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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시내의 시네마 크리티크] 숲속의 삶, 선택하는 삶, 데브라 그래닉의 <흔적 없는 삶>
[손시내의 시네마 크리티크] 숲속의 삶, 선택하는 삶, 데브라 그래닉의 <흔적 없는 삶>
  • 손시내(영화평론가)
  • 승인 2019.08.19 09: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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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풀이 우거지고 커다란 나무들이 버티고 있는 울창한 숲속, 영화의 주인공들이 살고 있는 이곳은 미국 오리건 주 포틀랜드의 광활한 삼림 지대다. 인적은 드물고 온통 초록색의 기운이 무성한 이곳에 10대 소녀 톰(토마신 맥킨지)과 그의 아빠 윌(벤 포스터)이 살고 있다. 이들은 숲에서 먹을 것을 얻고 천막을 치고 지내며 밤엔 작은 텐트 하나에서 함께 잔다. 그뿐만 아니라 가끔은 흔적 없이 도망치고 숨는 법을 익히는 훈련을 하기도 한다. 때로는 도시에 나가 병원과 마트에도 가지만, 머물 수 있는 다른 공간 없이 숲속에서 사는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이들이 이렇게 산 것이 언제부터인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우리는 그저 그 위태로운 삶의 방식을 지켜볼 수 있을 뿐이다. 톰의 나이는 이미 자기만의 공간을 필요로 하기 시작하는 시점을 훌쩍 넘은 것 같고, 윌은 때때로 악몽을 꾸다 불안한 얼굴로 일어나는 것 같다. 물론 이들이 숲속 생활을 힘겹게 여기지는 않는 듯하지만, 언제까지 이 생활이 지속될 것인가 하는 질문 역시 떠오를 즈음, 톰과 윌이 사람들에게 발각되며 변화가 일어난다.

 

데브라 그래닉의 <흔적 없는 삶>(Leave No Trace, 2018)은 이처럼 울창한 숲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각자의 삶의 방식을 찾아 떠나는 이야기다. 지난해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상영된 바 있는 이 영화는, 거창한 교훈이나 다른 삶에 대한 섣부른 판단 없이 조용히 떨리는 톰의 얼굴을 묵묵히 지켜본다. 톰은 윌에게 애정을 가지고 그를 염려하지만,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가고 있으며 머물고 싶은 마음, 가지고 싶은 것을 솔직하게 말한다. 어쩌면 톰의 부주의가 원인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 때문에 이들이 발각된 이후, 사회복지국에서는 이들을 ‘독립적’으로 살게 하기 위한 절차를 수행한다. 농장에 마련된 집에서 지내며 사람들과 함께 일을 하고, 학교에 다니는 등 사회 속의 삶을 시작하게 하는 것이다. 톰은 그것들을 온통 새롭고 신기하게 받아들이지만,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앓는 듯 보이는 참전군인 윌에겐 그 모든 것이 버겁다. 그래서 윌은 그곳을 떠나 다시 흔적 없는 삶을 살고자 한다. 둘이 원하는 삶의 방식이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을, 윌이 기피하고 외면했던 것이 톰에게도 불필요했던 게 아니라, 그것이 필요한지 아닌지를 알아가는 과정이 없었던 것임을 우리가 알게 될 무렵이다.

 

아무런 관계망도, 지붕조차도 없는 숲속과 집과 일이 있지만 윌이 끝내 머물 수는 없었던 농장을 지나 이들은 세 번째 장소에 다다른다. 또다시 어느 울창한 숲속이다. 사고로 의식을 잃은 윌을 구하기 위해 톰은 지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고, 이들은 캠핑 밴과 트레일러로 이루어진 어느 숲속 공동체를 만난다. 이들은 톰과 윌에게 무엇도 요구하지 않고, 상처를 치료하며 머물 곳을 제공한다. 이곳은 아마도 두 사람이 맨 처음 살던 숲속과 그다음으로 머물던 농장의 중간쯤 되는 것처럼 보인다. 도시의 삶과 멀찍이 떨어진 자연 속에서의 삶, 그렇지만 서로를 돌보고 함께 어울려 쉴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마침내 이곳에 머물기를 선택하는 톰은, 그저 여기저기 어쩔 수 없이 떠돌다가 머물 곳을 만난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필요로 하고 원하는 것을 알고 자신의 삶을 결정하는 순간을 만난 것 같다. 그렇기에 그는 이제 윌과는 다른 방향으로 갈 수 있다. 머물 수 있게 되어도 머물지 못해 끝내 그곳을 떠나야 하는 윌의 선택 또한 그 자신의 선택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때가 온 것이다. 때로 위태롭고 때로는 아름다운 풍광을 지나는 동안 영화 속에 흐르는 건, 생면부지의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도움을 제공하고 서로의 삶을 조용히 응원하는 이들의 마음인 것만 같다. 그리고 거기 두려움과 서운함과 걱정으로 조용히 떨리며 생에 대한 의지와 발견의 기쁨으로 가만히 빛나는 톰의 얼굴이 있다.

 

 

글·손시내

2016년 영평상 신인평론상 수상. 한국독립영화협회 비평분과에서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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