직 비엔나의 건물과 골목 사이에 남겨져 있지만, ‘사이’에 존재하는 신, ‘시도’의 순간에 탄생하는 마술이란 말은 사랑에 관한 역설적 의미를 이미 내포하고 있다. 신은 나의 열망에 반응하는 기계가 아니고, 마술은 일상을 대체할 수 있는 실체가 아니지 않는가. 링클레이터가 지난 밤 제시와 셀린이 머물렀던 장소들을 일정한 길이의 쇼트들로 연속해서 보여줄 때, 침묵을 동반한 그 ‘텅 빔’의 이미지는 일정한 언어성을 내뿜는다. 일상을 질서화하는 합리적 이성의 시선으로 지난밤에 탄생한 정념을 더듬는 시선이 거기에 있다. 이 신에 이르러 <비포 선라이즈>는 로맨스와 멜로드라마 장르의 관습을 저만치 비껴난다.

그 신에 대한 해설을 제시의 대사로 받아쓰자면, “모든 건 끝이 있어. 그래서 시간이 더욱 소중히 느껴지는 거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즈음에서 시지푸스의 바위는 제어하기 힘든 속도로 굴러 떨어지기 시작한다. 셀린과 제시는 다시 만날 수 없다는 예감과 다시 만나야 한다는 열망이 팽팽하게 맞선 열렬한 키스를 한다. 그러나 상황을 역전시키기엔 파리와 미국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다. 6개월 후, 그 자리에서 다시 만나자는 약속은, 바위를 다시 밀어 올려야 한다는 강박의 표지다. 설렘의 하루를 견디지 못해 스스로 만든 ‘반복의 덫’이기도 하다. 대낮의 합리적 시선으로 말하면, 그 대사는 내면을 이미 장악한 현실적 비탄을 피하기 위한 안간힘이다. 비엔나에서의 꿈같은 하루가 6개월의 시간에 희석되지 않아야 성사될 수 있는 환영의 자식이다.

<비포 선셋>과 <비포 미드나잇>에 대한 정보, 그 마술적으로 연장되는 이야기를 모른 체하며 말하건대, 사랑은 여기서 아프다. 이때의 아픔에 대한 해설은, 영화 속에 등장한 두 편의 시에 응축되어 있다. 필연적으로 통증을 동반할 수밖에 없는 사랑의 속성에 대한 직관이 그 언어 안에 담겨 있다. 이들은 제시와 셀린 ‘사이’에 던져진 바, 서로를 향한 수다한 말들이 결국 닿을 수 없는 거리를 배회하다가 목적지에 이르지 못할 것임을 함축한다. 참고로 첫 번째 시는 비엔나의 꿈같은 밤에 거리의 시인이 즉석에서 지은 「망상의 천사」란 작품이다. 두 번째 시는 아침이 찾아온 후 제시가 셀린에게 들려준 W. H. 오덴의 「어느 날 저녁, 밖에 나갔을 때」라는 작품의 한 대목이다.

 

허망한 꿈

리무진과 속눈썹

오, 어여쁜 얼굴로 당신은

내 와인 잔에 눈물 한 방울 떨구어주오

저 커다란 눈을 보라

그대는 내게 어떤 의미인가

달콤한 케이크와 밀크셰이크

난 망상의 천사

난 환상의 축제

내 생각을 알아주오

어떤 추측도 말고

내가 어디서 왔는지 당신은 모르듯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네

삶에 던져진 채

강물에 떠가는 나뭇가지처럼

물줄기를 따라 흘러가다

현재에 걸린

그대는 나를, 나는 그대를 이끌려 하네

산다는 건 그런 거

그대는 날 모르는가?

그대 아직도 날 모르는가?

 

모든 시계가 울리기 시작한다

오 영원히 정복할 수 없는 시간이여

번민 속에 삶은 희미하게 사라지고

시간이 승리하리라

내일 또는 오늘

시간의 승리

예술로서 영화는, 정복할 수 없는 시간에 대한 심미적 도전이다. 결국 시간이 승리하는 인생에 대한 유의미한 반기인지도 모른다. 잘 알려진 대로 타르코프스키는 영화를 ‘봉인된 시간’이라 말했다. 영화는 기억이 아니면 재구할 수 없는 ‘지금 여기’의 시간을 포착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링클레이터는 영화의 가능성을 좀 더 멀리까지 끌고 나가려는 시도다. 그는 영화 안에 붙들 수 없는 시간, 그러니까 ‘봉인되지 않은 시간’, 혹은 ‘봉인할 수 없는 시간’을 서사화하는 기적을 실험해 왔다.

