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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훈의 시네마 크리티크] 구원과 허상, 그 데칼코마니의 기록 : <마스터>
[최재훈의 시네마 크리티크] 구원과 허상, 그 데칼코마니의 기록 : <마스터>
  • 최재훈(영화평론가)
  • 승인 2019.09.02 11: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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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할 듯하면 비틀어 버리고, 공감하려는 순간에는 냉큼 고개를 돌려 버린다. 폴 토마스 앤더슨의 영화는 그랬다. 그의 1999년 작품 <매그놀리아>를 예로 들어 보자. 그는 이 영화를 통해 사람들의 죄를 파고들면서 인간의 살갗을 가르는 메스처럼 날카롭게 생채기를 낸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누군가에게 죄인이라고 나지막이 속살거린다. 폴 토마스 앤더슨은 3시간 동안,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각기 다른 삶이 우연과 필연으로 귀속되는 그 내밀한 관계를 파고들며 마치 로버트 알트만이 일궈낸 씁쓸하고 우울한 풍자의 계승자로서의 면모를 보인다. 하지만, 나머지 8분 동안 하늘에서 개구리 우박이 떨어지는 전대미문의 엔딩을 보여주면서 영화를 일순간에 판타지 혹은 우화로 만들어 버린다.

그렇게 <매그놀리아>의 엔딩은 이제껏 보았던 어떤 영화 속 엔딩 보다 더 충격적이고 처연하고, 그래서 허무하고 씁쓸한 기억으로 남았다. 물론 긍정적인 의미에서 말이다. 2002년 칸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한 <펀치 드렁크 러브>를 통해 폴 토마스 앤더슨은 세상을 하나의 거대한 연극이라고 보며 현란한 플롯의 기술을 선보이지만, 아담 샌들러를 통해 정갈하고 단정한 사랑 이야기로 정리한다. 2007년 20세기 초반을 배경으로 자본주의와 기독교라는 미국 사회의 두 근원을 탐구한 <데어 윌 비 블러드>는 질서를 역행하는 미국 자본주의의 어두운 측면을 치열하게 파고들었다. 폴 토마스 앤더슨은 괴물 같은 연기력을 지닌 다니엘 데이 루이스를 통해 신경질적이고 묵시론적인 욕망이 결국 모든 걸 삼켜버리는 순간을 포착해 낸다.

 

<데어 윌 비 블러드> 이후 5년 만에 연출한 <마스터>는 1950년대 전후, 인간의 심연을 파고든 불안의 근원 속을 깊숙이 들여다보는 영화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프레디 퀠(호아킨 피닉스)은 여전히 방황하며 백화점의 사진기사로 살아가고 있다. 자신이 제조한 술에 의존하며 살아가고 있는 프레디는 술에 취해 유람선의 한 파티장에서 난동을 부리게 되고 다음날 그 자리에 있었던 랭커스터(필립 세이무어 호프만)를 만나게 된다. 프레디는 인간의 심리를 연구하는 ‘코즈’ 연합회를 이끌고 있는 마스터, 랭커스터의 실험 대상이자, 조력자이자, 친구로서 그의 가족들과 함께 머물게 된다. 자신의 심중을 꿰뚫어보는 그에게서 프레디는 자신이 어쩌면 구원받을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발견하게 된다. 영화는 그 희망과 허상 사이의 경계를 오가는 두 남자의 이야기를 담아낸다. 그리고 시대적 징후로서의 불안증에 빠진 프레디와 교주의 냄새를 풍기는 랭커스터의 만남을 통해 감독은 불안의 근원이 믿음을 통해 혹은 타인의 도움을 통해 구원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프레디는 랭커스터를 하나의 신처럼 떠받든다.