<비포 선라이즈>의 서사 내에서 ‘6개월 후의 약속’을 남겨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여기서 <비포 선라이즈> 이후의 링클레이터 영화를 잠깐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는 1995년에 〈비포 선라이즈〉를 만든 후 정확히 9년의 간격을 두고 〈비포 선셋〉(2004)과 〈비포 미드나잇〉(2013) 을 찍는다. <비포 선라이즈>를 찍을 무렵 현실에서 20대 중반이던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는 자신들이 맡은 제시와 셀린 배역을 감당하며 캐릭터와 함께 늙어간다. ‘나이듦’이라는 현실의 평범성을 영화 안에 들여 봉인할 수 없는 시간까지 봉인하려 한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보이후드>에서 절정을 이룬다. 12년에 걸쳐 촬영된 신들은 결국 6살로 등장한 메이슨(엘라 콜트레인 분)이 18살에 이르는 시간을 말끔하게 이어 붙인다. <보이후드>의 런닝타임 165분은 영화 안의 메이슨과 영화 바깥의 엘라 콜트레인이 하나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 같은 마법으로 완성된다.

그러나 그 마법같은 연출은 인간이 시간을 정복할 수 없다는 자명한 사실에서 발명된 미학적 가능성이다. ‘비포 3부작’만을 두고 말하면, 사랑의 격정에 올라탄 자라도 결코 시간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역이용한 포석이다. 잠시 영화 속에 묘사되지 않는 셀린과 제시의 일상을 상상해보기로 한다. 그들은 각자의 거처(파리, 미국)에서 무수한 책임관계에 둘러싸여 있을 것이다. 각자의 정체성으로 통용되는 사회적 페르소나를 무수히 지니고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익숙한 일상은 신적 사랑과 희생에의 미덕이 서로를 향한 고결한 원칙으로 작동하던 세계 이후다. 시적 상상으로 승화되는 사랑마저 끝내 세속화 되어버리는 시공간이다. ‘순진’이든 ‘순수’든 아가페에 근접한 사랑이 긴 유효기간을 갖기 어려운 무대다.

물론 낭만주의 이상으로부터 멀어진 현대인에게도, 그리하여 서로에게 발가벗겨진 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사랑의 신비는 다녀간다. 이성애적 사랑을 예로 들면, 남녀가 서로에게 열망하는 각자의 특성에 다시 환상을 부여하는 계기는 찾아오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계기 이후의 시간을 견딜 만한 다른 환상이 지속적으로 발명되긴 어렵다. 이 같은 낭만적 사랑에의 실패를 프로이트적으로만 읽을 순 없다. 다시 말하지만 유년기의 상실 체험으로 귀속되지 않는 제도로서 오늘날의 ‘일상’이 그 원인 중 하나다. 셀린과 제시의 정체성을 형성해온 사회문화적인 긴장과 모순의 다발이 사랑에 대한 감정과 의지의 구조를 쉬이 변질시킬 수밖에 없는 것이다.

<비포 선라이즈>에서 링클레이터가 비엔나의 이미지 안에 새긴 ‘충만함(밤)’과 ‘텅 빔(아침)’ 사이의 낙차, ‘파리, 미국’과 ‘비엔나’ 사이의 거리는 그러한 내막을 헤아리게 하는 전략이기도 하다. 재차 상기하면, 비엔나는 이탈의 시간이 예정된 낭만적 외유의 세계다. 평범한 일상의 질서를 망각하기로 합의한 이들에게 시한부로 열리는 특별한 세상이다. 링클레이터는 비엔나에서 낭만적 사랑에 몸을 맡긴 셀린과 제시가 각각 파리의 미국의 구심력에 번민하고 있음을 묘사하곤 한다. 각자 익숙한 제도의 틀과 사회문화적 제약을 끊임없이 의식하고 있음을 숨기지 않는다. 그래서 ‘6개월 후의 약속’으로 출구를 열어놓은 그들의 낭만적 작별도 “제도가 감정생활을 다스리는 방식에서 비롯되는 형태와 밀도와 질감”을 가진다.

링클레이터는 시간이 사랑을 이길 것이라는 예감과 함께 이야기를 진행시키다가 예감과의 다툼을 우리에게 전가하며 영화를 끝낸다. 그렇게 로맨스와 멜로드라마의 전철을 따를 것처럼 영화를 시작해놓고서는, 전혀 엉뚱한 지점에 우리를 데려다놓는다. <비포 선셋>과 <비포 미드나잇>은 시간과 사랑을 두고 우리 내면에서 끝나지 않는 갈등이 불러낸 메아리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링클레이터는 <비포 선라이즈>에 봉인된 셀린과 제시의 시간을 기본 소재로 삼는다. 그리고는 <비포 선라이즈>에 대한 인상을 안고 영화 밖에서 진행되어 온 우리의 봉인할 수 없는 시간을 또 다른 소재로 엮어 <비포 선셋>을 만든다. 그렇게 사랑에 관한 시지푸스의 ‘반복의 덫’을 ‘반복의 심미적 쾌감’으로 승화시킨다. 링클레이터의 영화 미학은 이러한 메커니즘을 중핵으로 삼아 확산과 수렴을 반복한다.

 

1) 에바 일루즈, 김희상 역, 『사랑은 왜 아픈가- 사랑의 사회학』, 돌베개, 2018, pp.17-20.

2) 에바 일루즈, 김희상 역, 『사랑은 왜 아픈가- 사랑의 사회학』, 돌베개, 2018, p.33.

 

 

‘사이’에 존재하는 신

말씀이 육신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The Word became flesh and made his dwelling among us)- 요한복음 1장 14절 중

순수의 눈으로 이상화 해 온 사랑은 우리를 매개하는 신, 혹은 ‘신적인 것’의 흔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을 매순간 소유할 수 없다. 사회문화적 제도의 규제 아래에서 무수한 책임관계를 견뎌야 하는 현대인에게는, 사랑이 더욱 더 희미한 먼별처럼 명멸할지도 모른다. 시간은 우리를 두고 우리 없는 세계로 더 함부로 달아날 것이고, 우리는 사랑을 단념하는 일을 더 수월하게 해낼 것이다. 시간은 결국 사랑을 벗어난다! 이 표현은 수사적이지만 각자의 현실 세계에서 쉬이 체험 가능한 일상적 진술이기도 하다. 요컨대 셀린이 통찰해낸 ‘사이’에 존재하는 신이라는 언명은, 사랑의 속성에 대한 틀림없는 직관이고, 우리의 한계에 대한 솔직한 자각이다.

시지푸스를 옭아맨 영원한 고역으로서 반복의 덫을 다시 상상해 본다. 닿아갈 수도, 포기할 수도 없는 산 정상을 향한 열정과 끝내 외면할 수 없는 바위에 대한 집착을 생각해 본다. 링클레이터가 ‘비포 3부작’을 통해 묘사해낸 상상적 환희와 현실적 비탄의 순환은 너무 평범해서 비범하다. 그들이 산책한 낭만적 시공간과 그곳에서 쏟아낸 숱한 말들은 ‘봉인된 시간’ 바깥에서 여전히 신비로운 힘을 가진다. ‘사이’에 존재하는 신의 흔적(사랑)에 대한 탐색은 시간에 대한 성찰을 필수적으로 동반한다. 링클레이터가 자기 방식으로 더 오래 영화를 만들었으면 바람을 감추고 싶지 않다.

이 글은 링클레이터의 영화라면, 오래 기다릴 수 있는 자들을 위한 변명이다. ‘비포 3부작’은 고전이 될 것이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글·안숭범

영화평론가. 시인.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EBS <시네마천국>을 진행했으며 지금은 영화를 포함한 문화콘텐츠의 인문학적 기획 및 비평에 매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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