혹자는 랭커스터의 단체 ‘코즈’가 톰 크루즈가 신봉하는 사이언톨로지를 인용했다고 표현하지만, 그 해석의 가능성은 열려있다. ‘코즈’와 랭커스터를 바라보는 시선을 종교적 신념으로 보느냐, 아니면 현재 사회적으로 큰 관심을 끌고 있는 ‘멘토’ 열풍에 걸맞은 정신적 지주로 볼 것인가는 관점에 따라 다양한 가능성으로 열려있다. 그리고 현재 나의 불안을 위로하고 어루만져줄 달콤한 거짓말 혹은 구원자에 대한 기대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적용되는 판타지이다. 폴 토마스 앤더슨은 이전 영화들처럼 <마스터>에 어떠한 결론도 또렷한 교훈이나 주제를 담아내지 않는다. 단지 누가 누구의 ‘마스터’이며 나를 진정 구원해줄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그의 영화답게 에필로그는 기대했던 것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다가 뚝 끊기듯 맺어진다.

 

<마스터>의 영화적 형식도 주목할 만하다. 디지털, 3D, 아이맥스 등 최첨단 촬영 기법이 대세가 된 지금 폴 토마스 앤더슨은 오히려 과거의 유물처럼 여겨지는 70mm 필름으로 1950년대 미국 사회를 재현해 내는데, 그 결과는 상상 이상으로 더 매력적이다. 마치 오래된 고전 영화를 보는 것 같은 영화의 질감을 통해 관객들은 1950년대 미국 사회를 유영하는 공기까지도 내밀하게 함께 느끼는 것 같은 기분에 빠진다. 풍요로움과 우아함의 시대로 읽히는 1950년대, 그 속에서 절망과 불행의 시간을 보내는 프레디의 삶을 대비시키면서 영화는 스산한 긴장감을 유지한다.

영화의 시작은 물보라가 부서지는 바다, 프레디와 랭커스터가 처음 만난 곳도 선상이다. 그리고 에피소드의 중간 중간 마다 폴 토마스 앤더슨은 갈라지는 물보라를 보여주는데, 이는 주인공의 표류하는 삶을 암시하는 장치이다. 부서져 사라져 버리는 물보라, 이는 불안하고 공허한 우리 모두의 현실을 상징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폴 토마스 앤더슨의 페르소나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은 랭커스터가 되어, 이야기의 한 축을 든든하게 받쳐주고 표정, 연기, 구부정한 자세, 눈빛을 통해 호아킨 피닉스는 그저 프레디 그 자체라고 믿어버리게 만드는 농밀한 연기를 선보인다. 베니스 영화제에서 호아킨 피닉스와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은 남우주연상을 공동수상했다. 누구의 이견도 없는 당연하고도 공정한 선택이었다.

폴 토마스 앤더슨은 프레디가 ‘마스터’라고 믿었던 랭커스터 역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프레디의 거울 속 다른 모습이라고 말한다. <마스터>의 포스터는 데칼코마니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이는 프레디와 랭커스터는 서로 다르지만, 결국 둘은 서로를 마주하고 꼭 눌러보고서야 그 모양이 드러나는 데칼코마니 같은 존재라는 것을 상징한다. 절대적 진리와 권위를 표상하는 존재로서의 마스터를 갈망하며 방황하는 영혼을 믿음으로 붙잡아야 했던 프레디의 방황은 갈 곳을 잃은 오늘 우리의 모습과 꼭 닮았지만, <마스터>를 통해 관객들이 얻게 되는 것은 위안이 아니라 질문이다. 당신에게 던지는 랭커스터의 질문, 대답할 준비가 되었는가?

 

just say your name!

again!

are you sure?

you know who you are.

 

 

* 사진 출처 : 다음영화 _ 마스터 _ 사진

 

 

글·최재훈

영화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제37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최우수상을 수상하며 등단하였다. 2018년 이봄영화제 프로그래머, 제2회 서울무용영화제 심사위원으로 활동했으며 객석, 텐아시아 등 각종 매체에 영화와 공연예술 관련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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